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시킴을 떠나 네팔 카트만두로 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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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시킴을 떠나 네팔 카트만두로 가는 여정
  • 김유철 여행가
  • 승인 2014.05.09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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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무작정 배낭여행] (8) 시킴-깽톡-펠링-다즐링-네팔

시킴 


다음날 우리는 시킴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떠나기 전에 시킴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았고 기차표 예약 사무소도 없었기 때문에 형은 미리 다른 곳으로 갈 표를 예약하기 위해 먼저 역을 들렀다. 떄마침 우연히 메이도 다음날 표를 끊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표를 예매한 후, 다시 작별을 했다. 메이는 그때까지도 시킴에 가는 우리를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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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우리는 시킴주의 주도인 ‘갱톡’으로 가기로 했다. 다즐링 근교와 시킴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프를 타야만 했고 때문에 어딜 가나 합승지프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즐링에서 갱톡으로 가는 사람은 상당히 많아서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아도 항시 출발하는 지프가 있었고 사람들이 모이면 출발하는 형식이었다. 우리는 지프 스탠드로 가서 갱톡행 지프를 잡아탔다.

몇시간을 달렸을까? 시킴주에 다다르자 운전기사는 우리를 내려주더니 한 사무실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곳에 들어가니 우리의 여권은 물론이고 퍼밋을 제시해야 했다. 퍼밋을 제시하고 여권에 있는 우리의 인적사항을 모두 적더니 마지막에는 여권에 도장까지 찍어줬다. 흡사 국경을 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도긴 하지만 인도가 아닌 곳으로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경을 넘은것 같은 기분을 안고 시킴에 들어가서 계속 지프를 타고 달렸다. 아직까지는 인도의 산간지방과 별 다를것은 없어 보였다. 계속 달리면서 보니 인도와는 달리 주변에 술 가게가 많았다. 알고 보니 시킴이 인도에 편입되면서 면세 구역이 되어 술 파는 곳도 많고 값도 상당히 저렴하다고 했다.
 
갱톡
 
한참을 더 달려 우리는 갱톡에 도착했다. 이곳은 필자가 가지고 있는 가이브 북에 나오지도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형이 가지고 있는 론니플래닛에 의존해서 숙소를 찾았다. 평면으로 나오는 책의 지도와는 달리 동네는 산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결국 우리는 택시를 잡아 타고 숙소로 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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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톡은 생각했던 시킴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상당히 현대적이었고 조금만 걸어나오면 만나는 번화가는 상상 이상으로 화려했다. 생각해보면 이곳은 주의 주도이고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인데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나 싶다. 그래도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화려함은 없어지고 숨겨진 자그마한 동네들도 나왔고 꽤나 큰 재래시장도 있어 흡사 한국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갱톡에서 가장 가볼만 하다는 짱구(쏭고)호수에 가보기로 했다. 그곳 역시 지프를 대절해서 가야 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값이 저렴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을 모아야 했다. 그러나 시킴에 외국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 숙소에서 외국인 한명을 만났는데 그는 다음날 펠링이라는 곳으로 향한다며 같이 갈 수 없다고 했다. 우리도 2일 정도 후에 펠링에 갈 것이라고 했더니 그럼 그곳에서 또 만나자고 했다. 결국 우리는 번화가에 있는 여행사를 돌며 호수에 갈 만한 사람들이 있나 물어보았다. 결국 한 곳에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지프를 기다리기 위해 숙소 아래 레스토랑에 있었다. 어제 숙소에서 만난 외국인은 펠링으로 향하는 아침 지프가 꽉 차는 바람에 점심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우리에게 카드마술을 보여주기도 하고 펠링에서 만나자며 페이스북 아이디를 물어보기로 했다.

