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에서는 흔히 들을 수 없는, 경이로운 음악의 메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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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파에서는 흔히 들을 수 없는, 경이로운 음악의 메신저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4.11.10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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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방송 [한밤의 음악여행] DJ, 평론가 성우진과의 인터뷰

경인방송 [한밤의 음악여행 성우진입니다]를 진행하는 성우진 음악평론가

인천을 대표하는 지역민방은 현 90.7Mhz 라디오 [iFM 경인방송]이다. 개국 초기에는 ‘iTV’라는 이름으로 TV도 함께 송출하며 박찬호가 활약하던 당시의 메이저리그 독점 중계, 스타크래프트 게임중계 등 소위 ‘전설’로 통하는 공격적인 방송 마케팅을 하기도 했으나, iTV 회장이었던 박상은(현 새누리당 의원, 전 인천시 경제부시장)이 iTV를 시장 선거 출마에 이용하려 했다는 문건이 폭로되고, 대주주였던 OCI와 대한제당의 증자 및 경영개선 약속 이행거부로 인한 노조 파업이 이어지면서 결국 TV와 라디오 모두 방송이 중단 혹은 파행으로 이어지는 ‘흑역사’가 있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TV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다행히 라디오는 이제 거의 정상 궤도에 오르며 다른 FM방송국에 비해서도 부족함 없는 모습을 되찾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헌데 경인방송의 요즘 모습이 상당히 특이하다. 공중파가 소위 “돈이 안 되고 청취율도 떨어진다”며 내팽개치고 있는 팝과 재즈 전문 프로그램을 경인방송은 무려 세 프로그램이나 운영하고 있는 것. 본디 이곳의 PD이기도 한 박현준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가가]가 첫 번째, 그리고 새벽 두 시부터 재즈로만 한 시간을 담당하는 [강웅의 뮤직노트], 그리고 [한밤의 음악여행 성우진입니다]가 그것이다. 이중 근래 가장 큰 주목을 받은 프로그램이 음악평론가 성우진이 진행하는 [한밤의 음악여행 성우진입니다](0시~2시). 해외의 록과 팝 음악은 물론 재즈와 월드뮤직 그리고 국내 인디 음악까지 마니아 성향의 음악들을 겁도 없이 틀어내는 이 프로그램에, 마치 잃어버린 둥지를 찾은 듯 음악 팬들이 모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DJ 성우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음악 평론가로 꼽힌다. 한국에서 명멸해간 음악 전문지 대부분은 그가 편집장을 지낸 것들인데 지금도 록 음악 애호가들에게 추억의 매거진으로 남아 있는 [핫뮤직]을 비롯해 [뮤직랜드], [록킷], [서브] 등이 모두 그가 편집장을 역임했던 전설의 음악지였다. 그는 [GMV]와 [오이뮤직]의 편집장을 지낸 원용민과 더불어 한국의 음악 전문지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꼽히는 평론가이기도 하다. 팝/록 음반을 구입하면 들어있는 해설지 역시 한때는 그가 다 도맡아 썼다 할 수 있을 정도여서, 해외음악을 듣는 애호가 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공연 및 음반기획의 일도 빠뜨릴 수 없다. 2000년대 초반부터 열리고 있는 [부산 록 페스티벌]의 전성시대를 기획한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경인방송의 DJ로 지난 5월부터 활약을 하고 있다. 특히 록 팬이 많은 인천을 비롯해 ‘전국의 음악 좀 듣는다는 친구들’이 자정마다 90.7Mhz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출 수밖에 없는 이유다. 라디오를 통해 또 한번 승승장구하고 있는 그를 경인방송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음악계에서 저명한 인물이지만 라디오 DJ까지 섭렵할 줄은 몰랐다.
5월 12일 자정부터 시작했으니 6개월 여 됐다. 이곳 경인방송에서 라디오 팀장을 맡고 있는 안병진 PD가 이곳에 오기 전 과거 위성 DMB의 전문음악방송 ‘키스라디오’ PD이기도 했는데 그때 그곳서 방송 활동을 하며 얼굴을 익혔었다. 사실 경인방송과의 인연도 이전부터 있었다. 라디오에서 종종 방송 게스트로 출연하다가, 올해 개편 기획 하면서 “전문 음악방송이 이젠 부활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모두가 했었던 것 같다. 그게 현실화가 된 거다.

