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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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냈다
  • 양진채
  • 승인 2014.01.09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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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양진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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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 겨울, 터널을 지날 때마다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장편소설 『설국雪國』의 첫 두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현(懸)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雪)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이라거나, 동양적 애수의미를 놀랍도록 아름답게 형상화한 걸작이라는 평을 떠나 이 두 문장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꽤 회자되었다. 터널, 눈의 고장, 밤의 밑바닥이라는 단어들이 문장을 이루며 주는 차갑고 선연한 묘사는 내게도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다.
잊히지 않는 소설의 첫 문장으로 로맹가리의 장편소설 『새벽의 약속』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끝났다. 빅서 해안은 텅 비어 있고, 나는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로다.
‘끝났다,’ 어떤 작가가 소설을 시작하는 첫 머리에 ‘끝났다’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로서는 그의 도발적인 이 첫 문장에 매료되어 그의 다른 작품을 다 찾아 읽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묻는 말이, 무슨 얘기를 쓴 것인지 묻는다. 물론 독자로서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썼는가 궁금해서 물었겠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꽤나 난감하다. 현대 소설은 춘향전, 심청전처럼 주인공이 어찌어찌하다 어찌되었다 식의 줄거리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대의 소설들은 강렬한 이야기 대신 아주 작고 소소한 이미지를 통해 배면에 깔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성의 절묘함, 잊히지 않는 한 단락이나 한 문장이 그 소설을 대변하기도 한다. 한국소설의 서사의 부재를 우려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 세상에 더 이상 할 얘기가 어디 있겠는가. 또 이야기로 치자면 영상으로 대변되는 드라마나 영화 쪽이 훨씬 스토리가 강하다. 거기다 대고 어쭙잖은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문학을 더 구석으로 몰고 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제 소설은 문장이다. 영상이 다루지 못하는, 언어만의 질감과 맛을 살리는 일, 그것이 문학이 살아남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설국雪國』이나, 『새벽의 약속』이 어떤 내용이냐고 묻지 말기를 바란다. 다만 시간을 내서 책을 읽은 독자의 마음속에 무언가 희미하게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 소설의 몫은 다 한 것이리라는 생각도 든다.
『설국雪國』과 『새벽의 약속』의 강렬한 첫 문장이 어떻고, 현대의 소설의 어떻고 썼지만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두 소설의 첫 문장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최근 입안에서 맴돌 듯이 그 두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오른 것은 어떤 고통과도 같은 절망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로 대변되는 일련의 현상들, 사회 현상 뿐만 아니라 월간 『현대문학』이 일으킨 일련의 사태들은 우리가 과연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이런 때에 너는 어쩔 것이냐를 묻고 있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지고, 끝났다 라는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날들이었다. 또한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진지하게 묻는 시간이기도 했다. 로맹가리의 『새벽의 약속』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것이 전부다. (중략) …… 나는 살아냈다.
살아낸 자는 살아낸 자의 책무를 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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