그와 함께 놀다가 지프가 와서 우리는 호수로 향했다. 모인 사람들은 다양한 국적이었는데, 한 사람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이었다. 그 사람 또한 사람을 구하려다 못 구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가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 급하게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벨라루스 국적의 커플이었다. 그들과 통성명을 하다가 필자가 벨라루스라는 나라를 안다고 하자 어떻게 아냐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너희 나라 수도가 ‘민스크’이고 체조종목에서 유명한 나라가 아니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냐며 또 놀라워 했다.

호수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사실 그리 멀지는 않은 듯 했지만 계속 구불구불 산길을 도는 데다가 도로 포장도 잘 되어 있지 않아 차가 빠르게 가지 못했다. 가는 길은 점점 오르막이더니 나중에는 눈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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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도착해서도 주변은 온통 눈이었고  그때문에 호수가 한층 더 멋있어 보였다. 역시 이곳도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고 눈이 녹아 물이 된 길도 많아서 한쪽에서는 장화를 대여해주고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야크를 타고 호수를 둘러보라며 야크를 끄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는 걸어서 호수 주변을 돌아봤는데 중간중간 눈이 녹은 곳이 많아서 계속 물이 튀었고 중간중간 야크똥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눈이 녹은 이유는 야크가 그 자리에 오줌을 싸서였다. 장화를 빌릴껄 하고 한참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호수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중간의 호수를 두고 병풍처럼 눈산이 둘러쌓여 있었는데 정말 웅장하기도 했고 아름답기도 했다. 하지만 눈을 거의 처음 보는듯한 인도인 관광객들은 신이 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을 던지기도 했고 길은 야크와 사람들이 뒤엉켜 상당히 복잡했다. 결국 필자는 더 위쪽으로 올라가 한산한 곳에 자리잡은 작은 레스토랑에서 인도식 라면과 짜이를 마시며 호수를 구경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호수는 또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었다.

GANGTOK TUNGBA.JPG    

 이곳 갱톡에서 필자는 드디어 뚱바 집을 찾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뚱바집을 찾아 본 결과, 시내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허름한 뚱바를 파는 곳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찾아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곳도 제각각인데다가 그나마도 찾아간 곳은 뚱바를 팔지 않는다고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간신히 뚱바를 파는 곳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드디어 뚱바를 마시게 되었다.

뚱바는 네팔 전통 술인데 한국으로 치자면 ‘막걸리’나 ‘정종’ 정도 될 거 같다. 뚱바를 시키면 큰 대나무 통에 발효된 곡물이 담겨 나오는데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면 된다. 뜨거운 물을 넣은 후, 잠시 기다렸다가 빨대로 빨아서 먹는데, 다 먹은 후에는 다시 뜨거운 물을 넣어서 마시면 된다. 맛은 달짝지근하면서 곡물의 맛도 조금 나는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맛있고 좋았다.
 
펠링
 
갱톡에서 며칠을 보내고 있던 우리는 이제 서쪽에 있는 펠링으로 향하기로 했다. 칸첸중가 또한 시킴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서쪽에서 더 잘 보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좀 더 다른 환경의 시킴을 보고 싶기도 했다.

같은 숙소에 있던 그 외국인의 경우를 보고 우리는 먼저 예약을 하려고 전날 지프스탠드로 갔지만 아침 시간의 지프는 이미 꽉차 있었다. 때문에 우리 또한 점심시간의 지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프를 이용해 펠링까지 가는 길 또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지도상으로는 넉넉 잡아 서너시간이면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운전기사에게 우리가 가려는 숙소의 이름을 말해주자 펠링에 진입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숙소 앞에 내려주었다. 역시 산간지형의 펠링은 지역에 따라 upper pelling, middli pelling, low pelling 등으로 나뉘었고 우리가 가려는 곳은 그중 upper pelling에 위치하고 있었다. 숙소는 보기와는 다르게 저렴한 편에 속했다. 아직 시즌이 아니라서 그런지 방도 많이 비어 있었고 때문에 방 값도 생각보다 저렴한 것 같았다.

