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 알아봐주신 인천시민들 잊지 못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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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 알아봐주신 인천시민들 잊지 못할 것“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4.10.31 0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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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합창단 퇴임하는 윤학원 지휘자 인터뷰

인천시립합창단을 떠나는, 인천 음악사에 큰 획을 남긴 윤학원 지휘자.

1995년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던 인천시립합창단(이하 인천시합)을 재창단하기 위해 취임한 윤학원 상임지휘자가 30일 퇴임 연주회를 끝으로 20년을 맡아온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휘자 부임 이후 ‘전임 작곡가’ 시스템을 전격 도입해 ‘한국적, 현대적, 세계적’이라는 목표 하에 열정을 다해, 인천시합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쾌거를 이루고 우효원 상임 작곡가 등 후배들을 세계에서 각광받는 작곡가로 인정받게 하는 등, 그야말로 인천의 음악사에 큰 확을 그은 인물이라 그의 퇴임 소식에 안팎에서 아쉬움울 쏟아내고 있다.

운 감독 부임 후 인천시합이 쌓아올린 명성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다. 1997년 벨기에의 IFCM 창립 15주년 기념 세계 합창제와 오스트리아 유로파 칸타타, 1999년 유럽 지역 순회 공연과 2005년 미국 4개 도시 연주회 등 수많은 해외 무대에서 인천시합을 찾았다. 특히 지난 2009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ACDA(미국합창지휘자협회: American Choral Directors Association) 의 초청 공연에서 전 곡 모두 기립박수를 받은 것은 세계 합창 역사에서도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꼽힌다.
 
[인천in]은 연주회가 있기 전, 연주회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윤 감독을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안 좋은 상황에서 퇴임했다면 마음도 무거웠겠지만 한 번도 내리막길을 걷지 않고 잘 흘러온 가운데 퇴임하게 되어 무척 뿌듯하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ACDA 초청 공연 당시의 인천시립합창단

퇴임을 하신다니 아쉽습니다. 예술회관과 인천시합의 탄생 이후 역사를 함께 하신 셈이네요.
20년 동안 사실 여기 와서 해야 할 일을 거의 다 했습니다. 전세계 최고의 연주 홀과 음악 페스티벌을 모두 다녔고, ‘유럽합창연합’ 등에서 하는 세계적인 무대에 초청도 받아 봤고, 가장 큰 쾌거라고 생각하는 2009년 ACDA 무대와 이듬해 프랑스 폴리포니 세계합창 박람회도 서 봤어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카네기 홀에도 서 봤고요. 여한이 없습니다. 부임하고 모든 것이 다 잘 이루어져서 너무 행복해요.

퇴임을 결심하신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20년을 한 곳에서 우직하게 이끄는 건 참 좋았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하는 시점이 된 것 같아요. 나이가 일흔이 넘어서 그런지 악보 외우는 것도 힘들 때가 많고요. 그런데 더 결정적인 건 박사 학위까지 따고 온 훌륭한 젊은 지휘자들이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 일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물론 그 친구들이 여기 와서 지휘하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후배들에게 길을 내줘야 한다고 봐요.

예술회관 초창기에 부임하신 ‘가장 큰 어르신’이 인천 음악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는 사실에 지역 사회가 많은 아쉬움을 표시합니다.
몇몇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그렇지만 인생이 그런 것 아니겠어요? 영원한 건 없는 법이죠. 예술이 어느 시점에서는 잘 되고 어느 시점에서는 잘 안 되고 하는 건데, 20년을 하면서 제가 신기할 정도로 내리막길 없이 발전하는 모습만 보여줬기에 그게 참 놀라워요. 이 상태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정말 좋은 거라고 봐요.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거잖아요? 계속 하다가 나중에 “저 사람 음악이 왜 저래?” 라는 소리 나오면 안 좋은 거니까요. (웃음)

퇴임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어떤 말씀들을 하시던가요?
그래도 제가 여기 와서 열심히 한 게 보였는지, 많은 분들이 “아쉽다. 좀더 하지 그러냐” 같은 반응들을 많이 보이세요. 반면에 정말 옳은 결정을 했다는 반응도 많아요, 그 분들도 저처럼 정점에서 그만 두는 것이 좋은 거라 생각을 하셨겠죠. 시선에 따라 이야기는 다 다르게 하세요.