본디 꿈이 DJ였다고 하던데?
내 인생의 꿈 중 세 번째에 해당됐던 게 바로 DJ라는 직업이다. 가장 처음에 꾸었던 건 음악지 [월간팝송]의 편집장이었으나 폐간되어 이루지 못했고, 대신 [핫뮤직] 등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음악지들에서 편집장을 맡으며 성취했다. 두 번째는 팝 칼럼니스트였는데 이것도 음악지 일 하면서 자연스레 이루게 됐고. 그리고 되고 싶었던 게 지상파 DJ였는데 온전한 지상파는 아니지만 지역민방의 DJ로 꿈을 잘 이루게 됐다. 나보다 DJ 선배들인 전영혁, 성시완 등이 해왔던 길을 동경했었고 그들의 길을 이어 걸을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 단 차이점이라면 그분들은 녹음방송을 주로 했었는데 시대가 변해서 나는 주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일정을 자정 생방송으로 소화하며 청취자들과 대화한다는 것이다.

선곡이 상당히 '경이롭다'는 청취자들의 반응이 있다.
사실 전후 방송들과의 선곡 조절 등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가 있어 애를 먹는 부분도 간혹 있다. 예전 10시부터 부활의 드러머인 채제민씨가 하던 록 전문 방송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는 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지상파보다는 제약이 덜할 수도 있으나 DJ라면 항상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지상파에서 잘 틀지 못하는 명반들, 희귀한 곡들도 살짝 풀어놓고 있고 지금은 이 무게의 중심 어디에 맞출까 고민을 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시작한 지 6개월이라 아직은 시행초기라 생각하고, 또한 아직은 본색을 숨기는 중이다. (웃음)

청취자들에게 대단히 친절하더라. 긴 머리 등 소위 록적인 이미지가 있고, 잘 만들지 못한 음반들에 독설도 마다하지 않은 평론가로 유명하다보니 그 친절함은 좀 의외였다고나 할까.
평론가로서 독설을 하다보니 처음엔 그런 오해들이 많았다. 다혈질적인 성격도 있고 나란 사람 자체가 워낙 반골 기질이 강해서, 시답잖은 꼴을 못 보고, 할 말이 있으면 꼭 한다. 홍보의 목적이 있는 음반 해설지 역시 그렇게 써 와서 음반사 직원들 중에서는 내게 글을 맡기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도 많고, 30년을 평론가로 살아온 나 역시 “싫으면 나한테 안 줘도 돼” 같은 자세로 일관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한때는 “연락해도 안 받아준다더라, 엄청 까칠하다더라”와 같은 소문도 있어서 어려워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만나보고 선입견이 바뀐 뮤지션들, 평론가들이 많다고 하더라. 나는 선배도 선배지만 특히 후배 평론가들에게는 신경 많이 써 주려고 한다. 나도 선배들에게 그리 배웠으니까.

소싯적 팝 좀 들은 사람 중에서는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냐”와 같은 반가움의 반응도 있다.
[핫뮤직]의 편집장 자리를 내놓고도 여러 음악지에서 편집장을 하고 그 책들 다 잘 팔았지만 [핫뮤직]의 아우라가 깊이 박혀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리 느낄 수도 있을 거다. 또한 2000년대부터는 [부산 록 페스티벌] 기획하러 지방에 내려가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그리 느낀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꾸준히 음악 신에서 활동해 왔다. 방송작가도 하고, 음악방송 등에도 많이 출연하고 그랬다. 아마 그분들이 내 활동 노선을 놓쳐서 그리 느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젊었을 적 과거 이야기도 좀 하자. 음악업계에는 어떻게 뛰어들었나?
처음엔 서울 낙원상가 옆에서 조그만 레코드가게를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도매상을 드나들어야 했는데 그때 들락날락 했던 곳이 대형 음반 체인 [신나라레코드]였다. 다른 음반 숍보다 좀 희한하고 그런 걸 주로 갖다놓고 팔았는데 그때 “쟤 누구냐”라는 소문이 났다고 하더라. 그 때문에 성음레코드 관계자였던 손오영 선배를 만나게 됐다. 그 선배가 “너도 해설지 한번 써 봐야지?” 그러면서 내게 덜컥 메탈리카의 4집 앨범 [...And Justice For All]의 해설지 작업을 맡겼다. 그때가 1988년, 내 나이 26세 때 일인데 당시 음반사 내에서는 전영혁이나 김광한 등 기라성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초짜에게 맡기느냐며 반대가 심했고, 그걸 선배가 책임지겠다고 해서 작업하게 됐는데 좀 ‘욱’하는 게 있어 제대로 보여주자며 정성스레 썼다. 음반이 잘 팔리면서 해설지에 대한 반응도 좋았고, 덕분에 이후 서울음반이나 지구레코드 등에서 발매된 해외 음반도 많이 쓰게 되면서 [뮤직랜드] 필진과 편집장을 거쳤고 1990년 [핫뮤직]을 창간한 이후엔 다른 음악 팬들도 잘 알고 있는 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핫뮤직]의 창간호 커버 모델은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였는데, 과거 난 레드 제플린의 팬클럽 회장이기도 했다. (웃음)