숙소 레스토랑은 산골짜기의 산장 느낌이 났는데 정말 안락하고 좋았다. 내부는 나무로 되어 있어 삐걱거렸는데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또 옆에는 벽난로가 있어서 밤에는 벽난로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또 음식도 싼값에 맛도 괜찮았기 때문에 다즐링에서처럼 레스토랑에 앉아서 죽치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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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링에서는 또한 개별적으로 움직이기는 제한이 많이 따랐기 때문에 1일 투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보려고 했는데 운 좋게도 같은 숙소에 있던 사람들 또한 1일 투어를 하고 싶어해서 손쉽게 사람들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번 사람들은 우리 둘을 포함해서 태국인 노부부 두분과 또 다른 외국인 둘까지 총 일곱이었다.

투어는 거의 펠링 주변의 곰파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곰파들은 다른 곳의 곰파와 마찬가지도 별 다를 것은 딱히 없었다. 그러나 필자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육솜’이라는 도시에 갔다 오는 것이었다. 도시랄 것도 없이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래도 시킴 왕국이 생길 때 제일 처음 수도였다고 해서 나름 유적지 같은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가보니 그냥 산골 마을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작고 한가해서 놀랐다 . 그리고 육솜에는 칸첸중가 트레킹의 출발, 도착지점이라서 몇몇 사람들이 트레킹을 끝내고 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투어에서 하루종일 곰파만 대여섯 개 보니 나중에는 더 이상 곰파를 봐도 그게 그거 같았고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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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링에 있으면서 칸첸중가는 질리도록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자주 봤다. 아직 대개 구름이 많이 끼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구름이 잠시 걷힐 때면 칸첸중가가 보였다. 그리 멀리 보이지도 않았다. 그 광경을 보며 역시 펠링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갱톡의 숙소에서 만났던 그 외국인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필자의 페이스북 아이디를 가져가더니 펠링에서 연락이 왔다. 그의 숙소는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어지간히 심심했었던지 우리쪽으로 와서 식사도 같이 하고 같이 카드게임을 하고 놀았다. 처음에 그는 ‘육솜’에 갈 예정이라고 했었는데, 우리가 육솜에 갔다온 이야기를 해주니 육솜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육솜에 대해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었던 듯 했다.  

필자와 형, 그리고 누나는 다 각기 펠링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우선 필자는 다시 다즐링으로 돌아가 2일 정도 쉬다가 네팔로 들어가고자 했고, 형은 바로 뉴 잘패구리에서 불교성지인 비하르 지방의 보드가야로 간다고 했다. 그리고 누나는 시킴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 미국인과 어쩌다가 연락이 되서 그곳으로 간다고 했다. 그리고 육솜으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꾼 외국인 친구 또한 필자와 같이 다즐링으로 다시 내려갔다가 네팔로 같이 가기로 했다.  

그 외국인 친구의 이름은 Nans였고 프랑스인이었다. 영어 발음상으로는 ‘난스’라고 발음하는데 프랑스식으로는 ‘넌스’와 ‘논스’의 중간단계 즈음 되는 것 같았다. 그냥 이곳에서는Nans라고 써야겠다.

처음 볼때 당연히 20대 중후반으로 봤는데 알고보니 이 친구 나이가 19살이었다. 한국 나이로는 20, 21세 정도 되는 나이었다. 19살이라길래 상당히 어리고 얘 같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필자도 첫 인도여행을 할 때, 만 19살이었다. 새삼 얼마나 사람들이 필자를 어리게 봤을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고 또 외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독일로 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온 것이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4개월 동안 계속해서 일만 하고 지금 1년 일정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하는데, 때문에 예산이 상당히 빠듯하다고 했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숙식을 제공받는 식의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며 버티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Nans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외에도 영어까지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같이 다니다 느낀 점이지만 원래 머리가 조금 좋은 것 같기도 하다.

