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검정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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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검정고무신
  • 양진채
  • 승인 2014.03.1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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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 공간을 거닐다(5)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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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찾아가던 나는 어리둥절했다. 80년대 중반 그 언덕 언저리에서 몇 달간 산 적이 있던 나로서는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에 조금 설렜다. 인천에 내내 살았지만 그곳엔 참으로 오랜만에 발걸음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세 들어 살던 집이 어디쯤인지 한 번 밟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곳에는 스무 살의 쓰리고 가슴 아파하던 내가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골목도, 집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산동네였던 그곳에는 어느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럴 수가!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달동네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이었기는 했지만 어딘가 20대의 나를 볼 수 있는 곳이 한 곳쯤은 있으리라 여겼던 내 생각은 순진한 공상이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리고 그 한 쪽에 달동네 박물관이 들어서 있었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60-70년대 산동네의 삶을 모형을 본 떠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었다. 미니어처처럼 작은 형태가 아니라 실물 크기의 집, 골목 등이 옛 모습 그대로 이다. 수도국산달동네에 살았던 이발사나, 연탄가게 아저씨, 솜틀집 주인까지 실명 그대로 등장한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일시에 쥐를 잡자. 쥐약 놓는 날’이라고 해서 정확한 날짜와 시간도 쓰여 있다. 당시에는 ‘쥐잡기 캠페인’까지 벌릴 정도로 쥐가 많았다고 한다. 약국마다 쥐약은 제일 많이 팔린 약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숨겨주는 인정보다 신고하여 같이 살자’는 반공포스터도 눈에 띄고, 군사혁명 담화문도 보인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이승복의 ‘공산당이 싫어요’는 웅변할 때마다 단골 절규 메뉴였다. 반공에 관한 포스터, 표어 글짓기, 그리기, 웅변 등의 행사도 많았다. 국민학교로 불렸던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글짓기시간에 쓴 반공 원고가 뽑혀 교실 뒤 게시판에 붙어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께서’라고 쓴 내 원고에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님께서’라고 수정해 놓았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큰 불경죄라도 저지른 사람마냥 그 게시판에 눈길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구멍가게에는 참기름 병과 하이타이, 아이스크림통, 국수, 실타래, 양초, 성냥 등이 전시되어 있고, 수도국산에 있었던 ‘은율 솜틀집’이나 연탄가게 유리문에는 그 가게를 운영했던 이의 이름도 나온다. 공동변소의 빨간등은 귀신이 나타나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하고 은근히 물어보는 얘기를 만들어냈고, 덕분에 한 동안 밤에 화장실 갈 때마다 무서워 누군가를 데리고 가야 했다. 여름이면 통통하게 살찐 구더기가 바글거렸고, 겨울이면 언 똥이 층층이 쌓여 탑을 이루던 그 곳은, ‘화장실’이 아닌 ‘변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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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잘사는 집 대청마루 가운데 벽에 걸려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 그리고 액자에 끼워 놓은 가족의 성장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가족사진,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보면 흑백텔레비전에서는 그 당시 제일 인기 있었던 레슬링이 방영 되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일의 박치기에 일본의 이노끼가 당하던 장면을 손에 땀을 쥐고 보던 기억도 난다. 연속극 ‘여로’는 또 얼마나 인기 있던 드라마였던가. 동네사람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모여들어 함께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찍어대던 그 시절. 외풍이 세서 잠을 자다보면 코끝이 시려와 얼굴까지 이불을 덮던, 처마의 고드름을 따 먹거나, 살얼음이 언 김치와 동치미를 고구마와 함께 먹던 기억. 겨울에 수도가 얼면 우물까지 가서 물지게 양 옆에 양은초롱을 매달고 가득 물을 지고 오다 흘려 고무신이 젖던 기억, 아이들이 즐겨보는 ‘추억의 검정고무신’처럼 그래, 그땐 참 그랬지, 새롭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찌 그런 기억들뿐이겠는가.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고 자랑스럽게 걸던 문패, 도화지만한 창문에는 마름모꼴 방범창이 달려 있었고, 담배 가게에서 아리랑을 사서 피우던 아버지도 있었다. 만화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껴가며 만화를 보던 기억, ‘미루꾸’라 불렸던 ‘밀크 캬라멜’의 맛, 교련복과 목까지 단추를 채우던 검정 교복, 교모. 박물관의 소품들은 다시 비슷하게 만들어 재현해 놓은 것이 아니라 고물상에서 뒤져서 가져다 놓은 것처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물건들이었다. 벽에 못질을 하고 걸어놓았던 옷을 가리기 위해 씌워 놓았던 흰 천에 놓은 수까지도 새롭다. 작지만 졸속으로 만든 박물관이 아니라 곳곳에 정성과 노력이 들어 있어 어디선가 골목 한 귀퉁이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올 것 같다.


