지나치게 편리한 세상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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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편리한 세상의 이후
  • 박병상
  • 승인 2013.07.07 22: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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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상 / 인천도시생태ㆍ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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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삼십년 전 여름 밤. 그믐이라 달도 없는데, 해변의 작은 오두막에 모인 일행은 누가 먼저였는지 귀신 이야기를 꺼냈다. 찌는 더위가 남았어도 오싹한 소름이 온몸에 돋는데, 느닷없이 광으로 이어진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문은 밖에서 잠가야 했고 밖으로 나가려면 칠흑 같은 어둠을 헤쳐야 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왜 문이 열렸지? 문이 열리려면 누군가 바깥문으로 들어와야 했는데, 광엔 아무 인기척이 없다.
비명 소리와 더불어 공포에 떨리는 눈들. 어느 누구도 같이 나서려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제일 젊은 남자가 나가야 했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절벽에서 광 바깥문을 열려는데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채려 소리 없이 다가오는 느낌으로 서늘했다. 지금도 그 살 떨리는 순간을 잊지 못하는데, 어릴 적 밤마다 비슷한 느낌 때문에 식구를 괴롭혀야 했다. 뒷간이라 불렀던 재래식 화장실이 대부분 밖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파트에 길든 요즘 아이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엄마, 우리 집으으은?” 얼음이 나오는 어느 정수기의 광고다. 정수기에서 굳이 얼음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 고급 정수기의 냉매는 차가운 물을 얼마든지 제공하지 않던가. 서양인처럼 얼음 띄운 물을 꼭 마시고 싶다면 냉장고를 활용하면 된다. 물이 빨리 얼어붙지 않는 정수기를 위해 들어가는 비용보다 그런 정수기들 때문에 들어가는 전기를 좀 생각하면 어떨까. 없어도 그만인 기능을 위해 낭비되는 전기만 줄여도 핵발전소 몇 기는 폐쇄할 수 있을 텐데. 편의로 위장된 고비를 광고는 부추기지만, 광고에 혼까지 팔 필요는 없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냉장고에 얼려둘 수 있고, 필요할 때 그 얼음을 꺼내면 되는데 그마저 귀찮다고 물을 얼리는 정수기를 들어놓는 세상이 되었다. 그를 위해 낭비되는 에너지는 도처에 핵발전소를 세우게 만들었고 화력발전소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킨다. 당장 누리는 편의를 대가로 후손이 누려야 할 세상은 위험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편의는 더는 지속되기 어렵다. 지구온난화와 핵발전소 폭발만이 아니다. 에너지 자체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북미원주민은 7대손을 염두에 둔다는데, 우리는 그저 지금의 탐욕만 생각한다. 당장 편의와 과시를 위해 소비하는 에너지는 머지않은 후손의 삶을 위협할 거라고 과학적으로 아무리 검증하며 경고를 해도 쇠귀에 경 읽기다. 여름이 길어지며 뜨거워져 빈발하는 태풍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와도, 예전에 없던 기상이변으로 풍수해가 속출해도 그저 지나가면 그뿐인 자연현상으로 치부하려 한다. 다음세대에 더 큰 재해로 다가올 거라는 증거를 들이대도 질끈 눈을 감고 만다.
기껏 100년 사용했던 석유는 이제 고갈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새로 발굴되는 유정보다 경제성이 없어 폐쇄되는 유정이 훨씬 많고 새로 발굴한 유정은 규모가 아주 작다. 산유국에서 자료를 제시하지 않아도 전문가들은 이미 석유위기를 분석했다. 2005년에 석유 소비량이 뽑아 올리는 양을 크게 앞질렀다는 게 아닌가. 석유만이 아니다. 유럽에서 퇴조하는 핵발전소를 우리와 중국이 지금처럼 마구 세운다면 석유를 대체할 것처럼 홍보하는 우라늄도 두 세대 전에 고갈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치명적은 핵폐기물은 전부 후손에게 고스란히 넘겨야 하는 건 물론이다.
환경과 다음세대에 떠넘기는 비용을 감안하지 않아도 화력과 핵발전소의 전기 생산비용이 햇빛이나 바람보다 높다는 걸 독일은 계산했지만, 지금과 같은 에너지 낭비를 계속 추구한다면 재생 가능한 자원도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산업국가 독일이 견디는 건 가정은 물론 산업체도 에너지 효율화와 절약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일인 당 우리의 절반에 미치지 않는 독일처럼 전기를 소비해도 내일의 에너지 공급은 불안정하다는 건 분명하다. 이제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나.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면 어떨까. 지금처럼 손을 뻗으면 스위치가 있지 않았던 시절, 뒷간에 가려고 가슴 떨어야 했던 시절엔 별이 하늘에 총총했고 산이든 들이든 흐르는 물은 그냥 떠 마셔도 별 일 없었다. 아궁이의 연탄으로 난방하고 석유곤로로 조리했던 시설, 겨울이면 방 안에 둔 주전자의 물이 꽁꽁 얼어도 집안에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내 똥이 거름이 되어 생산한 무와 배추가 밥상에 올라오던 시절, 음식쓰레기는 아예 없었다. 지금보다 오래 살지 않았지만 약에 의지하지 않는 몸은 언제나 건강했다.
파문당할지라도 평생 신부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이반 일리치는 자동차가 이동을 방해한다고 일찌감치 주장했다. 더 크고 안락한 자동차를 몰면 몰수록 움직이지 않는 몸에 질병이 늘어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 밖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 대기오염과 온난화 때문만이 아니다. 자동차 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 있는 자의 어려움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다치는 이는 자동차 밖에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내 한 몸의 편의를 추구하면 할수록 그 때문에 희생되는 이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한다. 현재의 탐욕은 황폐한 내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에어컨 없어도 책 읽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비데 없어도 병영 생활은 가능하다. 전기밥솥 없어도 현미든 씨암탉이든 얼마든지 요리해 맛있게 먹었다. 밤을 밝히는 전기가 없을수록 옆에 있어주는 이가 고맙다. 케이블카를 타고 손쉽게 오르면 산에 대한 경외심은 생길 리 없다. 산에 서둘러 오르면 생태계의 오묘한 자태를 살피지 못하듯, 빠른 자동차는 이웃과 후손은 물론 자신의 건강도 살피지 못한다. 그게 행복할까. 자신의 손발로 일하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천천히 살 때, 소외되는 자 드물었다.
요즘 지금 젊은이는 하품할 이야기일 테지만, 손에 전화가 없던 시절, 반가운 이를 만나기 위해 거리에서 3시간을 기다린 적 있다. 그렇게 기다리며 생각이 깊어지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 중독된 편의를 버려도 행복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깊어진다. 참 편리한 세상은 머지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다. 어떤 이는 성장이 멈춘 사회를 대비하라고 했는데, 그보다 흔쾌히 퇴보할 준비를 해야 할 듯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보다 내 노후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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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미정 2013-07-09 09:22:15
좋네요~
공감해요...
저도 몇년째 더위에 늘 에어컨을 고민하지만 이런 글을 보면 안사길 잘했어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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