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의미 찾기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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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의 의미 찾기 Ⅰ
  • 김국태
  • 승인 2013.08.07 00: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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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인천교육 미래찾기(21)

인천시민들은 인천교육의 변화를 갈망합니다그러나 변화로 가는 길을 놓기는 쉽지 않습니다변화의 지향성에 대한 공론이 부족한 탓입니다변화하려면 공유할만한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미래도시를 꿈꾸는 인천에서 인천in’은 교육을 화두로 끌어안고 변화의 방향에 대해 먼저 고민하려 합니다그 시작으로「인천교육연구소」와 함께 인천교육에 대한 고민이 담긴 칼럼을 연재합니다매주 수요일에 교육현장에 발 딛고 선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다른 의견이 있다면 더욱 낮은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 가감 없이 시민들께 전하겠습니다그렇게 인천교육의 공론장이 생긴다면 미래의 인천교육은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in’과 「인천교육연구소」가 함께하는 '인천교육의 미래찾기'에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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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의 의미 찾기 Ⅰ

김국태(인천교육연구소, 인천부평초교)


한 학기를 마무리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김샘은 지난 한 학기동안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잠시 생각해본다. 이런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이 있다. 참으로 좋은 교사로 살아가기 힘든 시절이기 때문이다. 교육적 가치를 스스로 판단하고 학생들과 의미있게 소통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교사들이 밖으로 밀려나고,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이 비슷한 위기에 처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교육, 수업 등 뭔가 가치있는 것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을 지원하려는 모든 시도가 잔혹한 정치적 공격을 받고 있다. 참으로 열심인 교사들을 힘겹게, 무기력하게, 두렵게 만드는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육정책들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준비시키느냐, 이런 준비가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데 어떤 도움이 되느냐 하는 근본적인 핵심에서는 비껴간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악몽같은 현실을 헤쳐 나갈 지혜가 경력 20년에 들어서는 김샘에게도 절실한 때이기도 하다.


김샘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교사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제도적으로 규정된 교사의 역할에 대한 통념을 넘어서 교사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성찰해보자는 말이다. 마침 김샘이 자주 읽던 <우리교육> 잡지에 실린 ‘교사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글에서 교육학과 양은주 교수가 ‘철학적 탐구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과 사건들 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명료화하는 일이요. 우리를 지배하는 생각과 가치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묻는 일이요.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일’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울러 교육조직을 관리하는 행정적 효율성을 모색하는 관점에서 교사의 직분을 정의내리는 방식과도 분명히 구별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진정한 가르침의 의미를 캐물으며 지금의 교사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새롭게 북돋워줄 나름의 이데아를 찾아보고 싶었다.


이 맥락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과 우리를 지배하는 생각을 비판적으로 되묻는 일이다. 현재 공교육의 모습은 일부 정치가에 의해 교육 목표가 왜곡되고, 교육에 대한 책임감은 표준화된 시험의 결과로 판가름되어 교사들의 정체성도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관리업무를 총괄하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교사의 가르침이란 교육과정이라고 불리는 꾸러미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가와 학자, 교수 혹은 정책입안자들의 지혜와 생각을 전달하는 일만 할 뿐이다. 교사는 교육계의 위계질서의 가장 아래에 학생 바로 위에 존재한다. 물론 학생이 가장 밑바닥을 차지한다. 학생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보다 학습의 의미가 먼저 요구되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면 배우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누가 교육의 중심에 교사와 학생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교사들은 교육과정을 그대로 따르는 일이 대부분이다. 사실 교육과정을 고민하면 항상 교사들은 벽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교육과정이 학생들의 배움의 의미보다는 각 교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입시교육의 큰틀속에서 어떤 것이 알거나 경험할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판단을 접어야 한다. 주어진 교육과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객관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이렇게 수단을 목적과 분리하면 학생들을 복종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이러한 복종의 패러다임은 수업의 영역까지 물론 확장된다. 여전히 교사는 교실에 들어서면 주로 지시하고, 약간은 보여주며 늘 교실의 앞쪽 중심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교사가 효율성과 표준화에 대한 압력을 받는 학교공장의 사회적 기술자 이상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지금의 관료적인 학교의 현실이 교사를 학생 학습에 대한 관리인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학교 현실은 교사들의 생각을 미리 정해주고 감독하며 활동을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거대한 비인간적 시스템은 교사들에게 순종과 순응을 기대한다. 교육과정을 별 생각 없이 가르치고 별 감정 없이 학생들을 통제하길 바란다. 한편 학생들에게도 규칙을 따르고 자기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하도록 끝없이 요구한다. 요즘 학교에서 넘쳐나는 것은 관리적 시스템을 위한 온갖 위원회와 규칙들뿐이다. 가르침이 ‘관리와 통제’의 담론에 휘둘리는 한, 교사는 누군가가 정해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그렇고 그런 하루를 보내게 된다.