수도국산(水道局山)의 원래이름은 만수산(曼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라고 한다. 이 주변 일대가 매립되어 바다가 땅으로 변하고 공장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이 자그마한 언덕은 바닷가의 조용한 숲이었다. 그러나 소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달동네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달동네’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의미로, 유래는 ‘달나라 천막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50~60년대 중반 사이에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은 정부가 정한 지역에 임시 천막을 치고 살면서, 방에 누우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인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었다. 그 이후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들었으며, 1960-70년대에는 산업화와 함께 전라, 충청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다. 산꼭대기까지 점차 작은 집들이 들어차면서 마침내 5만 5천여 평 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다. 말이 좋아 달동네지 그 달동네라는 말에는 낭만보다는 고달픈 삶이 더 어려 있다. 그럼에도 그 달동네가 그리운 것은 생존해 계신 분의 말씀처럼 정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수제비를 해서 나눠 먹고, 같이 부업을 하고 아픔을 나누던 정이 있었다. 그래서 박물관을 돌아보는 내내 그땐 그랬었지를 연발하며 추억의 공간과 사물들에 신기해하며 작은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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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방에서 뽑기를 했다. 종이를 펼쳐 보니 11등이었다. 점방 주인이 흰 돌사탕을 두 개 주었다. 입에 넣었다. 많이 달지 않으면서 맛있었다. 돌사탕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깨물어 먹지 못하고 내내 빨아 먹어야 했다. 그렇게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서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박물관을 나설 때는 좀 쓸쓸해졌다. 내가 살아왔던 한 시절이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역사를 말하기 이전에 내가 살아왔던 시간이 영영 묻힌 것이다. 처음 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에 스무 살의 내가 골목을 오르내리던 그 길이 그 어디에도 없어 당황했던 것처럼, 고작 30-40년 전의 시절을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웠다. 박물관 안에서는 당장이라도 아이들이 골목골목에서 뛰어 나오고, 악다구니치며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술 취한 가장의 노랫소리가 끌리는 발걸음에 얹힐 것 같더니, 아무도 없다.


박물관의 추억거리들은 내게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내내 어린 시절, 더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편이 아려오고 편치만 않은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달동네를 이제는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가. ‘변소’가 사라졌고, 공동우물이 없어졌다고 가난조차 박제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직도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추억할 무엇이 아니라 현재인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나는 소설 <협궤열차>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모든 추억은 추악하다. 그것은 적당한 망각으로 위장되어 있고 적당한 변명으로 미화되어 있다. 아전인수와 견강부회로 일그러져 있다. 너희들, 추억을 발바닥을 핥고 있는 인간들이여.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의 외관은 배 모형이다. 그 배가 산꼭대기에서 바다 한 가운데로 헤엄쳐 나가긴 요원해 보여도 배의 옆구리에 박힌 금빛 둥근 달만은 시리도록 휘영청 밝았다. 박물관을 돌아보고 그때 그 당시의 삶이 그리운 추억이 된다면, 잊고 살았던 소외된 우리 이웃도 애정이 담긴 눈으로 한 번쯤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도 박물관에 와서 그땐 그랬지, 웃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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