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 작가'로 알려진 최병관 사진가를 만나다
<어머니의 실크로드> 사진전이 5월 한 달 동안 남동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 소래 논현지구는 지금은 고층아파트가 숲을 이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과수원과 논밭이 있던 곳이다. 21번 시내버스가 지나다니던 길, 그곳 산뒤마을에서 나고 자란 최병관 사진가는 어머니가 장사하러 다니신 길과 변하기 전 고향을 찾아다니면서 필름으로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시인이면서 사진작가인 그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다닌 길을 뒤쫓아 기록했으며, 고향을 낱낱이 기록했을까. 그는 여전히 고향을 떠나지 않고 소래포구 쪽에서 고향을 지키면서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최 작가는 DMZ 사진작가로도 유명하다. 1997~1998년까지 비무장지대 사진가로 위촉돼, 한국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 만에 민간인 최초로 휴전선 155마일을 2년 동안 도보로 세 차례 횡단했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사진작업을 했다. 그때 기록을 책으로 낸 <휴전선155마일 최병관의 450일간대장정> <38도선 현대의 비경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 외 7권을 냈고, 사진과 시모음집 <잠들고 싶은 고향> 외 1권을 냈다. 이러한 기록들로 1999년 대통령 표창, 2004년 외무부장관표창, 2002년 인천광역시 문화상, 2000년 육군참모총장 감사패를 받았다.
- 작업실에 있는 사진 자료는 한눈에 봐도 정리가 참 잘 돼있네요. 수없이 찍은 사진들을 꼼꼼히 알기 쉽게 정리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28년 전부터 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28개 주제를 정해서, 끊임없이 작업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외장하드 하나면 되지만, 예전에는 외국에 나갈 때 정리된 바인드를 들고 나가야 했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시간이 걸리지만, 정리하는 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립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하루 나가서 사진을 찍으면 정리하는 데 꼬박 사흘 걸립니다.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해 다른 일은 통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것들을 많이 작업하셨습니다. 주로 어떤 데 관심을 두셨습니까.
“사라진 고향, 어선 등등 28개 주제별로 사진을 찍죠. 어선도 목선, 나무로 만든 배를 주로 찍었습니다. 여기 봐요, (작업실 한쪽에는 5월에 남동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할 사진이 얌전하게 놓여 있다.) 이건 이번에 전시할 사진들인데 필름은 과정이 좀 복잡해요. 26~27년 전 풍광들이 있습니다. 염전이 다 없어졌어요. 어머니, 고향 등을 다루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던 동네에 아파트가 다 들어앉았어요. 소래포구 쪽이 어떻게 변했는지 다 알죠.(웃음) 구석구석까지 어땠는지, 어떻게 바뀌었는지 다 알아요.”
“이 사진들은 인천의 갯벌을 찍었습니다. 1989년부터 2009년까지 찍은 것이고, 필름 작업할 때 정리했습니다. 인천의 갯벌은 참 아름답습니다. 근데, 지금은 다 없어졌잖아요. 환경오염 때문인지 다 없어졌고, 조금 남아 있어도 많이 훼손됐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관광자원인데 그 가치를 몰라요. 강화도, 영종도… 주제별로 찍었습니다. 봐요, 얼마나 멋있는지… 신기하잖아요.(웃음)”
-선생님 고향이 산뒤마을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정확히 산뒤마을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소래포구 쪽이 아파트숲으로 변하기 전에 ‘산뒤상회’라는 곳을 지나다녔습니다. 21번 버스를 타고 가끔 오가던 길이었는데 그때 가게 이름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산뒤마을은 그쪽 어디인가요.
