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신포동 칼국수 골목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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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신포동 칼국수 골목이 있어요?"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4.05.23 20: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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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90년대 홍콩영화 틀어주던 골목 맷돌칼국수집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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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동 칼국수 골목을 아시나요? 이 질문에 ‘물론’이라고 답하는 사람은 인천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30대 후반부터 오십대 초반까지. 이들은 신포동 일대를 자주 다녔거나, 그쪽에 일터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되묻는다. “그 칼국수 집이 아직도 있어?”
 
있다. 딱 두 군데 남아 있다. 칼국수 집에 다다르는 골목길도 건재하다(?).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도시에서, 아직도 그 골목이 남아 있고, 그 길모퉁이에 칼국수집이 남아 있다. 칼국수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세 군데가 있다. ▲신포시장에 있는 공갈빵 가게 근처에 있는 신포만두 옆 골목길 ▲세계맥주, 배꼽시계를 지나 들어가는 골목길 ▲파스쿠찌 옆 푸마 맞은편에 있는 용성인쇄사라고 쓰여진 간판 아래 골목길. 골목 세 군데가 다 재미있지만, 특히 용성인쇄사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은 골목길이 하도 좁아 어른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다.
 
골목길을 따라 가다보면, 문 닫은 가게와 낡은 문들이 나온다. 돼지네 칼국수집은 메뉴가 적힌 문짝 앞에 화분이 서너 개 놓여 있다. 오래된 난로와 연탄재, 가스통, 창이 깨진 문짝이 길에 나와 있다. 2,30년 전만 해도 골목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골목길에는 아직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배어 있다. 머뭇거리거나 서성대던 발자국소리가 골목마다 녹아들어 뭇사람들을 반긴다.
 
 
한때 칼국수 골목은 사람들로 북적북적
좁은 골목길은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차
 
신포동 칼국수 골목은, 1970~90년대 사람들로 한창 붐볐다. 칼국수집도 아홉 개나 있었다. 지금은 맷돌칼국수와 골목칼국수 두 집뿐이다. IMF(국제금융위기)를 지나면서, 신포동을 중심으로 한 상권이 주안이나 구월동 등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 곳 상권도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3년 전부터는 젊은이들이 신포동을 찾고 있고, 덕분에 이 골목도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골목이 살아나면, 골목에 사는 사람은 물론 골목길을 다니는 사람들은 힘을 얻는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이 고스란히 가감없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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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으로나 값으로나 나무랄 데 없는 칼국수.
 
칼국수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국물을 내는 재료도 다양해 좋아하는 육수도 제각각이다. 멸치칼국수, 사골국수, 바지락칼국수…. 지역마다, 입맛따라 제각각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밀가루가 귀해 칼국수도 귀했으나, 지금은 어디서나 먹을 수 있어 서민 음식이다.
 
오후 3시 30분께, 맷돌칼국수집은 한가로웠다. 손님은 두 테이블에서 칼국수를 먹고 있었고, 주인 부부는 골목길 마루에 걸터앉아 옆집 골목칼국수집 할머니와 함께 열무를 다듬고 있었다. 인상이 서글서글 편안한 맷돌집 안주인 안순복씨는 올해로 27년째 칼국수를 만들어 팔고 있다.
 
기자는 도착하자마자 허기를 속일 요량으로 칼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그릇 한가득 나온 뜨거운 칼국수 국물부터 쭉 들이켰다. 어라, 무슨 맛이지? 멸치도 아니고 사골도 아니고. 맛깔난 김치를 찬 삼아 후딱 그릇을 비웠다.
 
국물이 맛있다는 말에 안씨는 “국물이 시원하죠? 우리는 채소육수를 써요. 콩나물, 북어로 국물을 내고, 거기에 당근 양파 파 마늘 호박 등 다섯 가지 채소를 우려내서 쓰죠. 사골로 하는 집도 많지만 우리는 뼈로는 안 해봤어요”라면서 “몸에 좋은 채소만 써서 먹고 나면 개운해요. 소화도 잘 되고, 맛도 좋죠. 멸치나 사골도 맛있지만, 채소로 육수를 내면 맛이 풍부하다”고 일러주었다.
 
 
지금은 골목집과 맷돌집 두 집 남아 있어
학생들은 홍콩영화도 보고 칼국수도 먹고
 
예전에는 이 골목길이 대단했다. 아홉 집이나 되는 칼국수집 앞에서 손님들은 자리가 없어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손님이 빠져나가면 얼른 그 자리를 꿰찼다. “예전에는 골목이 대단했죠. 사람들로 바글거렸어요. 지금은 두 집밖에 없어요”라면서 “칼국수에 튀김가루를 넣어서 맛이 고소해요. 예전에는 학생들을 비롯해 젊은 사람들이 그 맛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때는 먹을 것이 별로 없으니까, 더욱이 학생들은 한창 배고플 때라 양을 중요시 여겼죠. 여기는 맛도 있지만 양도 많았거든요. 지금도 양이 엄청나지만….(웃음) 그때는 학생 손님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자리가 없어서 들어오질 못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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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홍콩영화를 틀어주던 텔레비전은 아직 생생하다.
 
