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1909~?)은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최근 ‘남생이’, ‘경칩’ 등의 소설을 집필했던 현덕의 집(화평동 78번지)이 알려져 주목받고 있다.
현덕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인천과 가까운 대부도 당숙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당숙의 집안이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용강정이라 불리던 곳으로 이주하여 소년 ‘노마’가 등장하는 여러 편의 소설을 창작했다.
1938년 조선일보에 '남생이'로 등단한 현덕은 소설가로도 주목되지만 소년 ‘노마’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아동문학 장르에서 현덕의 자리는 매우 크다. 다소 늦게 그의 동화작품들이 발굴 소개됐으나 이제 ‘노마’가 없는 우리 아동문학은 상상하기 힘들다.
▲ 현덕(좌), 수도국산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남생이’(우) ⓒ 이재은
상업 활동에 종사한 중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대한제국 멸망 뒤 기록 사라져
본명이 현경윤인 현덕이 손수 작성한 ‘자서소전(自敍小傳)’에는 자신이 ‘삼청동 세균검사소 뒤 별장’에서 출생했다고 되어 있다. ‘삼청동 별장’은 무관으로 종2품까지 오른 조부 현홍택의 위세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의 아우 성택이 상업 활동에 종사한 것으로 보아 중인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대한제국 멸망 뒤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재력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현덕은 자신을 밑바닥 인생과 하나로 여기며 살았다. 그가 어렸을 때 부친이 사업으로 가산을 모두 탕진했기 때문이다. 모친의 힘으로 유지되는 집안 살림은 비참했다. 현덕은 “이리저리 집을 옮기고 식구들이 헤어지길 몇 십 회, 그럴 때마다 조부의 집으로, 당숙의 집으로 몸을 붙였다”고 적었다.
학교 성적은 뛰어났지만 가난 때문에 제일고보 1년을 채 못 다니고 중도 포기한 경험도 그의 소년소설에 투영돼 있다.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쓴 ‘골목’, ‘잣을 까는 집’, ‘군맹’ 등도 도시빈민촌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다.
▲ 현덕이 소설을 썼다고 알려진 중구 화평동 78번지의 현재 모습. ⓒ 이재은
화평동 78번지, 고모 집에서 머물며
항구도시로 유입된 이농민의 삶 그려
현덕의 생애와 소설세계를 연구한 원종찬 인하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한국소설은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지식인의 자의식’이 드러난 작품이 많았다. 현실을 성찰적으로 보려는 고민의 결과였다. 하지만 주로 하층민의 삶을 다룬 현덕의 소설에서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의식을 가진 지식인 대신 ‘순진한 어린아이’를 등장시킨다. 노마 연작 ‘남생이’, ‘경칩’, ‘두꺼비가 먹은 돈’ 등에서 현덕은 이농민의 고통스러운 삶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남생이’는 항구도시로 유입된 이농민의 삶을 그린 단편이다. 인천 부둣가를 배경으로 자유노동자 축에도 끼지 못하는 하층민들이 아등바등 살아 간다. 선창벌이로 목숨을 유지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살고자하는 욕망의 충돌이 소설 전편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밑바닥 인생에도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마는 절망적인 현실에 긴장과 생기를 불어넣는 결정적인 인물이다.
노마 앞에 놓인 비극과 절망은 독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독자로 하여금 그 시대를 통해 현재를 투영하게 만든다. 단순한 과거의 스토리가 아닌, 오늘의 삶과도 닮아있는 현실을 통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낯선 기분을 경험한다.
-줄거리-
마름의 비리를 폭로하여 땅을 뺏기고 선창가로 밀려온 노마 아버지는 과한 노동으로 병을 얻는다. 생계를 위해 노마 어머니는 항구에서 들병장수 일을 하며 웃음과 정조를 판다. 자기 할 일을 노마에게 맡기고 한종일 나가 있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온다.
아버지는 노마를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어린 노마는 친구 영이와 놀고 싶어서 아버지가 잠드는 틈만 엿본다. 어머니는 털보와 눈이 맞고, 털보는 노마의 집에도 온다. 노마 아버지는 아내에게 굶어 죽더라도 부정한 일을 하지 말라고 역정을 내고, 아내는 비웃어 넘겨버린다.
어느 날 영이 할머니는 노마 아버지의 병을 낳게 해 준다며 남생이 한 마리를 건넨다. 남생이가 생기자 아버지는 더 이상 노마를 부르지 않아 노마는 기쁘다. 노마는 양버들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는 게 소원이었는데 아버지가 죽던 날 양버들나무 꼭대기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노마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양버들나무에 곰보처럼 올라간 일이 기쁘기만 하다.
용강정은 한적한 시골마을,
현재는 화평동 78번지
용강정은 인천항 개항 전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였다. 일제가 1903년 8월 개항장 일대에 부내면을 신설하고 선창리를 분할할 때까지 이름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인가가 없는 한적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처에 용리(龍里. 현재의 용동)와 외리(外里. 지금의 경동)가 있어서 그곳에 포함시켜 부르다가 강제합방 전후 용강정(龍岡町)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1912년 거류지 구역 폐지로 ‘용강정’으로 이름이 바뀌고 1946년에 인현동으로, 1998년 동인천동에 통합됐다.
현덕이 '남생이'를 오늘날의 화평동 78번지 고모 집에서 창작했을 것으로 추적한 장회숙 인하역사연구회 회원은, 소설 '남생이'의 주 무대를 일제시대까지 외국인묘지가 위치했던 북성동 일대로 추정했다. 북성동 일대 풍광이 '남생이'의 무대 묘사와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 부두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들병장수를 하는 장사꾼들도 많이 있었다는 구술증언도 근거로 제시했다.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언덕, 그 서남면 일대는 물매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거의 방 하나에 부엌이 한 칸, 마당이랄 것이 곧 길이 되고 대문이자 방문이다. 개미집 같은 길이 이러 굽고 저리 굽은 군데군데 꺼먼 잿더미가 쌓이고, 무시로 매캐한 가루를 날린다. 깨어진 사기 요강이 굴러 있는 토담 양지짝에 누더기가 널려 한종일 퍼덕인다.” - ‘남생이’ 앞부분
이를 뒷받침하는 방계자료가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노마야, 놀자’ 애니메이션 원화전이다. 현덕의 소설 속 배경을 만화로 재현한 이상권 씨의 원화 40여점과 11분짜리 ‘남생이’ 애니메이션에서 북성동의 항구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 ‘남생이’ 중 인천부두마을 전경. 이상권 그림.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촬영.
그간 현덕의 '남생이'의 무대가 인천의 어느 곳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용강정에 이주했을 때 현덕이 '남생이'를 창작했고 그곳이 현재의 화평동 78번지라는 추정은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현덕의 문학과 작품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적지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덕은 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소속되지도 않았고, 월북 작가라는 신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1930년대 후반에 집중돼 있는 그의 작품들은 카프와 해방 후를 잇는 교량 성격을 갖고 있다. 그의 소설은 민중의 고통과 시대의 어둠을 응시한 결과물이다. 계급적 도식이나 주관의 전망을 내세우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깊이 있게 드러냄으로써 이전 시기의 문학을 발전시키고 우리 근대소설의 자산을 풍요롭게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한편,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 ‘노마야, 놀자’는 오는 6월 29일(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