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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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2)
  • 양진채
  • 승인 2014.02.18 2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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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 공간을 거닐다(3) - 한국근대문학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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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독이는 기분으로 김소월의 시 「먼 후일」과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읽는다. 두 시 역시 전면에 읽어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는 지금과 당시의 한글 표기법이 많이 달랐다. 직접 문학관에 가서 그 시대의 표기법 그대로 읽어 언어의 맛을 음미해보길 권한다. 이 시기 빼놓을 수 없는 시인으로 김소월과 한용운을 들 수 있겠다.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은 복각본 형태로 만들어 비치해놓았다. 관람객이 직접 펼쳐 읽어보며 그때를 느끼게 해놓았다. 눈이 호사를 누린다.

재미있는 것으로 김소월의 시를 노래로 들어볼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는데, 노래 제목을 터치하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식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진달래꽃」 말고도 송골매가 부르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그윽한 목소리로 유주용이 부르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역시 김소월의 「부모」라는 시였다. 그 밖에도 많은 시들이 노래로 만들어져 불리고 있어 놀랐다. 김소월의 시의 리듬과 쉬운 시어 등이 대중과 친숙한 노래로 만들기 좋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해본다. 문학이 어떻게 더 많은 독자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문화저변과의 연계에 대해서는 지금도 유용한 고민이리라.


소설에서는 식민지 현실에 눈을 뜨고 근대소설의 기틀을 마련한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김동인, 현진건, 나도향, 염상섭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은 인력거에 올라탄 중년 신사 그림이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인력거를 끌던 김첨지는 보이지 않았다. 인력거를 끌고 아픈 아내와 젖도 못 뗀 아이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하지만 운수좋은 날은 오지 않는다. 최하층민인 김첨지에게 운수좋은 날이란 애초에 없었다.

여로 형식의 이인화의 「만세전」은 주인공의 이동 경로에 따라 그림을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게 만들어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1925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시기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식민지 현실에 맞서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현실 참여를 부르짖던 진보적 문학운동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카프 작가들이 활동하던 시기도 이 시기이다. 카프에 대한 소개와 작품들, 그림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최서해의 『홍염』, 조명희의 『낙동강』, 한설야의 『과도기』 등의 작품도 이 시기 작품이다. 몇 년전 이경재 평론가가 한설야의 작품세계를 조명한 『한설야와 이데올로기의 서사학』을 의미 깊게 읽은 바가 있어 친근하게 느껴졌다. 강경애의 『인간문제』 역시 최근에 읽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척 가깝게 다가왔다.


‘월미도(月尾島) 끝에 물에다 지어 놓은, 용궁각인가 수궁각인가는 오늘도 운무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벌써 열나흘째 줄곧 그치지 않는 비다.’로 시작하는 이태준의 「밤길」. 빗속에 죽은(숨이 끊어진 줄 알았지만 꼴딱대는) 아이를 물구덩이에 묻어야 하는 황 서방, 돈이 행복을 앗아갈까 두려웠던 벙어리 아다다가 돈을 바다에 뿌리던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김동인의 「감자」의 복녀의 삶 등. 내 문학적 자양분이 된 작품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출판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읽을거리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 책꽂이에 꽂혀 있던 한국문학, 세계문학의 이름을 걸고 나왔던 책들을 밤이면 펴보고는 했던 그날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구인회』 창간호를 보는 기분은 남달랐다. 1933년에 순수 문학을 지향하는 아홉 명의 작가들이 조직한 동인회. 발족 당시 작가들은 김기림,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이었다. 표지에 작가와 작품 이름이 나와 있었다. 의기투합하여 구인회를 만들고 첫 잡지를 만들어낼 당시에 이 아홉 명의 작가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문단의 중심 작가로서의 사명과 동인으로서의 우애. 작품에 대한 경외와 질투가 함께 하지 않았을까, 후세의 나는 그저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박태원 소설가의 소설집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역시 책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작가와 제목을 열두 칸에 한 자씩 넣어 표지 전체를 차지하는 형식이었는데 지금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된 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소설만큼이나 말이다.


잠깐 그 당시 카페를 재현해 놓은 그림 판 앞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해본다. 그 당시의 모던이스트들과 함께 사진을 찍음으로써 사소한 낭만을 즐길 수도 있겠다.

또한 어플을 다운받아서 근대문학의 작가들 얼굴 아래에 있는 표시판에 스마트 폰을 가져다 대면 작가에 대한 정보, 작품의 줄거리, 작품 전체를 볼 수 있는 유용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어 최신기기를 즐기는 젊은층을 배려했다.

그 옆으로는 남생이와 춘향전을 볼 수 있는 영화관 형태를 띈 관람석도 눈에 띄었다.


1935년부터 1945년에는 이상의 「날개」, 김유정의 「동백꽃」 등의 작품들이 쏟아지던 때이기도 하고 생명파 작가들이 서정주 유치환, 오장환 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30년대 말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친일문학 강요 등의 암울한 시기도 이때이다.

