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깽을 아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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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깽을 아시는가
  • 양진채
  • 승인 2014.03.0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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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 공간을 거닐다(4) - 한국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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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등지고 서니 멀리 부두가 보였다. 닻을 내린 배들이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비린 바다 내음은 박물관까지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1903년 12월 첫 이민자들이 제물포항에 모였다. 국내 정세는 혼란했고, 하와이로 가면 15불이라는 큰 돈을 벌 수 있고 아이들에게는 영어를 배우는 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사람들은 하와이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가는 길은 멀고도 아득했다. 선창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파도와 망망한 바다뿐이었다.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수송한 갤릭호는 크기가 4,206톤에 불과한 연안여객선 정도의 작은 배였다. 선령이 17년이나 되는 노후 선박이었다. 이 배를 타고 하와이로 간 한국 이민자들은 멀미로 쓰러졌고 지쳐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생애 첫, 낯선 땅에 도착했다. 아무도 우리의 언어를 쓰지 않았고, 우리의 옷을 입지 않았다. 그들에게서는 누린내가 났고 손가락까지 난 털들은 진저리를 치게 했다. 그리고 끝없는 노동, 착취와 죽음이 있었다.


다시 1905년 4월 4일 일본의 인력 송출 회사가 모집한 한인 1033명이 영국 상선에 몸을 싣고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 5월 16일 멕시코 유카탄 주의 중심 도시인 메리다 시에 도착한다. 저 잔혹한 멕시코 이민 1세대, ‘애니깽’의 역사가 시작된다. 잘 살아보려고 꿈과 희망을 품고 떠났던 이민 생활. 멕시칸 드림이 멕시칸 악몽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애니깽은 스페인어 ‘에네켄(Henequ?n)’의 한국식 발음이다. 당시 메리다 지역 경제의 중심을 차지했던 에네켄은 선인장의 일종인 용설란(龍舌蘭) 종류로 이민자들은 모두 이 에네켄 잎을 잘라 모아 다발로 묶은 뒤 가공 공장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가시에 찔려가며 중노동을 해야 했다. 하루 1만 개의 할당량을 못 채우면 채찍이 사정없이 온몸을 훑었다. 먹고 자는 일 조차 고역이었다. 그야말로 산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뱃일과 농사일과 막노동에 단련된 몸이었지만 지쳐 쓰러지기 무섭게 아침이 왔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고 다시 맞고 싶지 않은 아침이었다. 신세계는 없었다. 제물포에서 떠나던 날의 풍경은 아스라이 지워졌다. 이민을 떠났던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지금 나는 그들의 삶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에 왔다. 2014년을 살고 있는 나는 비린내가 끼쳐오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거리만큼이나 조국을 등지고 하와이나 멕시코로 이민을 가야만 했던 생애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김영하의 소설 『검은꽃』이나 영화 <애니깽>으로 존재했다. 그마저도 의식 밖에서 서성거렸다. 나는 김영하의 소설 『검은꽃』을 다시 펼쳐들었다.

 

이정의 눈앞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오래 전에 잊엊다고 생각한 제물포의 풍경이었다. 사라진 것은 없었다. 피리 부는 내시와 도망 중인 신부, 옹니박이 박수무당, 노루피 냄새의 소녀, 가난한 황족과 굶주린 제대 군인, 혁명가의 이발사까지, 모든 이들이 환한 얼굴로 제물포 언덕의 일본식 건물 앞에 모여 이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이토록 선명할까. 이정은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의 폐 속으로 더러운 물과 플랑크톤이 밀려들어왔다. 군홧발이 목덜미를 눌러 그의 머리를 늪 바닥 깊숙이 처박았다.

 

 

2008년 6월 13일에 개관한 이민사 박물관은 해사고등학교 앞에 있었다. 하와이로 첫 이민을 떠났던 1902년 이후 백 년 만에 세운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정갈했고 자료는 잘 보존되었거나 현대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음성을 듣거나 컴퓨터를 통하여 과거 신문을 검색해 볼 수도 있었다. 박물관인 것이다. 이민 백년의 삶이 박물관 안에 잠들어 있었다. 현대식으로 잘 꾸며진 박물관이 왠지 불편했다. 그럴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굵은 사탕수수를 베고, 제 키보다도 큰 선인장인 용설란 가시에 찔리고 긁혀가면서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을 삶들이 박제된 기분이었다. 백 년이 지난 그 삶은 고통이라기보다 역사였다. 박물관은 역사를 보존해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전시실의 처음인 2층에 들어서자마자 보았던 노래 가사 때문인지도 몰랐다.

 

춘산에 파초를 바라보게 염목이 청청하여 새꽃이 피네

삼년에 덩굴은 마를지라도 겉뿌리만 성하면 소생하노라.

나라의 뿌리는 국혼이오니 형식상 국혼이 덩굴같도다

형식상 국혼 썩지 않아야 오천년 무궁한 영생하리라

슬프다 이천 모여서 오늘 덩구릅다 한탄말아라

국혼을 부르고 한 번 나가면 이 눈물이 변하여 영광되겠네.