 
그는 또 “1987년부터 가게를 했어요. 그때는 햄버거가 흔할 때가 아니라서 학생들이 값싼 우리 칼국수를 먹으러 왔죠. 예전에는 신포동이 중심가였잖아요. 옷, 먹을 것, 커피숍, 술집… 모두 이 동네에 있었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다 여기서 해결했어요. 그러다가 가게가 모두 밖으로 나가서 동네가 썰렁했어요. 1997년 IMF가 오면서 신포동이 완전히 죽은 거죠. 다 밖으로 나가서 동네가 헹하죠. 커피숍도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은성, 상록수, 1번지, 흑백, 국제, 곰다방 등 다 없어졌어요”라며 다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3년 전부터 신포동에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이나타운에서부터 신포동까지 볼거리 먹을거리를 찾아오고 있다. 신포시장은 먹거리가 다양하고 넉넉해 사람들이 많이 온다. 신포통닭, 닭강정, 공갈빵 모두 줄을 서서 먹을 정도가 됐다. 특히 토요일과 일요일은 늘 붐빈다. “어느 날 카페베네가 생기더니 점점 사람이 늘어났어요. 신포시장은 먹을 게 많잖아요. 다행이죠. 그래도 한창 잘 되던 때의 10분의 1쯤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는 동네가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아 좋다고 한다.
 
신포시장 바로 옆이라고 해서 골목길 칼국수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건 아니다. 밖에서는 통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짧은 골목길이지만 밖에서는 알 수 없다.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학생 시절에 먹으러 왔던 손님들이 많다.
 
 
골목 밖이 아무리 번화가라도 밖에선 알 수 없어
예전에 오던 학생들, 이제는 자식들 데리고 와
 
안씨는 그들이 늘 반갑고 고맙다. “중고등학생 때 왔던 학생들이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요. 예전에 우리 가게는 학생이 90% 일반인이 10%도 안 됐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 학생이던 손님들이 어른이 돼서 오니까 반대가 됐죠. 우리 가게는 요즘 학생 5%도 안 돼요. 아는 사람이 아니면 올 수 없는 골목길에 있어서 그렇죠. 가게가 안에 쑥 들어앉아 있으니까 있는 줄도 몰라요. 매스컴에 몇 번 나오니까, 전화해서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그렇게 한 번 알게 되면 계속 오죠. 싸고 맛있으니까, 어디 가서 이 가격에 이만큼 먹을 수 없잖아요. 골목 밖이 아무리 번화가라도 가게가 골목에 있으니까 알 수가 없죠.”
 
인터뷰를 하는 사이 손님이 들어와 메뉴판에 없는 ‘칼제비(칼국수+수제비)’를 주문한다. 기자가 칼제비도 있느냐고 묻자, 주인장은 환하게 웃는다. “만들기 힘들어서 써놓지 않고, 잘 아는 단골만 시켜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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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엔 400원 하던 칼국수, 이젠 4000원
비디오, 컴퓨터 귀한 시절이라 홍콩영화 보러
 
지금은 칼국수 값이 4000원이다. 예전에는 얼마였을까? “처음 시작할 때 400원이었어요. 100원씩 200원씩 올라서, 500원 600원 800원… 그러면서 4000원이 됐어요. 그래도 다른 데보다 훨씬 싸고 양도 많잖아요. 요 골목만 빠져나가도 6000~7000원이잖아요.”
 
27년 같은 자리에서 장사하는 게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하루종일 재료 준비하고 음식 만드느라 몸은 고돼도 마음은 편하다. “이제는 많이 팔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동안 워낙 안 되는 경험을 많이 해봐서, 바닥까지 치고 와서 그런지 욕심을 내지 않아요. 처음에는 워낙 바쁘고 잘 되니까 고마운 줄 몰랐어요. 그러다가 바닥 맛을 보고 나니까, 요새 조금씩 나아지니까 이것도 다행이다 싶어요. 안 되니까 자식들이 이어서 한다고 하지도 않죠. 차이나타운처럼 장사가 잘 되면 아마 자식들이 서로 하겠다고 할 걸요, 아마.(웃음) 거기는 외제자가용 타고 다니는 사람 많아요. 우리 애들은 할 생각도 않고, 워낙 힘드니까 할 수도 없죠. 음식 장사가 참 힘든 일이거든요.”
 
한창 잘 되던 시절에는 가게마다 비디오로 영화를 틀어줬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집집마다 비디오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홍콩영화가 한창 유행할 때였다. 맷돌칼국수집은 아직도 그때 비디오를 틀어주던 텔레비전이 있다.
 