놀랍게도 1941년 발행한 남만서고에서 발행한 서정주의 100부 한정판 시집 『화사집』을 볼 수 있었는데 빼어난 제목 서체가 시인을 빼닮아 있는 인상이었다. 시인이 직접 표제를 쓴 것인지 궁금했다. 인터넷에서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당시 편집 일을 보았던 오장환 시인이 관여하지 않았나 하는 설도 있으나 서정주의 어느 글에선가 정지용 시인이 김정희의 추사체를 빌려 먹으로 직접 썼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자료를 찾아보니 『화사집』 100부 중에서도 15번까지만 작가기증본이라고 하는데 진열된 것은 13번이었니 그 가치가 더욱 크겠다고 하겠다. 유치환 『생명의 서』, 오장환의 『헌사』 등 희귀본도 볼 수 있었다. 거제의 청마 기념관을 간 적이 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 기념관에서조차 유치환의 『생명의 서』 원본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책을 인천에 있는 한국근대문학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니 의기양양한 기분까지 들었다.

1945년부터 1948년 해방과 함께 그동안 출간되지 못했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육사의 『육사시집』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청록파 시인들 작품도 이 시기에 발간되었다. 다른 책의 표지와는 확연히 다른 격자 우드 재질의 종이를 사용해 품격을 높였다. 염상섭, 김동리, 채만식, 황순원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1940년대부터 1948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작품을 읽고 있는 때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2층에는 특집코너로 ‘인천의 근대문학’과 핫이슈로 ‘한국근대대중문화’를 다루고 있었다. 근대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에서 활동했던 김동석 함세덕 배인덕 작가를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인천을 배경으로 한 작품의 구절을 뽑아놓은, 인천의 문학 지도에는 염상섭의 「이심」에 나오는 한 단락, 월미도와 자유공원을 묘사한 부분이 나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동차는 사람이 장날 같이 복작대는 해안을 한 바퀴 돌아서 만국공원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도 사람의 떼로 우글거린다. 중등학생의 떼며 여학생의 행렬도 앞에 보인다. 아마 이 학생들도 음악회 구경하느라고 몰려드는 모양이다.……”

이 글을 통해 당시 경성에서 가까웠던 월미도나 자유공원, 송도유원지 등이 나들이객들로 붐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해조의 「모란병」 이광수의 「재생」 등에서도 인천의 풍경을 한 대목 엿볼 수 있어 지금의 인천과 새삼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소설 속 배경을 가능한한 인천으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그 당시 인천을 묘사해놓은 문장들이 새삼스러웠다.


이렇게 1층과 2층을 돌며 1894년부터 1948년까지 근대문학을 찬찬히 둘러보았다면, 최종 복습하는 의미로 작품을 한 번 더 짚어볼 수 있는 문학연대표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근대문학의 순문학을 살펴보고 정리하였다면, 쉬어가는 핫이슈 코너를 둘러볼 차례이다. ‘한국근대대중문화’로 당시의 대중소설, 영화 포스터 등을 흥미로운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연애소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는데, 이수일과 심순애의 명장면인 “김중배의 반지가 그렇게 탐나더란 말이냐-”로 시작되는 영상도 볼 수 있었다. 추리와 탐정소설도 이 시기에 창작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위해 문학사 상식퀴즈를 o ×로 풀어볼 수 있는 코너도 있었고, 엽서도 쓸 수 있고, 작가들의 캐리커처를 도장으로 만든 직인도 찍어갈 수 있는 다양한 코너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픈 다리를 잠시 쉴 겸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스쳐지나가기 쉬운 편집여언도 읽어 볼만 했다. 특히 첫 문장 ‘문학은 인간의 삶과 세계의 이해의 기초를 제공합니다.’은 평범하지만 인상적이었다. 상설전 관련에 도움을 주신 분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익히 알고 있는 분들도 꽤 눈에 띄었다. 이 분들로 인해 한국근대문학관이 풍성해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에서 다시 옆으로 내려가면 기획전시 코너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학생들이 김유정과 황순원 소설을 읽고 직접 그림 작품을 꾸며놓고 있었는데 학생들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정겨웠다. 개관식 때는 <기형도-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으로 기획전시를 하던 공간이었다. 다른 문학관을 가보면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문학관이 많아 아쉬움이 컸는데, 근대문학관은 세심한 기획력과 짜임새 있는 내용들이 밥을 먹지 않아도 절로 배부른 기분이 들게 했다. 인천에 또 하나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는 곳이 생겨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다시 한 번 한국근대문학관 건물을 살펴본다. 아트플랫폼과 마찬가지로 개항기 시대 물류창고와 김치공장으로 쓰였던 건물을, 전체 틀은 살린 채로 근대문학관으로 변모시켰다. 참으로 근대문학관과 어울리는 건축이 아닐 수 없다.

봄날 자유공원에 벚꽃 난분분 휘날릴 때 인천역에서 삼국지 벽화와 자장면박물관, 자유공원을 한 바퀴 돌고,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아트플랫폼과 근대문학관을 도는 하루 일정을 잡아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런 날에는 푸른 잉크빛도 더 푸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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