  TOWER VIEW.JPG  
 
우리 셋과 Nans는 각각 다즐링, 뉴 잘패구리 그리고 시킴의 남부로 이동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우선 다 같이 ‘조레탕’이라는 곳으로 간 후 갈아타야 했다. ‘조레탕’이라는 곳이 시킴 내부는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 왔다갔다 할 경우에도 교통의 요충지인 듯 했다.

우리는 운 좋게도 시간을 잘 맞춰 지프 대신에 값 싼 버스를 타고 조레탕으로 가게 되었다. 조레탕에 도착해서 형은 그대로 버스에 남았고 나머지는 내렸다. 그리고 조레탕에서 또한 누나와 작별을 하고 필자와 Nans는 다시 다즐링으로 향했다.
 
다즐링2
 
다시 찾은 다즐링은 불과 1주일만에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1주일 전만 해도 상당히 춥고 구름이 많았는데 다시 돌아온 다즐링은 보다 좀 더 따뜻했고 햇살도 더 강했다. 우리는 필자가 예전에 머물던 게스트하우스로 다시 갔다. 사실 다즐링을 떠나올 때 그 숙소의 직원들과 친해져 페이스북 아이디를 공유했고 지속적으로 안부를 묻곤 했었다. 그러다가 다시 다즐링으로 갈 무렵 직원 중 한명인 ‘타망’에게 다시 다즐링으로 가겠으니 방을 하나 비워달라고 했다.

다즐링에 도착해서 다시 숙소를 찾으니 다들 다시 반겨주었다. 필자가 다시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또 다른 직원들은 분명 떠났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자 상당히 놀란 분위기였다.

딱히 다즐링에서 할게 있어서 온 것이 아닌 우리는 다즐링에서 편하게 쉬기로 했다. 하루는 필자가 Nans를 데리고 농구를 하기 위해 학교를 다시 찾았다. 그들 또한 필자가 1주일만에 다시 나타나가 순간 놀라면서도 상당히 반가워 했고 우리는 또 다시 농구를 즐겼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곧 이들의 명절이라(티베트 명절인지 네팔 명절인지는 모르겠다.) 다들 집에 돌아가거나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서 많은 학생들과 농구를 즐기지는 못했다. 그 대신 다즐링에서 네팔로 떠나기 위해 지프스탠드로 가는데 가는 도중 길거리에서 같이 농구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제대로 작별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또 밤마다, 항상 그래왔듯이 숙소 레스토랑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Nans가 사교성이 좋아서 항상 필자가 방에서 씻고 오면 새로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필자도 거기에 껴서 같이 놀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태리 남자 한 명과 이스라엘인 4명 그리고 Nans와 필자가 친해졌다. 이태리 남자는 시킴까지는 아니지만 더 북쪽으로 가고 싶어했고 이스라엘 친구들은 시킴에 갈 예정이라서 더욱 우리와 친해졌다. 또한, 각 나라의 음식 이야기를 하고 어느 나라의 영어 억양이 맘에 들고 어느 나라의 영어 억양이 바보 같은지 떠들며 한참을 웃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녀 모두 군대에 가기 때문에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네팔
 
2일간 다즐링에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네팔로 향하기로 했다. 네팔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실리구리’라는 곳으로 간 뒤,(뉴 잘패구리 또한 실리구리에 속해 있다) 그곳에서 네팔 국경인 ‘카카르비타’로 넘어가야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가야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어나서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벌써 옆방의 프랑스인 2명은 네팔로 떠난다며 먼저 떠났다.

Nans도 프랑스인이었지만 프랑스인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혼자 다니는 유럽 사람들 중에는 Nans처럼 자국 사람들과 같이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듯 싶다. 필자에게 다즐링에서 방을 줬던 스페인 친구도 스페인 사람들이랑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본인의 영어 능력을 더 키우고 싶어서였단다. 심지어 스페인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도 본인이 스페인 사람인 것을 숨기고 영어로 대화를 했다.