“아, 산뒤상회를 알아요.(웃음) 산뒤상회는 양씨네에요. 그 뒤쪽에 우리 집이 있었어요. 자 봐요, 봉우리가 다섯 개 있는 오봉산이 보이죠. (사진을 가리키며) 오봉산 아래, 지금은 중학교가 있는 운동장 자리가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요. 산 밑 양지 쪽에 있었어요. (오봉산 아래를 가리키며) 여기 보면, 이쪽이 산뒤마을이에요.(웃음)”
-사진작가가 되신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번 전시회 제목이 <어머니의 실크로드>입니다. 선생님한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 어머니는 사십대 중반에 혼자 되셨습니다. 어린 남매를 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소래는 인천에서 가장 끝입니다. 당시만 해도 하루에 버스도 세 번, 기차도 세 번 다녔죠. 어머니는 서울에서 시집 오셨는데, 홀로 자식들을 키우느라 말할 수 없이 고생을 하셨습니다. 막내인 저랑 사셨습니다. 30대 초반에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습니다. 늦은 나이였죠. 어머니는 내가 무척 존경하던 분인데, 어머니와 언젠가는 이별하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또 고향이 다 없어지겠지… 그런 생각이 늘 들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생각이 적중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내가 어떻게 사는 게 보람있는 삶인지 고민했습니다. 가장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사진작가보다 시로 먼저 등단했습니다. 시인으로서 알려진 것보다는 사진가로 국제적으로 더 알려지게 됐지만요. 둘 다 하기는 쉽지 않더군요. 시집을 두 권 내고 통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포토에세이를 두 권 냈는데, 에세이를 쓰다보니 시를 더 못 쓰게 되더라구요. 시는 참 어렵습니다. 내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올리는데, 언제나 시가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쓰려니까 힘들어요. 결국 문학이나 미술이나 쉼 없이 끈기있게 해야 하는데, 맥이 끊기니까 힘들더군요. 시는 소설보다 더 어렵습니다. 압축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쓰질 않으니까 점점 더 어려운 거죠. 사진 공부는 피눈물 나게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사진공부를 시작한 게 작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머니와의 이별, 고향이 사라진다는 것, 내가 어떻게 살아야 자유로운지 그걸 고민하면서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예술가는 고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샌 작업량이 많은 편입니다. 어머니도 떠나고 안 계시고….”
“<어머니의 실크로드> 어머니와의 약속입니다. 원래 살아생전에 어머니께 바치려고 했는데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어서 올 초에 출간됐습니다. 출판사에서도 일 년 넘게 지체됐습니다. 항상 작가는 고독하고 외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배부르면 희한하게 시상이 떠오르지 않더군요.(웃음) 조물주가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딱히 교류하는 데는 없고 이 일만 하고 있습니다. 이 일만으로도 양이 많아 벅찹니다. 주제가 많고, 그 주제별로 끊임없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웃음)”
-아침에는 어디에 가서 사진을 찍으셨나요. 제가 인터뷰를 어중간한 시간에 잡는 바람에 시간이 빡빡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엔 남촌, 도림 쪽으로 다녀왔습니다. 싹 나는 걸 찍고 왔습니다. 싹은 생명입니다. 지금 이때 지나면 다신 못 찍거든요. 날마다 빠르게 바뀌거든요. 오늘 못하면 내일, 아니면 내년에 할 수도 있을 것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내년에는 그 자리에 건물이 설 수도 있고, 나무가 잘려져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사진을 찍으러 나갑니다. 바로 그때 찍어두지 않으면 영영 그 순간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천은 너무 빨리 바뀌어서 그날 찍지 않으면 그 장면을 또 찍을 수 없습니다. 내년에는 또 달라지고, 아예 없어지기도 합니다. 소래지역은 2003년도부터 개발을 시작해서 2004년도에 이미 갈아엎었습니다. 그걸 예측해서 부지런히 사진을 찍으러 다녔습니다. 특히 남동구, 이 곳을 중점적으로 작업했습니다. 다 삶의 근거지거든요. 끊임없이 작업했습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소래포구 쪽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 수인선이 다니던 풍경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달라진 고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눈으로 사라진 것들은 사람들 마음에만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산뒤마을입니다. 