[핫뮤직] 이후로도 행적은 굵직한 편이었잖은가.
[핫뮤직]을 만들면서, 그 잡지를 통해 밴드 ‘다운타운(넥스트의 기타리스트 김세황이 넥스트 합류 전 활동했던 록 밴드)’의 레코드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후 회사와 마찰이 좀 있었는데, 다운타운의 멤버들이 이참에 회사 그만두고 매니지먼트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더라. [핫뮤직]의 퇴사는 그때였고 이후 많은 분들이 가요 파트의 음악지를 창간해 달라고도 했는데 당시엔 오히려 전문지가 먹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90년대 중반 [월드팝스]를 만들고, 악기사 ‘콜텍’에서 했었던 [록킷], 그리고 [서브]까지 편집장을 맡았던 건데, 사실 이들 잡지가 [핫뮤직]보다 더 실적이 좋았다. 공연기획은 아까도 말했듯 [부산 록 페스티벌]을 몇 년 했었고.

그 [부산 록 페스티벌]을 시작한 이야기도 좀 말해 달라.
처음엔 그곳 행사 기획자로 부임 받았을 때 가 보니 지역잔치처럼 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만드는 형태처럼 아나운서도 나오고. 충격이었다. (웃음) 뻔한 형식으로 진행되니 못마땅했던 거다. 심지어 행사 끝나면 “‘크라잉넷’이 대체 뭐냐”는 충격적(?)인 댓글도 있었다. 그래서 주최 측에 “식전행사 전에 두 시간만 나한테 무대 시간을 달라”고 부탁해서 그 두 시간 정도를 록 페스티벌처럼 질러 버렸는데, 그게 메인 행사보다 더 반응이 좋았고 그 후로 전체 디렉팅을 내가 맡아서 록 페스티벌의 형태로 바꿔놓은 거다.

공연기획을 했던 사람 입장에서 현재 인천서 열리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는지? 시민사회 일부는 “지역시민이 소외된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하던데.
일단 장르적으로 [펜타포트]는 여성 팬들의 취향을 감안해야 하니 순수 록 팬이라면 균형감의 부분에서 100% 만족을 느끼지는 못할 부분도 있을 거라 본다. 또한 초창기에는 중심을 잃은 부분도 있었고 혼란기도 상당했다. 그러나 내 판단에 지금은 아주 좋아 보인다. 연령이나 장르 등도 상당히 균형을 맞추려 한 흔적도 보이고, 특히 올해는 특히 페스티벌만의 색깔도 있고, 어느 정도 지위 확보 및 노하우도 마니 보유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모 카드 회사가 주최하는 다른 지역의 대기업 위주 록 페스티벌을 보라. 몇몇 밴드들의 지명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사실 그건 ‘록 페스티벌’이라기보다 차라리 ‘빅 콘서트’로 부르는 게 맞을 거다. 솔직히 모 카드회사 콘서트는 페스티벌로 안 보인다. 록 팬들이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상업자본으로 만든다고 안정적인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엔 연속성도 사실 의문이다. 그에 비하면 [펜타포트]는 시민사회의 불만이 있을 수는 있어도, 전체적으로 크게 나무랄 데는 없다고 본다.
 

성우진 평론가는 방송 중 자신이 모든 방송기기들을 직접 컨트롤하며 진행한다

다시 라디오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현재 지역민방인 [경인방송]이 팝 관련 프로를 두 개나 하고 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하나만이 남은 공중파 라디오보다도 더 많은 빈도인데 이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궁금하다.
경인방송에서 본디 오래 해 왔던 게 [박현준의 라디오 가가]였는데 박현준의 패턴은 대중성에 무게를 두고 있기에 좀 마니악한 곡들은 플레이할 기회가 없기도 했다. 주말프로도 좀 있지만 아무래도 비중이 적고. 그래서 잘 틀지 못하는 나머지 곡들을 내가 커버하자고 결론지었고 이 결론을 잘 내린 것 같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일단 전후 방송들하고 겹칠 일이 없으니까. 다만 경인방송 말고 전체의 세태에 대해선 아쉬운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다. 나는 과거 마니아 성향의 팝 음악과 언더그라운드 음악들을 일정 수 혹은 일정 시간 이상 틀어야 한다는 소위 ‘라디오 쿼터제’를 한때 주장해 온 사람이기도 했다. 아직도 지상파에서 승승장구하고 계신 배철수 선배가 그 모든 부분들을 혼자 커버하긴 사실상 힘들어졌고, 그래서 아쉬움이 크다.