유병무, 나영수 등 감독님과 더불어 한국 합창계의 거목인 분들, 그리고 제자 박칼린 등의 피드백이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박칼린에게는 아직 이야기를 안 했어요. 유병무, 나영수 두 분은 오실 겁니다. 그 두 분은 오는 것 말고도 이미 공연 팸플릿에 들어갈 축사까지 보내와서 공연장에서 글을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한국합창총연합회’의 이사장을 맡고 계시는 이상길 선생도 축사를 보내 왔어요.

세인들은 선생님의 지휘 활동 중 인천시합과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이하 선명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먼저 선명회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그 시절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선명회는 제가 젊은 시절의 열정을 모두 쏟아 부은 곳이었어요. 34년 동안 했으니 오래 됐네요. 사실 선명회는 그 전에 제가 했던 일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싸리재의 신신예식장에서 어린이들 데리고 합창 연주회를 한번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인천문화원 측 관계자분이 그걸 보시고 문화원에서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탄생했던 게 [인천문화원 어린이 합창단]이었는데 그게 기반이 돼서 어린이 합창 지휘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어요. 선명회는 제가 오기 전 10여 년 동안 장수철 선생 등이 지휘자를 역임했던 좋은 합창 단체였어요. 때문에 제의가 왔을 때 참 기분 좋았죠. 선명회에서 지휘하는 동안 촌놈이 외국 많이 다닌다고...(웃음), 안 가본 데가 없는 것 같아요. 한번 나가면 3~4개월씩 순회 연주 하고 그랬으니 전 세계를 다니며 공부도 경험도 많이 했던 셈이죠. 오히려 어린이들 통해서 제가 배운 게 더 많아요.
 

30일 예술회관에서의 퇴임기념 콘서트 현장.

인천시합 부임 당시가 기억납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맡게 되셨었죠, 당시 어떤 마음으로 지휘자 자리를 수락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제가 대우합창단 지휘자 생활을 하다 해체가 되는 바람에, 프로합창단에 대한 마음의 상처 같은 게 좀 있었어요. 당시 예술회관 관장이었던 한학수 관장이 와서 “인천시합을 재창단하려 한다, 맡아 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사실 처음엔 거절했어요. 집사람도 반대가 심했고요. 그런데 한 관장께서 “인천 출신의 지휘자인데, 생애 마지막으로 인천을 위해 일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을 하는데, 그 말씀에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게 인천시합과의 인연이었습니다. 다행히 시민들이 성원을 많이 해 주셔서 그게 지금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인천 출신이라는 정서적 부분에서 공감이 있었던 것 같고, 합창음악에 대해 열정을 쏟은 부분을 시민들이 어여쁘게 봐 주신 것도 같아서 참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선도하신 ‘동 단위 합창단 만들기 운동’은 의외로 반향이 괜찮았습니다.
사실 동 단위 합창단은 지금 상황보다 몇 배는 활성화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인천지역의 전 동 단위에서 다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층간 소음이다 뭐다 해서 이웃 간에 갈등도 많잖아요? ‘이웃’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 이웃끼리 모여서 합창을 하고 그런 풍토가 조성된다면, 살벌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동네 사람들끼리 친구도 되고 그럴 수 있을 거라 봐요. 인천이 동이 많은데, 사실 다 했어야 했는데 아직 9개 정도밖에 안 되어서 그 점은 조금 안타까워요. 향후엔 전 동 단위에서 합창운동을 다 해서, 인천이 ‘노래하는 도시’가 될 수 있었으면 해요. 인천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가장 처음 들어온 도시입니다. 찬송가와 합창음악이 태동된 한국 최초의 도시인 거죠. 때문에 인천에서 합창 운동이 일어난다는 건 극히 당연한 일인 겁니다.

