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이 버거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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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이 버거운 사람들
  • 이정숙 선생님(인천교육연구소)
  • 승인 2014.10.1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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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인천교육 미래찾기](70)
사진 출처=민주노총인천본부 

김샘이 초임 때에 선배들로부터 연수 받은 내용 중 하나는 출석부 칸에 점을 어느 지점에 찍느냐, 빈칸을 자를 대고 ‘제트’자로 그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것들이 교육행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왜 해야 되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점하나 안 찍으면 마치 중대한 범죄자인양 문책하는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참다못해 왜 그게 중요하냐고 질문했다가 버릇없는 건방진 교사로 낙인이 찍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질문’을 하게 되면 피곤해 진다는 걸 서서히 터득해 나가면서 점차 복종하는 태도를 배워나갔다. 그래서인지 그런 ‘만행’은 이십년이 훌쩍 지난 아직도 이어진다.
 
날씨도 후텁지근 하고 일은 치이게 많은 월요일 교무회의 시간, 연수가 한창이다. 연수 내용은 기안문을 제대로 쓰라는 것이었는데 제대로 쓰기 위해 기안문에 ‘3월’이라고 하는지 ‘03’이라고 하는지, 점을 찍는지 한 칸을 띄는지, 붙이는지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 자세한 것들이었다. 적어도 분위기가 그랬다. 그 심각하고 진지한 연수는 마침내 퇴근시간 십 분을 잡아먹고 나서야 끝이 났다. 교육경력 삼십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건 학교 회의에서 교사들이 논의하고 고민하는 주제가 왜 교육 밖에 있는 것들일까 하는 것이다. 또한 업무에 달인이 된 경력 교사들은 회계직이나 행정직이 해야 하는 일을 기꺼이 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유능함인 듯 후배교사들에게 과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능력을 중요한 사항처럼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
 
일제고사 폐지를 하면서 어떻게 평가를 할 것인가가 현장의 화두로 떠올랐다. 매일매일 모여 회의를 끝없이 하고 또 하면서 부장들은 지쳐가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지시에 시달리는 샘들은 차라리 시험을 보지 이게 뭐냐고 일만 더 많다고 투덜거린다. 교사들은 부장회의, 동학년회의 직원회의 등등 회의를 하면서 가장 간단하고 학생들이 부담이 없다는 성적표를 만들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수우미양가가 ‘잘함 보통 노력’으로 여전히 모양만 바뀔 뿐 그 근본적인 평가의 권위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하든 평가의 형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구현되지 못하고, 틀에 맞춘 단원학습목표가 아닌, 아이 개개인의 문제해결능력으로 맞추어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지필평가도 여전했다. 학습능력을 여전히 각 교과와 단원목표에 맞추어 명제적 지식에만 국한시켰다. 그러다 상중하로 나누어 문제를 평가하기로 합의한다. 각 과목당 열 문제 정도는 내야 한다는 게 중론이 되기도 했다가 다시 기존 원래대로의 방식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며칠이 지나자 또 지필평가가 꼭 있어야 한다고 번복되었다. 지필평가는 이원목적 분류표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시가 다시 내려왔다.
 
원래 시험이라는 게 수업의 과정이었으며 교사 고유의 영역이었던 것인데, 점점 교육을 교육자에게 맡길 수 없었던 사회는 이권이 개입되는 걸 막고 투명하게 한답시고 객관화시키겠다는 명목하에 일제고사라는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 시험은 아이들의 능력을 재는 절대적 도구라고 여기게 되었으며 점점 그 어마무시한 절대적 잣대는 아이들을 가차없이 한 줄로 세워 등급을 나누게 되고, 이제는 그러한 모습들이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로 자리잡았다. 애써 없어졌던 일제고사라는 장치가 정권의 변화에 따라 다시 부활하고 또 다시 변화되면서 이리저리 이권들이 개입돼 있는 형국이었다. 교육의 본질은 점점 왜곡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바로 잡고자 해도 이는 이미 교사 한둘의 힘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게 되어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이제 일제고사가 폐지되면서 좀 더 교육이 본령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평가를 교사의 교육 영역에 두고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접근할 수는 기회가 왔는데도 현장은 혼선 일색이고 공문은 각자 자신들이 가진 습관과 인식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고 읽혀지고 있다.
 
