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와 한국 교회사를 탐구하는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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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사와 한국 교회사를 탐구하는 목회자
  • 이재은 기자
  • 승인 2014.06.2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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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기념박물관' 준비하는 박철호 목사

흔히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방한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884년 6월 24일, 미국 감리교회 맥클레이 선교사(Rev. R . S. MacLay)가 처음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맥클레이 선교사가 김옥균 등과의 교류로 이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제물포에 들어온 역사적인 날을 기념해, 지난해 6월 24일 최초의 부두가 있던 곳에 교회를 세운 목회자가 있다. 인천사와 한국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철호 목사다.

올해 4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중구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근처에 ‘기념탑 교회’를 세운 박철호 목사. 숭의교회 75년사, 만수교회 100년사, 내리교회 110년사(1885-1903년대까지) 등을 쓰며 교회사를 연구했고 인하대 사학과에서 근현대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교회사를 파고들다가 서양 선교사가 최초로 한국에 발 디딘 곳을 찾아보게 됐고, 중구 파라다이스호텔 아래 역사성이 남아있는 곳을 발견했다. 19세기의 흔적이 담긴 돌벽이 바로 그것.

 


▲ 옛 해안선 사진을 보여주면서 지금의 위치를 설명하는 박철호 목사 ⓒ 이재은

 

“이 자리를 처음 알게 된 건 2008년도입니다.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최초의 항구가 있던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 집에 들어왔는데 이 돌이 있었죠.”

돌바위가 옛 사진 속의 지형과 일치한다는 걸 알고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꾸준히 관심을 갖다가 2012년에 집을 매입했다.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돼 있는 탓에 큰 공사는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건물을 허물고 돌을 노출시켜 공원처럼 만들려고 했는데 그러면 예배 공간 등이 좁아져 최소한의 리모델링만 했다.

“지붕과 벽에 석면처리가 돼 있었습니다. 돈을 들여 석면을 제거하고 나니 지붕과 벽이 없어서 사람이 살 수가 없잖아요. 비바람을 막기 위해 지붕과 벽면을 다시 했죠. 안에는 넓게 쓰기 위해 최대한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박철호 목사는 2011년부터 목회 활동을 했고 8부두 앞에 교회를 세웠다가 지난해 6월 24일 지금의 자리에 기념탑 교회를 세웠다. 교회 설립일도 맥클레이 선교사가 온 날을 기념하기 위해 날짜를 6월 24일에 맞췄다.

 


▲ 교회 1층 카페 내부에 있는 바위 ⓒ 이재은

 

19세기, 조선은 ‘은둔의 왕국’, ‘은자의 나라’였다. ‘코리아’ 또는 ‘꼬레아’라고 불렸지만 서구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주변국들은 신문물을 앞세워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고, 결국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인천 제물포항을 개항장으로 내주게 됐다.

제물포는 일약 국제적인 도시로 변모해 갔고 부둣가에는 박래품이 넘쳐났다. 서구인들의 내왕이 잦아지면서 무역도 활발하게 행해졌다. 서양종교가 유입된 곳도 바로 그 제물포항에서였다.

개신교 선교의 역사는 1884년과 1885년 사이 주재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면서 시작됐다. 개신교의 역사를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에서 파송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온 1885년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한 해 전에 이미 맥클레이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아펜젤러 부부가 1885년 6월 20일, 재입국해 인천에 38일 동안 체류하지 않았다면, 스크랜튼이 여름휴가를 제물포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인천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려있는 초기 선교사 모습과 자료 사진들 ⓒ 이재은

 

교회는 1층 쉼터(카페), 2층은 전시실 겸 기념관, 3층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시실 겸 기념관은 아직 준비 중이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이 바다 끝이라는 것만 알고, 돌의 가치는 잘 몰랐습니다. 해방 후 아버지한테 물려받아 60년을 이 자리에 살았다고 해요. 어머니가 생선을 말려 선창에 내다 팔면서요. 1974년도에 부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여기가 연안부두였잖아요. 여기서 배타고 덕적도도 나가고 그랬죠.”

“이 앞에는 해군 방어사령부가 있었어요. 그랬던 곳을 74년도에 갑문 만들고 매립해서 길 내고 월미도도 편하게 들어가게 하는 등 정리를 한 거죠. 돌이 이 집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이 옆집도, 그 옆도 이런 식으로 막아놓고 살고 있습니다. 저쪽 뒤로 들어가면 2, 300평 되는 집이 있어요. 안으로 들어가면 돌이 있습니다.”

박철호 목사는 이곳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변을 시나 구에서 구입해 개항장역사지구로 쓰든 박물관을 만들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면 벽을 노출시켜 시민들에게 이곳이 해안선이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망이나 어구의 역사가 있는 곳이니 어망박물관 같은 게 생겨도 좋겠죠. 지금 연안부두에는 어망 공장이 없어요. 연안부두에 나가는 걸 다 여기에서 만듭니다. 닻도 여기서 만들고요. 역사가 살아있는 곳인데 관심을 두는 이가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박철호 목사는 또 인천에도 역사재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에서 중요한 게 역사와 스토리텔링이에요. 문사철이 맞물려야 하는데 지금 역사가 빠져 있습니다. 강화역사재단처럼 인천에도 역사재단이 있어야 해요.”

 


▲ 외부에서 본 기념탑 교회 ⓒ 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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