Nans가 프랑스인과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프랑스인들은 항상 모여서 쓸데없는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시시덕 거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프랑스인 무리들과 만날 때마다 필자도 그러한 것을 느끼기는 했다. 항상 프랑스인들끼리 모여 불어로 자기들끼리만 놀거나 하는 모습이 많았다. 또 한가지 이유는 어딜 가나 프랑스인이 너무 많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현재 인도, 네팔에는 중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이 가장 많은 듯 하다. 한국은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가는 기간이라 거의 없고 일본인들 또한 4월부터 학교에 가기 때문에 많이 빠진 상태이다. 중국인들의 시즌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동양인 중에 가장 많이 띄는 사람들은 중국인이다. 그리고 서양인중에는 단연 프랑스인들인데 Nans 말로는 그들은 딱히 시즌이 없이 전세계 어딜가나 너무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실리구리로 가는 지프를 타기 위해 지프스탠드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지프는 많았기에 손쉽게 잡아 탈 수 있었지만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바로 지프 한 대가 떠나서 우리 지프가 다 찰 때까지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지프는 달리고 달려 실리구리에 도착했고, 우리는 내렸다. 원래 다른 여행객들은 실리구리에서 카카르비타까지도 지프를 타고 가지만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가난한 여행자였으므로 로컬 버스를 잡아 타고 가기로 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버스 타는 곳으로 가서 기다리니 곧 이어 버스가 왔다. 하지만 버스는 정말 꽉 차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우리는 짐을 버스 지붕 위로 싣고 어떻게든 껴서 안으로 들어갔다. 다즐링이 아무리 따뜻해졌다고 해도 아직은 좀 쌀쌀해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실리구리는 산간이 아니라 조금 더웠다. 그런데다가 만원버스에 껴서 가는 바람에 덥다 못해 거의 찜통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내리지 않고 계속해서 타기만 했고 점점 설 자리조차 없어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현지 여자애 하나가 멀미를 하는지 창문에 대고 구역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정말 혼란 그 자체였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1시간이나 달려 다행히 국경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너무 힘이 빠진 우리는 그곳 주변의 좌판에서 모모를 먹으며 잠시 쉬었다. 그리고 국경까지는 다시 사이클 릭샤를 타야 했는데 모모집 가족들이 적정한 릭샤 가격을 알려주며 릭샤꾼과 싸워줘서 우리는 싼 값에 국경까지 갈 수 있었다.

국경에 도착하니 인도인 경찰들이 그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거의 여자경찰이었고 또 대부분이 아시안계였다. 그들이 우리의 여권을 검사하고 이것저것 기록하는 동안에도 경찰들은 필자에게 한국의 유명한 가수나 드라마, 영화를 말하며 정말 재미있게 봤다면서 한국에서 혹시 그 배우들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새삼스럽게 한류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검사가 끝나고 카카르비타 다리를 건넜다. 다리 건너기 전은 인도 땅이고 다리를 건너면 네팔 땅이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리고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일본인 2명도 있었는데 어떻게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는데 먼저 왔는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국경을 넘을 때 계속해서 사진을 찍고 서로 찍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필자와 Nans는 상당히 많이 웃었다. 그 이유는 그 전날 인도 영화를 같이 봤는데 그 영화에서 일본인들의 이미지는 다 같이 몰려 다니며 계속 사진을 찍고 다니는 모습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다리를 건넌 후, 우리는 네팔 국경 사무소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네팔 입국 신청을 하고 비자를 받으려고 하는데 그들이 우리의 여권을 보더니 우리가 인도에서 나온 도장이 없다고 했다. 그 도장이 없으면 네팔에 입국을 시켜 줄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인도 국경에서 경찰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작성하는 것으로 끝난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인도 측으로 넘어가야 했다.