 

<국혼가>였다. 낯선 땅,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설은 음식, 고통스런 노동, 비인간적 대우 속에서도 그들이 끝내 잊지 않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조국이었다. 조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노래를 지어서라도 잊지 않아야 할 조국엔 무엇이 있더란 말인가. 그 당시 대한제국은 한일합병이 되었으니, 그들은 국적도, 돌아갈 조국마저 잃어버린 처지가 되었다. 무능하고 무력한 식민지 조선에 의해 이들은 역사에서조차 버려지고 지워진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혼가>를 지어 불렀다. 잊지 않겠다. 비록 처참하게 떠날 올 수밖에 없었던 조국이지만 잊지 않겠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조국은 무엇인가.

이민 백년이 넘었고 모든 이민이 책이나 영화로 본, 가장 처참했던 멕시코 이민사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언제든 제 태어나 뛰놀던 곳, 명절 때면 휘황한 불빛 아래 모여들던 가족들, 옥수수나 감자를, 호박부침을 나눠먹던 이웃을 두고 낯선 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가 비록 비옥한 땅이라 해도. 박물관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민사 박물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에 4개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다. 2층부터 관람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제1 전시실에는 최초의 이민이 떠나던 당시의 제물포항의 모습과 최초의 이민을 모집하는 고시문, 여권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들 이민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일하던 모습과 생활상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걸음을 멈추었다. 최초의 이민자들이 가지고 갔던 가방 앞에서였다. 사과궤짝처럼 각진 짙은 갈색 트렁크 안에는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얼굴들을 잊지 않기 위해 당장 먹고 입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닌 것으로 유일한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제2 전시실에는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의 뿌리내리기로서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이민 간 젊은이들은 어느새 나이를 먹고 있었다. 한민족의 그들은 고국의 처녀를 신부로 맞고 싶었다. 고국의 처녀들 사진이 하와이로 갔다. 사진 속 처녀들은 단정했고, 쪽진 가르마 아래로 오똑한 콧날이며 뚜렷한 인중을 한 미인들이었다. 이미 마흔을 훌쩍 넘긴 이민 총각들은 젊었을 적 사진을 고국에 있는, 마음에 드는 신부 앞으로 보냈다. 처녀들은 그렇게 배에 몸을 실었다. 이른바 사진신부였다. 공부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잘 살고 싶었던 어린 신부들이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은 것은 사진보다 스무 살은 더 먹은 배우자와 땡볕 아래의 고달픈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이었다. 어린 신부들은 밤에는 울었고 낮에는 노동을 했다. 가정이 꾸려졌고 아이를 낳았다. 여자들로 인해 생활이 안정되었다. 작은 입식 부엌, 상에는 흰 쌀밥과 조기와 나물이 올려 있었다. 여성들은 종교, 산업, 애국활동을 펼쳤다. 한인학교에서는 을지문덕, 이순신 등 영웅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2세들을 교육시켰다. 땅속으로 점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제 3전시실에는 하와이 이민 이후 멕시코 에네켄으로 떠났던 이민자들의 가혹한 노동환경이 전시되어 있었다. 멕시코 이민은 멕시코 농장주들이 이민브로커를 통하여 순박한 한국 사람들을 데려다가 강제노역을 시킨 것이었던 것이다. 단 한차례로 끝난 대규모의 불법 노동이민이었다.


제 4전시실에는 전 세계 각국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700만 해외동포의 근황과 염원, 한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해외 이민 기념사업과 축제 문화 활동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와이 이민에서 시작된 우리 국민의 해외 이주의 역사는 오늘 날 세계 각국에서 눈부시게 활동하는 한국교민으로 뿌리 내리고 있었다. 한국 이민사 박물관은 역사의 한켠에 비껴서 있던 이민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전시관은 생소한 이민의 역사를 누구나 공부하고 알기 쉽게 사진, 자료, 증언, 모형, 컴퓨터 작업 등 다양하게 준비해놓았다. 또한 실패의 이민 역사가 아니라 세계 속의 대한인으로 부각시켜놓았다. 다행이다. 나는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외국인 근로자 둘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필리핀인일까, 미얀마인일까, 또 다른 생소하고 낯선 나라에서 온 이들일까. 그들도 우리의 하와이나 멕시코 이민처럼 꿈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우리가 기피하는 가장 힘든 일들을 그들이 하고 있다. 손가락이 잘리고, 때론 죽는다. 중국과 필리핀, 베트남 여성들이 팔리다시피 우리나라로 들어온다. 그들의 가방에도 가족사진이 들어 있을 것이다. 돈을 아껴가며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고국으로 짧은 전화를 걸 것이다. 그들의 역사에 우리나라는 어떤 이미지로 남을까. 그들의 역사에도 세계 속에 자리 잡은 우리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그 후세들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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