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음악으로 듣는 세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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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음악으로 듣는 세상 1
  • 배영수
  • 승인 2014.05.23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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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음악 이야기 1-인천 언더그라운드 록음악의 태동
  
어쩌다 보니 [인천in]에 주기적으로 음악에 대한 글을 연재하게 됐다. 사실 현재 인천의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 지역 뮤지션 혹은 과거의 이야기가 전부인 상황이므로, 인천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지는 않을 생각이다. 계절 그리고 사건사고, 이슈에 따라 때로는 시사적으로, 혹은 낭만적으로 음악 이야기를 풀어놓을 계획이다. 지역 뮤지션들과의 인터뷰나 대한민국 예술문화 전반에 심층적 분석 역시 종종 늘어놓을 생각도 하고 있다. 그래도 첫 단추 정도는 인천의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게 바람직할 것 같다.
 
삼치거리.JPG
타지 사람들에게 흔히 ‘삼치거리’로 불리는 동인천역 앞 이곳과 대한서림 즈음서부터
신포동까지의 구역은 인천 록 밴드들의 중요한 언더그라운드였다.
 
소녀시대의 효연을 비롯해 씨스타의 효린, 걸스데이의 민아 등 요즘 가요계를 뒤흔들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인천 출신 멤버들은 여타 도시에 비해 결코 비중이 적지 않다. 그래도 인천 하면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하드 록과 헤비메탈을 기억할 것이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인천 출신 혹은 인천에서 터를 잡고 활동했던 헤비메탈 밴드들은 그 당시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중요한 핵심이었기 때문. 그 시절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글쓴이 역시 그러했다.
 
글쓴이가 알기로 인천에서 처음 열린 록 콘서트는 1985년, 지금은 철거되고 야외쉼터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는 남구 인천시민회관에서 ‘아웃사이더스’라는 팀과 ‘제3세대의 꿈’이라는 밴드의 공연이었다. 사실 당시 현장에 있기엔 글쓴이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고, 고등학생이 되어 당시 인천에서 밴드 음악을 하던 한 선배에게 들은 것이었다. 현재 ‘인천 록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록 밴드 사하라 역시 최초의 이 콘서트 이후에 공연을 가졌다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두 밴드 중에서도 인천 출신의 멤버들이 있었으니 나름 인천 사람들의 손에 의해 공연이 열렸다 해도 틀린 얘긴 아닐 것 같다.
 
이후 인하공업전문대학의 스쿨밴드인 티삼스가 ‘매일매일 기다려’로 MBC 강변가요제 동상을 차지하고 그에 힘입어 데뷔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인천의 록 신은 점차 가시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사하라와 다운타운, 블랙 신드롬이 인천을 기반으로 공연을 하고 나름의 팬 클럽을 형성하는 등 지역적으로 자체적인 신을 만들어 갔다. ‘수도’라는 덕에 일찍부터 부활, 백두산, 블랙 홀 등이 활약했던 서울과, 비슷한 시기 디오니서스를 비롯해 프라즈마와 스트레인저 등의 실력파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던 부산과 함께, 인천은 한국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록 음악의 역사를 논할 때 중요한 도시로 급부상했다.
 
1-티삼스.jpg
티삼스의 데뷔 앨범 LP. 1988년 11월 아세아레코드 발매
 
사실 인천의 하드 록과 헤비메탈 신은 역사적으로 복기해 보면 다소 뜬금없는 면이 없지 않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씨가 음악 평론 웹진 [웨이브(Weiv)]에 쓴 한 기고 글에 의하면, 일찍이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인천에서는 키보이스의 김홍탁과 라스트 찬스의 김태화,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이철호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뮤지션들이 배출되는 등 대중음악 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인천의 음악적 트레이드마크인 헤비메탈은 인천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발전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론 공감하고, 부분적으론 갸우뚱하는 점도 있다. 분명히 어떤 요인에 의해 이 지역에 헤비메탈이 강세를 보인 부분이 있을 테지만, 그 영향에 대한 정확한 루트는 차우진씨가 ‘자생적’이라 결론내린 것처럼 정확히 찾아내기가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글쓴이 역시 그 루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짚어줄 수가 없다. 인천 출신으로 그 흥망성쇠를 모두 봐왔음에도, “어떠한 영향에 의해 인천의 헤비메탈 신이 형성되었는가?”를 누군가 물어온다면 딱히 정답을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다.
 
다만, 이런 추측은 가능하다. 8090시절 당시 인천의 나름 중요한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형성지였던 동인천과 신포동을 비롯해 일찍부터 도시가 형성돼 있던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이 크게 갈렸던 인천이 이후 도시개발 등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러한 음악인들이 자연스럽게 정착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일종의 의견 개진 정도는 가능할 거란 얘기다.
 
이는 인천 밴드들 혹은 인천에서 중요하게 활약하는 밴드의 멤버들이 인천의 어느 곳에서 주로 서식했는지를 파악하면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글쓴이가 알기로 머리를 기르고 누가 봐도 로커인 모습의 청년들을 가장 쉽게 볼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관교동과 구월3동 일대였다. 승기사거리(흔히 동양장사거리로 부르는)와 현 인천문화예술회관 사이에 몰려있는 주택가들 그리고 아파트단지가 막 들어선 관교동의 주택가들은 인천지역의 구도심들 중 가장 개발이 늦게 진행된 탓에 월세가 그리 비싸지 않았기에, 그 ‘저렴한 방값’의 이유 하나만으로 가난뱅이 예술가들에게 인천이란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던 셈이다. (2부에서 계속)
 
관교동.jpg
현재의 관교동 일대. 과거엔 저렴한 방값으로 인해 로커들의 주 서식지 중 하나였다.
 
 
 
배영수 사진.jpg
대중음악 전문지 [52street] 기자
인천시청 인터넷방송국 기자
도시개발신문 기자
한국대중음악 100대명반 선정위원 등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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