카카르비타에서 카트만두까지 가는 버스의 막차는 오후 5시라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 우리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네팔은 인도보다 15분이 빨랐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시간이 아닌 45분이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다시 뛰쳐나가 사이클릭샤를 잡아타고 다시 인도측으로 향했다. 가면서 우리는 네팔과 인도의 국경수비대에게 도장을 안 찍었다고 찍고만 오겠다고 하니 붙잡지 않았다.

다행히 인도측에 도착해 도장을 받으려 사무소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출국 신청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우리는 서둘러 작성을 하고 여권과 함께 그들에게 건네줬다. 그랬더니 그들의 컴퓨터가 잘못 되었는지 또 한참을 이것저것 만지다가 드디어 되었는지 컴퓨터에 우리의 정보를 입력했는데 이번에는 그들의 일 처리 속도가 문제였다. 우리가 급한 것은 보이지도 않는지 그들은 느릿느릿 자신들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재촉을 해도 대답은 기다려라 였다.

간신히 도장을 받은 후, 다시 네팔측으로 넘어가기 위해 릭샤를 잡으려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릭샤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 탔던 릭샤꾼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갔는데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일부러인지 몰라도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다시 그 긴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짐이 적었던 Nans는 빨랐지만 필자는 느렸다. 그러던 와중에 옆에 지나가던 자전거 하나가 있었다. 필자가 사정해서 자전저 뒷자리에 태워달라고 하자 그는 흔쾌히 태워주었다. 네팔 국경에 거의 동시에 도착을 했는데 그 모습을 본 Nans는 필자 보고 자전거를 얻어 타고 왔다며 야비하다고 놀려댔다.

우리는 다시 네팔측 사무소로 들어가서 다시 신청서를 작성하고 비자를 신청했다. 그들 또한 일처리가 느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네팔측에서 비자를 받은 시간은 5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필자가 먼저 여권과 비자를 받고 버스스탠드로 뛰어가 버스를 알아보니 다행히도 5시 15분에 출발한다고 했다. 그래서 버스표를 끊고 뒤따라온 Nans와 함께 같이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 또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버스라 그런지 이용하는 외국인도 하나 없었고 모두 현지인이었다. 의자는 비좁았으며 특히 필자의 의자는 고장까지 나 있었다. 결국 잠을 자는둥 마는둥 하고 밤새 버스는 달렸는데 버스는 중간중간에 알수 없는 이유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정차를 하곤 했다.

다음날 아침, 길거리 휴게소 같은 곳에 버스가 멈춰 우리는 아침을 먹기로 했다. 네팔의 화폐는 인도의 그것과 조금 달라서 사 먹을 때마다 인도에 비해서 비싼지 싼지 비교해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길거리에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값도 오히려 인도보다 비싼 것 같았다. 들은 정보로는 네팔이 조금 더 싸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결국 우리는 거의 사 먹지도 못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원래 카트만두까지 버스로 12시간이면 되는 거리였는데 결과적으로 16시간이 걸렸다. 새벽에 몇번 길게 정차를 하더니 결국 늦게 도착했나 싶었다.
 
카트만두
 
카트만두에 들어서니 우선 엄청난 모래 바람과 매연이 들어왔다.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외곽이라고 하지만 한 나라의 수도 주변 도로가 포장조차 되어 있지 않은 사실에 경악했다. 심지어 버스에서 내리니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여행자거리인 ‘타멜’까지 가려면 그곳에서 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결국 우리는 비를 피하며 길거리 맛없는 튀김을 먹다가 택시를 타고 ‘타멜’로 향했다.
 