그때 비디오는 홍콩 영화, 미국영화만 틀었다. 우리나라 영화는 하나도 없었다. 에어리언, 로보캅, 다이하드, 80년대 후반까지 계속 됐다. 신씨는 장사를 하면서 그 영화들을 보기 싫어도 보고, 보고 싶어도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하느라 조용히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는 한 번도 못 봤다. 그래도 어떤 영화든 어느 대목에 어떤 가사가 나오고 행동이 어땠는지 다 안다. 딱지 앉도록 봤기 때문이다. 당시 칼국수를 먹는 걸 명분삼아 영화를 보러 온 학생들은 거의 다 영화팬이었다. 학생들은 칼국수 맛이 어떤가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영화를 뭘 하나 기대하면서 왔다. 영화 예고는 벽에 써붙여 놓았고, 학생들은 그 영화 스케줄에 맞춰 오기도 했다.
 
“하루에 몇 펀이 아니라, 한두 편을 주구장창 틀었다. 영화관보다 비디오가 미리 나갔죠. 영화 상영 전에 비디오 테이프가 돌았어요. 불법이지. 가게에 비디오 대주는 사람이 있어서 가게를 다 돌렸어요. 우리가 안 틀어준 지 15년 됐네요. 홍콩영화 쇠퇴기에 맞물려 다 끝난 거죠. 비디오, 컴퓨터가 들어오면서 굳이 여기로 보러 오겠어요. 보통 사람들도 다 다운 받아서 볼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이야, 뭐 스마트폰으로 다하던데….”
 
 
한 그릇 시켜놓고 주구장창 앉아 있으면 속 터져
하지만 귀한 단골손님들이라 뭐라 할 수 없어
 
비디오 보러 와서 자리를 오랫동안 꿰차고 있으면 속 터지지 않았을까. “국수 한 그릇 시켜놓고 비디오를 보니까 답답했어요. 순환이 돼야 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바깥에 있는 손님이 들어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먹고 있는 학생들을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죠.(웃음) 다 중요한 고객이잖아요. 한 시간을 먹든, 두 시간을 먹든 학생도 귀한 단골손님인데, 뭐라고 할 수 없었죠. 그때 비디오를 열심히 보던 학생들이 이제 자식을 데리고 와요.(웃음) 그전부터 오던 사람은 얼굴 보면 다 알아요.”
 
예전에는 학생들이 수업 끝나고 돌아다닐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 그런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학교에 머무르잖나. 신씨는 학교에서 살다시피하는 학생들이 안쓰럽다. “예전에는 실업계든 인문계든 야간자율학습이 없었잖아요. 어느 학교든 오후 5시면 끝나 집을 가든 학원을 갔어요. 놀 사람은 놀고, 그러니까 애들이 많이 왔죠. 하지만 지금 학생들은 점심도 학교에서 먹고, 석식까지 해결하잖아요. 시간도 없고, 돌아다닐 짬도 없어요. 27년 전하고 너무 달라졌어요. 뭐든 시대와 맞물리다보니, 다 변한 거죠.”
 
요새는 일반인들이 점심시간에 찾는 경우가 늘었다. “아직도 칼국수 집이 있대” 하면서 오는 경우다. 지나다 배고파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골목길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일부러 오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한 번 먹어봐야겠다, 예전에 먹어봤는데 다시 가보자하면서 왔다가 안씨가 그대로 있으면 손님은 무척 반가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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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목길은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수 있어, 골목길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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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을 간신히 빠져나오면 상점이 많은 번화가가 나온다.
 
그들은 지금 40대 초 중반이 돼서 자식들과 찾아온다. 신씨는 중년이 돼가는 그들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 그들은 반가워하지만, 스스로는 별로 변하지 않은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된다. 돈을 많이 벌어서 큰 건물이라도 갖고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청춘을 다 바친 가게를 시작한 지 27년이라는 사실을 학생들을 보고 다시 되새긴다.
 
 
“자료사진이요? 먹고 사느라 사진 찍을 새가 어디 있어요?”
 
미안한 생각도 든다. “돈을 많이 벌어서 큰길로 나가 빌딩 짓고 살아야 하는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서요. 학생들이 보기에는 어쩌면 답답할지 몰라요. 그대로 있으니까 반갑고 고맙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 않아요.(웃음) 그 학생들은 이제 40이 넘어서 자리잡고 돈을 많이 버는데, 나를 보면 얼마나 주변머리가 없으면 아직도 그대로 장사를 하느냐 그럴 것 같아요. 아니, 내 자신이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 학생들끼리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서로 돈 많이 번다고 할 때가 있어요. 특히 그런 소릴 들으면 미안하고 창피해요.(웃음) 여자 애들은 화장을 하고 와서 못 알아보고, 남자 애들은 거의 알아봐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혹시 예전 모습을 찍은 자료 사진이 있느냐고 물었다. 27년을 골목길에서 지낸 그가, 학생들에게 칼국수를 가득 담아주던 그가, 홍콩영화에 나오는 영화배우처럼 큰소리로 웃었다. “사진이요? 먹고 사느라고 바쁜데, 장사하는 사진을 어떻게 찍어요. 찍을 새가 있었겠어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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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이 2014-06-19 14:42:44
아~ 신포동 칼국수...추억의 칼국수... 홍콩영화때문에 우리도 같이했던 칼국수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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