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하와이 이민 개척자 안정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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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하와이 이민 개척자 안정수 (1)
  • 이성진(기독교사 연구자, 영화여자관광경영고 교사)
  • 승인 2014.06.29 03: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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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전, 제물포에서의 행적
외국어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모습(사진의 외국인은 호머 헐버트)
 

1. 한성 영어학교 시절과 현순과의 만남
 
안정수는 1878년 충남 보령에서 양반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신한민보> 1940.8.15) 한학을 배우다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신학문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면서 1897년 한성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데이비드 현, <현순목사와 대한 독립운동>, 한국독립역사협회, 2002, p.35) 안정수는 한성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비롯한 서양에 관한 기초 소양을 갖췄다. 그리고 현순, 김경민, 장응진과도 함께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한성 영어학교는 1893년 강화 무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허치슨이 1894년 육영공원을 인계받아 한성 영어학교로 재편한 왕실운영 학교였다. 한성 영어학교는 육영학원과는 달리 계급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학생을 선발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상민계층의 자제가 함께 어울려 공부하고,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가 돈독하여 근대화 운동의 주역들 중 한성 영어학교 출신이 많이 있었다.(유봉호·김융자, <한국근현대중등교육100년사>, 한국교육학회 교육사연구회, 1998, p.13)

안정수가 입학하던 시기에도 계급 신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으나. 한성 영어학교를 졸업하면 영국에 유학을 가서 해군 전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점점 양반 자제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양반학교로 변모되었다.(데이비드 현, 앞의책, p.35)
 

안정수의 친구였던 현순 목사의 만년 모습

1898년 현순이 한성 영어학교를 책임지고 있던 허치슨의 고압적인 교육방침에 크게 반발하여 그를 추방하고자 하였으나 좌절하고 학교를 떠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와 친분을 나눴던 안정수는 그만 두지 않고 한성 영어학교를 수료를 하였다. 안정수는 한성 영어학교에서 만난 현순과의 친분이 각별하였고 현순과의 교분을 통하여 확고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순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에 참여하기 위해 몰래 가출한 바가 있었고, 1896년 독립협회 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1898년 9월 아버지 현제창이 독립협회 핵심 지도자로 연행당하는 일이 벌어질 때도 육조 앞에서 6일 동안 시위를 벌였던 민족의식이 투철한 청년이었다.(한규무: 현순의 신앙과 활동, http://user.chol.com/~ikchch0120/nm16-0.4.htm)
안정수는 미국 이민 후에도 현순과의 친분을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함께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안정수의 투철한 민족의식에 현순의 영향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2. 제물포에서의 신앙생활과 직장생활의 조화
 
1899년 한성영어학교를 졸업한 안정수는 영국인 찰스 머스가 해관장으로 있는 제물포 해관에 취직하여 제물포로 내려왔다. 안정수가 한성 영어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물포 해관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그것은 안정수의 탁월한 영어실력과 성실함을 인정받은 까닭이었다.
 
제물포 해관의 모습

안정수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한성 영어학교 시절부터였는지, 아니면 제물포 해관에서 근무하던 중 당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미국인 존스(한국명 조원시)목사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개종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안정수의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1899년 제물포 해관 직원으로 채용된 지 얼마 안 되어 제물포 교회를 출석하게 되면서부터 시작한 것은 틀림없다.
 
안정수는 그의 탁월한 영어실력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실한 신앙생활로 존스목사의 서한국지방 선교에 헌신적으로 도와줌으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앗다. 1899년 12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제물포교회의 중추적인 교인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제물포교회 부속 매일학교인 영화학당의 야간 영어교사로 봉사하였다. 안정수는 주간에는 제물포 해관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고, 저녁에는 영화학당에 나와 초급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였다.
 
안정수가 주간에는 제물포해관 직원으로 야간에는 영화학당 영어교사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제물포 해관의 근무시간이 엄격하게 지켜졌기 때문이었다.(<인천광역시사> 2권, 2002. p.506) 존스목사의 1899년 연례보고서에서 안정수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고 있다.

‘우리 매일학교는 능력 있고 성실하고 헌신적인 기독교 신자인 교사 안정수에 의해 드디어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우리에게 온 이후로 그는 모든 일에 도움이 되어 왔다. 그는 한문과 언문뿐만 아니라 초급 영어도 가르쳤고 그 결과로 학교는 이전보다 더 좋은 상황에 있게 되었다.
- 홍석창, <제물포지방 교회사 자료집>, 에이멘, 1995, p.111
 
1899년 존스목사는 서한국 지방을 제물포구역, 강화구역, 연안구역(황해도)등 3개 구역으로 구분하고 이들 구역을 총괄하는 제물포 선교기지를 우각동 에즈베리에 설치하였다. 서한국지방은 황해도 연안에서 경기도 남양까지 150마일이 넘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존스목사는 이 방대한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구역 전도사가 필요하였다. 존스목사가 직접 담당할 수 없어 한국인 구역 전도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존스목사는 영화학교 교사이면서 구역 전도사이기도 한 한국인 조사들을 각 구역으로 파송하였다. 그럼으로 해서 영화학교를 담당할 교사가 부족하여 어려운 시기에 안정수의 존재는 매우 소중하였다.(<인천서지방사>(상), pp.101~103)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

안정수는 제물포 해관 직원으로, 제물포교회 교인으로, 영화매일학교 교사로 매우 바쁜 시간을 보냈다. 1901년 존스목사에 의해서 한국 최초로 창립된 엡웻 청년회인 나인데 청년회에서 통신국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1901년 9월 나인데 청년회 주최 고종황제 탄신 50수 기념경축행사를 주관하였다. 안정수는 대황제 성덕이 외외하셔 일월같이 비치시나 흑운 같은 산하가 총명을 옹폐하니 먼저 신민의 본분을 국사함이 가한 줄이라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 30일부터 11월1일 까지 열린 서한국지방회 제1차 회의에서 서기로 천거되어 임명되기도 하였다.(박철호·이성민, <내리교회110년사>, 인천 내리교회, p.145)
 
이런 안정수의 열정적인 교회생활로 김동현, 장원근, 손승용과 함께 제물포교회의 권사로 임명되어 구역 전도사인 장경화, 복정채를 도와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특히 안정수는 우병길, 장경화, 최봉현, 등과 함께 영화학당을 ‘대한 인항 미이이감리교회 사립영화학당’으로 개명하고 서당식 매일학교에서 벗어나 근대식 학교로 변모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박철호·이성민, 같은책, pp.147~149)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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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운당 2014-06-30 16:45:48
1899년 한성영어학교를 졸업한 안정수는 영국인 찰스 머스가 해관장으로 있는 제물포 해관에 취직하여 제물포로 내려왔다. ~에서 영국인 '찰스 머스'라고 했는데요. J L Chalmers를 어떻게 읽었으면 좋을까요? ㅎ 당시 동명의 해관장 영문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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