후배 음악 평론가들의 모습은 어떻게 보는가?
요즘 평론가들은 전문적이고, 똑똑하고, 자기주장도 강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을 보며 걱정되는 건 그 활동들이 생계의 일부로 작용해야 하는데, 전망이 너무나 어둡다는 것이다. 평론가로서 먹고 살기 위한 분야가 강연이 되던 방송이 되던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평론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판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사실 많이 안타깝다. 다만, ‘웹진 스태프’나 ‘키보드 워리어’에서 발전한 사람들이 평론가 대접을 받으려 하는 일부의 문화는 좀 고쳐져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음악 시스템에 대한 생각은?
시장이 점차 ‘삐딱선’이 되어 가는 듯하다. 예전에 무료로 mp3 다운로드 받고 그럴 때, 일종의 ‘제동 장치’가 있어야 했다. 인터넷 강국이라 강조하면서, 그 특성 때문에 돌아올 폐해는 전혀 생각 못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저작권에 대해 개념이 없을 때였으니. 그렇게 십여 년을 공짜로 음악 받아놓게 해놓고 갑자기 유료로 돌려놓으면 대중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는데 그것조차 생각이 없었던 거다. 유통을 통신사에 맡겨놓은 것도 문제고. 정부 정책을 입안하는 분들이 지금껏 문화에 너무 무지했던 거다. 시상식 같은 것도 그렇다. 한때는 정치권에서 시상식과 차트를 만들어 보겠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제대로 안 되지 않았나. 오히려 [한국대중음악상] 같이 민간단체가 그 일을 다 하고 있다. 오히려 MAMA와 같이 방송국이 끼어 있는 시상식서 시각을 넓혀 공정한 수상을 위한 시스템 도입해야 했다. 그렇게 하질 못하니 시상식은 매년 극과 극을 달리게 됐다.

지금이야 여기서 방송을 하니 매일 오겠지만, 과거에도 인천에는 자주 왔다고 하던데?
인천은 자주 왔다 갔다 했다. 예전에 관교동이 헤비메탈 밴드들의 연습실로 수를 놓았을 때는 크래시 같은 밴드들 연습시키면서 키우기도 했다. 주안에 있던 음악 감상실 ‘성림’에서 토요일마다 와서 VJ를 하기도 했다. 어차피 밴드들도 보러 와야 했으니까. 인천 헤비메탈 밴드였던 ‘사하라’의 우정주씨와도 그렇게 친해졌고, 당시 알게 된 드러머 노호연은 지금 밴드 예레미로 가서 활동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뮤지션들과 친해지면서 인천은 자주 드나들었다. 예전 주안 시민회관이 있을 적엔 그곳에서 록 공연을 많이 했기에 그 때문에도 자주 왔었고.

헤비메탈 분위기가 사라진 지금의 인천에 많은 아쉬움이 있을 것 같다.
물론 그전부터 조금씩 서울로 옮겨가는 분위기는 있었다. 전반적으로 록에서 팝으로 유행이 옮겨가기도 한 것도 원인이었을 거고. 예전 무명 뮤지션들의 음악 활동은 밴드가 중심이지만 요즘은 실용음악과 등장하면서 공중파 진출 혹은 가수가 되기 위한, 혹은 학교를 가기 위한 음악을 하는 부분도 이 신이 사라진 원인으로 작용했을 거다. 전통적으로 “밴드를 하면 먹고살기 힘들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원인이었을 거다. 과거 인천은 여성 헤비메탈 밴드들이 인정받을 정도로 실력들이 다 우수했고 한때는 웬만한 서울 밴드들도 관교동에 연습실 차려놓고 모일 정도였는데, 너무 한꺼번에, 순식간에 무너진듯해서 아쉽다. 그래도 인천이 아직 전통이 남아있더라. [글래스톤베리]와 같은 공연 클럽도 있고, 아직 남아있는 헤비메탈 밴드들도 실력이 굉장히 좋다. 민/관이 협력해 클럽 문화를 살려보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다른 지자체에 비해 괜찮을 것 같다. 그 문화의 부활을 나도 기대하고 있다.

향후 특별한 계획이 있나?
사실 특별한 것은 없고, 바람이 있다면 건강하게 10년만 방송할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 꾸준하게 큰 문제없이 방송 유지하면 오래 갈 수도 있겠구나 싶다. 전문방송은 오래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경인방송]이 나와 잘 맞는 듯하다. 예전 선배들이 했던 것의 3분의 1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난 만족한다.

인천시민에게 남길 메시지가 있다면?
사실 인천으로 이사 오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할 정도로 이 도시에 매력을 느꼈고 사실 요즘도 인천으로 출퇴근을 하다보니 그런 느낌을 많이 받는다. 송도신도시 아파트 시세도 궁금하고. (웃음) 지금은 인천에 거주하진 않지만 언젠가는 살아보고 싶은 도시이고 헤비메탈의 흐름을 따라 인생을 살았던 내겐 인천이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라디오를 통해서 시민들과 자주 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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