타멜에 도착해서도 우리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가려는 저렴한 가격의 도미토리가 있는 숙소는 눈에 잘 띄지 않았고 밖은 아직 비가 오고 있었다. 결국 물어물어 도착을 했지만 도미토리는 꽉 찼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또 다른 도미토리가 있다는 곳으로 갔는데 그 숙소는 없어졌는지 중국인 전용처럼 보이는 숙소가 들어서 있었고 도미토리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 주변의 싸고 괜찮다는 곳을 찾았으나 또 꽉차서 다음날 오라고 했다.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곳을 찾았지만 그곳은 책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값이 상당히 비쌌다. 딱 봐도 조금 비쌀 것처럼 보이기는 했었다.

그 숙소에서는 그래도 우리를 불쌍하게 봐 주었는지 상당히 방값을 많이 깎아 주었다. 처음에는 하룻밤에 15달러는 불렀다. 인도를 여행 다니며 달러로 받는 곳은 한번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좀 당황했었다. 그러다가 결국 많이 깎아서 900네팔루피에 머물 수가 있었다. 2명이서 900이었기 때문에 필자를 450만 내면 됬었고 450네팔루피는 인도루피로 300루피(약 5000원)가 안 되는 돈이었으므로 우리의 예산에서 결코 싸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 묵기로 했다.
 
이렇듯 네팔의 첫 인상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타멜 거리를 돌아다녀 보니 여행자거리답게 이것저것 상당히 신기하고 흥미를 끌 만한 것들이 많았다. 기념품을 비롯하여 산악용품 등이 주를 이뤘다. 아무래도 네팔에 오는 사람들은 산악 트래킹을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는 트레킹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사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문의를 해 보았다. 처음에 필자는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준비하고 있었고 Nans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면 카트만두를 기점으로 삼아야 했고 안나푸르나를 가려면 포카라를 기점으로 삼아야 했다.

그곳에 가서 물어보니 생각보다 에베레스트 트레킹은 더 비쌌다. 입산 허가증을 받는데도 에베레스트가 1.5배 가량 비쌌고 에베레스트에 가려면 카트만두에서 헬기를 띄우거나 버스를 타고 18시간을 가야한다고 했는데 사람을 최대한으로 모아서 헬기를 띄워도 개인당 편도 500달러에 버스는 3000루피라고 했다.

현재 필자는 거의 안나푸르나로 갈 확률이 높아지고 있고 옆에서 Nans도 계속해서 같이 안나푸르나로 가자고 필자를 설득하고 있다.

THE WAY  TO LAKE.JPG    





트레킹에 대한 정보를 얻고 우리는 각자 필요한 돈을 뽑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인도 델리의 빠하르간즈보다 더 큰 규모인 것 같았다. 그리고 심심치 않게 한국어 간판이 보였고 한국 식당과 한국인 전문의 여행사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역시나 중국인과 프랑스인이 많았다. 숙소나 아니면 길거리에 지나가다가 프랑스인들이 보이면 어딜 가나 프랑스인밖에 없다고 Nans를 놀려댔다. 본인도 프랑스인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웃어 넘겼다.
 
또 우리는 이곳에서 값도 상당히 저렴하고 맛있는 로컬식당을 발견했다. 로컬식당이긴 해도 한국인들에게는 꽤나 알려져 있는지 그곳에서 교민들도 한번 만났고 한국인 여행자들도 조금이나마 보기는 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갱톡에서 먹었던 것보다 더 크고 맛있는 뚱바를 발견했다. 그로 인해 Nans는 값이 싸고 맛있는 티벳음식을 먹기 위해, 필자를 싸고 양도 많은 뚱바를 먹기 위해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그곳에 방문해서 끼니를 해결한다.
 
현재 우리의 여정은 미정이다. 언제 포카라로 넘어갈지도 모르겠고 포카라에서 같이 트레킹을 할 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Nans는 안나푸르나를 크게 한바퀴 도는 라운딩 트레킹을 생각하는 듯 한데 필자의 네팔 비자로 라운딩 트레킹을 돌기에는 빠듯해서 필자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에 갔다오는 트레킹을 가야 할 것 같다.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쓰는 말이지만 앞으로의 2주도 어떻게 될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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