사실은 남쪽으로 향해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산뒤가 아니라 산앞입니다.(웃음) 도시에서는 항상 도시 이름을 중앙 쪽을 기준해서 지으니까요. 그쪽에서 볼 때는 산뒤가 되겠죠. 산뒤상회 옆으로 포도밭이 있었는데, 거기는 형님이 하던 곳입니다. 그 뒤에 우리가 옛날에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 뒤가 내 작업실 토담집이었습니다.(웃음) 수인선 타고 시내를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수인선을 타고 장사를 하러 다니셨고, 수인선은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여기뿐 아니라 시흥 쪽에 가서도 장사를 하셨습니다. 그쪽을 다 사진 찍었습니다. 미친놈 아닌 다음에야 누가 사진을 찍으러 다니겠습니까.(웃음)”
“남동구처럼 사진 작업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동춘동 쪽도 찍었습니다. 동춘동, 연수동으로 개발되기 전이었습니다. 소래포구 쪽이 개발되기 전에 대책위원회와 주택공사에 가서 아파트를 짓더라도 민속박물관, 역사박물관, 자료박물관이라도 함께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땅값만 생각했지 그런 데는 관심이 없더군요. 어느 분은 연수동 적십자병원 쪽이 고향인데, 이렇게 고향이 다 없어질 줄 알았더라면 자료라도 모아둘 걸 하면서 후회하는 걸 보았습니다. 우리는 기록문화가 덜 형성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석바위에서 시청 쪽으로 넘어오다 보면 ‘붉은 고개’가 있습니다. 거기 ‘붉은마을’도 찍어놨습니다. 오래됐죠. 관교동, 선학동, 연수동… 남동구를 집중적으로 했고, 점차 넓혀나갔죠. 지금은 다 없어졌잖아요. 남동구는 11개동인데 다 찍어놨어요. 지금 생각하면 기록을 잘한 일이지만, 삼십년 전에 여기서 사진 찍는다고 하면 다 미친놈 취급했죠.(웃음)”
-사진을 찍는 일부터, 정리하는 일까지 일이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힘들진 않으시나요.
“나는 나이 물어보는 걸 싫어합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감동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유럽 쪽 사람인 것 같은데 97살 된 분이었습니다.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배우셨고 그림이 꽤 좋았습니다. 그 분은 나이가 많은데 하실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나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숙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술은 나이를 먹을수록 원숙해진다고 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들 수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모든 걸 이긴다고 봅니다. 나는 사진 작업을 하면서 죽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UN에서 초청 받아서 전시회를 할 수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비무장지대 평화와 생명을 찾아서>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249㎞를 다니셨고, 10만여장을 찍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민간인 최초로 휴전선 155마일 서쪽 말도부터 동쪽 끝 해금강까지 3회 왕복이, 말로만 들어도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DMZ 작가로 선정돼 155마일을 왕복 세 번씩 하면서 찍었습니다. 내가 강연할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뜻이 옳으면 하늘도 감동한다.’ 그걸 체험했습니다. 그전부터 아, 이 나라가 한국전쟁으로 풍전등화일 때 멀리 있는 나라들이 많은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해줬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도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이 다음에 그 나라 사람들을 잊으면 안 된다.” 학교도 못 다니셨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무장지대는 전쟁이 남긴, 역사가 남긴 아픈 땅이잖아요. 그래서 이걸 유엔에서 전시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이 그만큼 발전된 나라고, 비무장지대가 평화의 땅 생명의 땅이구나 하는 걸 알리고 싶었죠. 지금 반기문 유엔 총장 전에 한 번 퇴짜를 맞고, 반기문 총장이 되고 두 번째 신청하고 초청 받았습니다. 모든 서류를 영문으로 해야 하고, 돈도 많이 듭니다. 접수할 때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죠. 방해하는 데도 있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어쨌든 제가 통과됐어요. 예술성, 작품성, 주제로 봤을 때 제가 됐습니다. 저는 평화, 생명을 주제로 했습니다. 유엔에서 전시회를 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를 일컬어 ‘비무장지대 사진작가’라고 합니다.”