인천에서 합창운동을 주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신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합창은 자기 혼자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죠. 우리 민족이 혼자는 잘하는데 다른 사람과 일을 잘 못하는 성품 있는 듯해요. 합창은 그걸 커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천시합 지휘자를 역임하시는 동안 '감동의 순간들'을 몇 부분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인천시합에 부임 하면서 처음에 25명으로 시작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소화했던 것이 르네상스 후기(16세기)의 작품 ‘마드리갈’입니다. 단원들 섬세하게 노래를 해야 하는 작품이죠. 때문에 그들과 함께 정말 고군분투했습니다. 당시 저는 중앙대 교수였는데, 안식년을 내고 여기 와서 단원들 한 명씩 붙잡고 소리 만들고 그랬어요. 마드리갈 연주 마치고 단원이나 저나 그 감동은 정말 대단했어요. 이후로 인천시합 이미지를 많이 개선했죠. 한국의 여러 합창제에 참여해서 우리가 뛰어난 합창단임을 인증 받았을 때도 그렇고, ‘유로파 칸타타’에서 유럽의 지휘자들과 합창인들 앞에서 연주 하고 그들이 감동을 받아 인사를 청했을 때도 정말 뿌틋했어요. 가장 큰 감동이라면 아무래도 2009년 ACDA에서 ‘세계 4대 합창단’ 자격으로 초청을 받아 무대에 오른 거예요. 영국, 베네수엘라, 캐나다 등 합창 강국에서 온 팀들보다 우리 인천시합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갖게 했죠. 첫 곡서부터 계속 기립박수가 터지는데... 그 감흥이란 건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선생님과 함께 무언가를 한 번이라도 작업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다 존경의 메시지를 보내곤 합니다. 예능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했던 김태원씨도 마찬가지였고요.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사실 저는 특별한 재주는 없어요. 그저 열심히 하는 거죠. 좋은 성과를 거두면 좋은 이미지가 생긴다는 걸 아니까, 그것만 바라보고 한눈팔지 않았던 게 원동력이라면 원동력이겠죠. 그건 김태원씨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원씨는 성실한 사람이고, 중요한 게 절대 교만하지 않아요. 성실한 사람끼리 정말 열심히 작업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선생님 하면 사람들은 자칫 딱딱할 수 있는 합창에 안무와 웃음소리 등, 보는 재미 내지 파격을 더한 부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언제부터 이런 시도를 하셨나요?
이런 퍼포먼스는 선명회 때 처음 시도한 거예요.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그 다음에 대우합창단 하면서 다시 시도를 해 봤죠. 그랬더니 “대우합창단이 어린이 합창단이냐”며 날선 비평을 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청중은 그와 다르게 여전히 좋아하셨죠. 세종문화회관에서 몇 번씩 공연을 해도 티켓이 없어서 암표가 돌 정도로 몰렸거든요. 다른 합창단은 자리가 다 비고 그랬는데 당시 대우합창단은 정말 난리가 났었어요. 이후 서울레이디스합창단과 인천시합등에서도 이어졌는데, 개인적으로는 인천시합을 통해 그 완성이 이루어졌다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합창’이란 무엇일까요?
혼자 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같이하는 것. ‘우리’라는 의미가 굉장히 중요한 음악이에요. 합창은 다른 사람의 소리를 꼭 들어야 하는 음악이고, 들어서 그 소리와 같게 만드는 것이라고 봐요.

퇴임 이후엔 어떤 일을 하시나요?
글쎄,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이후에도 할 일이 많더라고요. (웃음) 가장 중심은 제가 이끌고 있는 ‘윤학원 코럴’ 합창단 활동이 될 것 같아요. 50명 정도 되는데, 아마추어임에도 수준이 꽤 올라왔습니다. 지난여름에 미국 LA에 초청을 받아서 미국 최대의 공연 공간 중 하나인 디즈니 홀에서 연주를 했는데, 티켓 가격이 100불 정도 했는데 1,650장 정도가 판매돼서 주최 측이 아주 좋아했어요. 오셨던 분들도 다 만족하셨고요. 아마 그 활동은 제가 기운 없어서 지휘를 못할 때까지 계속 할 것 같아요.

떠나는 인천시합에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인천시합은 현재 세계 최정상급에 있는 합창단이죠. 단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정상에 올라간 뮤지션은 겸손한 마음으로 성실히 노력했을 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에요. 교만해지면 내리막길을 탈 수밖에요. 새 지휘자가 오시면 그분을 모시고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저와 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해서 지금까지의 수준과 명예를 계속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인천시민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인천시합에서 했던 거의 모든 연주회가 좌석이 만석이었습니다. 그렇게 마니 와주셔서 감상해주시고 즐겨주신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성실하게 한다고 했는데 알아봐주신 것 같아서 저로서는 평생 잊지 않고 감사하면서 살 것 같아요. 인천에 동 단위 합창단도 지속적으로 발전되길 바라고, 그래서 인천이 진정한 평화와 합창의 도시로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인천in]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보내는 윤학원 지휘자의 메시지와 친필사인.



* 예술회관 측 사정으로 연주를 촬영하지 못한 점 양해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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