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상태바
피로사회
  • 지용택
  • 승인 2013.07.09 2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용택칼럼]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44444.jpg
 
 
『피로사회』는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가 쓴 얇은 철학 서적이지만 독일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한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큰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저서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시작되는 이 책의 「규율사회의 피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적 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인이다.” 이렇게 현대사회를 요약한 탁월한 식견은 드물다. 정부·대기업·공공기관 그리고 중소기업에서 프로젝트나 일감을 처리할 때 경쟁자로부터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먼저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 일의 성패는 모두 자기 자신에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새로운 것, 더 다른 것, 더 많은 이익을 위한 사고와 행동 속에 휴식은 없다.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며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사고를 과대하게 사용하고 소진한다. 운동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약물을 사용하듯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되는 도핑(doping)사회로 빠져들게 된다.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처럼 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수감자와 같이 무기력한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이 책의 앞부분 내용이다.
 
뒷부분에서 저자는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으로 자기주장을 대신한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교육”이며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라고 주장한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성과사회 즉 피로사회, 우울사회, 행동사회, 도핑사회로 깊숙이 들어서서 OECD국가 중에 자살률이 제일 높은 불명예를 누리고 있다. 한국 정치와 국회는 서민들에게 빛이 있는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서야 간다”는 말이 있다. 멈추고 사색하고 멀리 보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시민은 갈망하고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이전투구를 듣는다면 시민은 누굴 바라봐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만일 시민이 분노하면 그 분노는 사안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분노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는 밤을 지새우며 고민해야 한다. 또 하나 공자(孔子)가 “사람이 도(道)를 넓힐 수는 있어도 도가 사람을 넓힐 수는 없다(人能弘道 非道弘人)”고 한 말은 우리 삶과 인간 세계를 다시 한 번 깊은 사색으로 몰고 간다. 사람이 없는 도는 없다는 말이다. 사람만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순자(荀子)는 일찍이 “혼돈을 평정할 지도자는 있어도 혼돈을 평정할 법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이집트·시리아에 법이 없어 혼란과 무질서가 이렇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정치, 양심과 염치가 돋보이는 정치, 사람을 찾는 정치가 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고, 장난질 치고, 억지 부리는 것은 역사가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 앞에서는 누구라도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멈추고 생각하고 다시 걷는 정치가 바로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