김샘은 아주 오래 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출옥을 한 인물이 자유를 얻어 슈퍼마켓에 취직을 해서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려고 하였다. 일하던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어 그곳 지배인에게 화장실을 다녀와도 되냐고 묻자 그 지배인은 황당해 하며, 자기가 화장실 가야 될 일을 왜 내게 허락을 구하냐고 도리어 화를 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내 먼저 감옥에서 나와 자신과 같은 경험을 했던 감옥 동료들은 이미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늘 통제되고 지시만 받았던, 그리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그 사람은 마침내 자신이 그렇게도 그리워 한 자유를 얻게 되자 그 자유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고사를 폐지하고 교사가 스스로 자율적으로 평가를 하라는 지침은 현장에 혼돈과 혼란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원래대로 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갑자기 바꾸는 게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지시와 통제 속에 이미 수동화된 현실을 외면한 시기상조였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김샘은 졸속행정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원래대로가 제일 낫다는 동료교사들을 보면서 씁쓸하기만 했다. 혹시 이 혼돈은 익숙한 것에 길들여짐,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저항에서 비롯된 우리의 모습들이 아닐까. 어느덧 우리도 자율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려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못하는 걸까. 김샘은 동료교사들의 말에 동의하기에 자존심이 상해 애써 우리는 자율을 수용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제고사의 형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닌 진정한 평가의 본질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교사 스스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평가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서로 합의해 나가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김샘은 우연히 TV를 보다 평가에 대한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되었다.(EBS ‘악기는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프로그램의 일부로 중간에 본 장면이라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수 십 명의 학생들이 강당에서 시험을 보고 있었다. 몇몇의 문제가 제시되면서 학생들은 책상을 긁거나 두드리거나 발을 동동거리거나 흥얼거리는 등 이상한 소리들을 내기 시작했다. 시험지에는 “내가 젓가락행진곡을 연주할 수 있는가. 네모 안에 꽉 차게 원을 30개 그릴 수 있는 지 실험해 보시오. 꽉차게 X를 30개 그릴 수 있는지 실험하시오. 밤하늘을 나타내시오. 밤에 별을 그려보시오.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처음 하는 행동을 하시오. 영국 락밴드 의 we will rock you를 들었을 때 행동을 하시오. 발밑에 불이 났을 때 행동을 하시오. 시험지가 젖었을 때 행동을 하시오.” 조용했던 시험장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고 즐거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제까지 꼴도 보기 싫었던 시험지를 어떻게 할지 행동해 보시오."라는 마지막 문제가 나타나자 학생들은 시험지를 찢거나 꾸기거나 팽개치고 속 시원한 웃음을 웃어대면 낄낄 거렸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교수가 나타나며 많은 소리를 들려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리고 다시 시험을 본다. 앙상블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학생들마다 제각기 한다. 이 평가를 통해 학생들은 앙상블이란 “타자를 보면서 함께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 불협화음도 좋은 음악이 된다는 것,” 등의 답을 내놓는다. 각양각색의 답을 작성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앙상블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배우고 또 깨닫게 된다. 아마도 그 시험을 치룬 학생들은 음악이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떻게 그 조화로움을 찾아갈 수 있는지 내내 고민하며 소리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진정한 음악인이 될 것이다.

이 평가는 수업과 평가가 나뉘지 않는 수업의 연장 속에 있다. 또 평가가 어떤 능력을 측정하고 등급을 나누는 것에 있지 않고 학습을 다시 지원할 수 있는 단초로 작용한다. 우리의 평가도 그러한 지점에서 고민되어야 한다. 평가란 미명하에 능력을 입맛에 맞게 싹뚝싹뚝 잘라버리고 또 그것들을 마치 그 아이능력의 전부인양 줄을 세워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의 권위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으로부터 벗어나야 이러한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김샘은 늘 아이들이 가진 다양한 능력보다는 권위적 잣대를 늘 들이대고 있는 건 아닌가 반성하면서 평가가 좀 더 새로운 차원의 학습을 지원하고 아이들의 가능한 능력을 키워낼 수 있도록 기능할 수 없을 것인가에 대한 차원의 고민을 좀 더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가에 대한 자율적 시도가 버겁지 않도록 평가가 어떻게 하면 평가를 교육의 본령으로 가져 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것들을 공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 속에서 ‘자율’이 좀 더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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