지금의 관리와 통제중심의 학교 현실은 교사들에게 가르침의 고정관념과 편협한 신념을 만들어준다. 가장 중심에 있는 담론은 아마도 ‘좋은 교사의 첫 번째 필수 조건은 교실을 잘 통제하는 것이다’일 것이다. ‘3월 한 달은 절대로 웃지 말라.’는 선배들의 충고를 초임 시절 자주 듣는다. 어떤 교사들은 ‘3월 한 달은 강하게 나가야 조금씩 풀어주어도 통제력을 잃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교사들의 관심사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다룰까에 초점에 놓여진다. 물론 이 담론이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통제에서 벗어난 교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사이면서 교육 개혁운동가인 윌리엄 에어스는 자신의 책 <가르친다는 것>에서 교실통제가 가르침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정하는 단선적인 면과 교실 통제를 교육과정 전체와 따로 떼어 생각하는 편협함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한다. 교실 통제의 고정관념은 수업을 지적 과업으로 보는 대신 행동 통제를 우선시하는 좁은 시각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아울러 이런 것들이 교사의 관심을 핵심적인 것에 주목하기 보다는 잘못된 쪽으로 돌린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예로 ‘좋은 교사는 재미있다.’ ‘좋은 교사는 훌륭한 연기자’라는 신념을 갖게도 만든다. 좋은 선생님이 늘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교사를 연기자로 보면 교육의 깊이와 결이 상당히 사라지게 된다. 이런 편협된 신념들은 가르치는 일을 수업 내용을 전달하거나 지식을 나누어주는 일로 보는 관점과도 연결된다. 이건 교육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인데 이 신념에서는 전부로 본다.


아울러 이런 통제와 관리의 고정관념은 학생들을 보는 시각과 관점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교사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아마도 ‘요즘 학생들은 예전과 다르다’라는 허상일 것이다. 어떤 교사는 자기가 초임시절의 아이들는 잘 가르쳤는데 요즘 아이들은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관리와 통제중심의 고정관념이 어느새 교사의 자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이상적인 아이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보니 4학년 선생님들은 모두 3학년 선생님을 원망하고, 중학교 선생님들은 초등학교 선생님한테 불만을 갖고, 대학교 교수들은 전체에 대한 불평을 한다. 아이들이 준비가 안 된 채로 왔다면서 말이다. 마치 이상적인 4학년 아이가 있고, 이상적인 중학교 신입생이 있고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그림자일 뿐이다. 사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학교로 온다. 교실 문을 들어오는 진짜 아이들의 모습보다는 평균 이상의 아이들로 시각을 고정시키게 된다.


아울러 가르침이 통제와 관리중심에 놓여 있다보니 교사들은 항상 아이들을 문제적으로 보게 만든다. 이런 시각은 오늘날의 아이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형편없다는 허상을 갖게 만든다. “요즘 아이들은 사치를 좋아한다. 버릇이 없고 권위를 조롱하며, 어른을 존경하지 않고, 일하고 행동하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요새는 어른이 방에 들어와도 일어서지 않는다. 부모에게 말대꾸하고 수다스럽고 밥상에서 밥을 게걸스럽게 먹고 스승에게 대든다.” 사실 이 글은 무려 2400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쓴 것이다. 심지어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열 살하고 스물세 살 사이의 나이는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 그동안에 차라리 잠이나 자든가. 그 나이 때에 하는 일이라고는 여자를 임신시키거나 조상을 모독하거나 도둑질하고 쌈질하는 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오늘날 아이들도 아이들일 뿐이다. 교사 자신의 젊은 시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망각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관리와 통제로 만들어진 학교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진 교육적 현상과 우리를 지배하는 생각을 비판적으로 되물어보았다. 지금의 학교 현실은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과 정상적인 가르침을 통한 적극적인 소통과 교감을 요구하기 보다는 복종과 순응, 질서, 명령과 통제를 요구한다. 이런 현실에서 교사는 그저 관료주의적 톱니바퀴의 부속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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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ol02 2013-08-08 14:07:20
문제는, 학생들을 보는 아주 웃긴 보수주의자들이 이 사회의 헤게모니(hegemony)를 잡고 있다는 점이죠. 그런데 이 헤게모니의 변화가 아주 천천히 점차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이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진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사람들이 죽어갔던가요... 헤게모니를 바꾸자고요... 이제는 양의 질적인 전환이 순식간에 일어날만큼...아이들의 생각과 문화가 바뀌었으니까요. 아이들은 그저 그대로 있었을 뿐이잖아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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