“나는 외적으로 활동을 그리 많이 하지 않습니다. 할 수도 없구요. 하지만 겹치지만 않는다면 마다하지는 않습니다.(웃음) 올해 설에 <어머니의 실크로드>가 연합뉴스에 이십분가량 나갔습니다. 남동문화예술회관 관장님이 제 책을 보고 전시하자고 연락하셨습니다. 저는 항상 준비가 돼있기 때문에 내일 당장 뭘 하더라도 전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달 남겨놓고 전시를 할 수는 없거든요.”
“인천은 ‘2015 책의 수도’라고 하는데 좀 걱정이 됩니다. 말이 책의 도시다, 문화도시다 하는데 시민으로서 별로 와닿지 않더군요. 군포시에서는 내 책이 나오자마자 열권을 샀다고 하더군요. 군포시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 잘 봤다고 하더군요. 군포시청 청사에 들어가면 로비에 도서관이 있고, 모든 직원이 책을 보게 돼있고 합니다.”
“내가 작업한 사진을 책으로 몇 권 묶었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염전만 20년을 찍었습니다. 아직 전시를 하지 못했구요. 한 가지 주제를 정해놓고 집중적으로 찍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책은 다 자비를 들여서 했습니다. 여기, 이 책은 소래포구를 찍은 건데 20년 걸렸습니다. <인천, 갯벌은 아름답다> 등 인천에 관련한 책을 여섯 권 출간했는데 아무도 관심 없습니다. 물론 기대는 안 하지만….(웃음)”
“살아온 인천, 염전 포구 등 가치를 모르면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DMZ 작업할 때는 아이엠에프가 터져서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 내 몫으로 있는 땅을 팔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금 그 땅을 갖고 있었다면 물질적으로 무척 풍요로웠을 겁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돈이 아무리 많은 사람도 부럽지 않습니다. 세상을 남 보기에 좋으라고 사는 것도 아니니까요. 보림에서 <울지 마, 꽃들아>라는 아이들 책을 냈는데 잘 나갔습니다. 개인이 자료를 갖고 있다 죽으면 소실되고 없어지지만, 책으로 만들면 역사적 자료가 됩니다. 이번에 영국 도서전에 내 작품이 열 점이 나갔는데 인천시에서도 갔다고 하더군요.”
-선생님께서는 작업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지키신다고 들었습니다. 후드(hood), 컬러 필터(color filter)를 사용하지 않으며, 트리밍(trimming)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사진영상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세 가지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다. 보여줄게요. 자, 여기 내 카메라에는 후드가 없어요. 가방도 이렇게 작아요. 저는 후드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건 직접 공부하면서 혼자 터득한 겁니다. 어디에도 안 나와요. 사진하는 분들은 후드 안 쓰는 사람이 1%도 안 돼요. 그 사람들은 몰라서 못 쓰는 분들이 많구요. 사람들이 후드를 쓰는 이유는 잡빛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서 그렇고, 또 렌즈를 보호하기 위해 후드를 씁니다. 왜 모두 후드를 끼고 할까 생각해봤죠. 남이 버리는 빛, 그 빛 속에는 더 신비스러운 사진을 만들 수 있더군요. 저는 정반대로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원하는 색을 만들기 위해 필터를 끼웁니다. 저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연의 색만 못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필터를 끼워서 색을 만드는 건, 말 그대로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안 씁니다. 필터를 끼우지 않아도 원하는 색깔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이야 좀 걸립니다.”
“또 노트리밍, 트리밍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놓고 막 잘라내거든요. 저는 처음 찍을 때 생각을 하고 찍습니다. 찰칵, 하는 순간이 끝입니다. 포토샵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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