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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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 이희인 여행가 겸 작가
  • 승인 2015.02.05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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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세계 책의 수도 인천 기획] 이희인의 <길 위의 책, 길 위의 맛> 3. 만주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 찾아간 곳 / 만주

- 읽은 책 / <백석시집>

    

“밍태 먹어요, 오늘 밍태 좋아요!”

주방 아주머니 억양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국을 몇 번 드나든 적 있다는 주인 여자의 억양은 그런대로 알겠는데 주방 아주머니의 말은 거칠고 쎘다. 바로 전에 “개(고기) 먹어요! 거 괜찮아요!” 하던 말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찬찬히 들은 뒤에야 ‘명태’ 얘기임을 알았다. 일단 아주머니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한 겨울 중국 동북3성 쪽을 여행하게 되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들어가 하얼빈, 쑹위안(松原) 등을 거쳐 지린(吉林)시까지 흘러 온 것이다. 그 땅을 여행하는 사이 어렵거나 막막한 일이 생기면 한글 간판의 조선족 식당이나 호텔을 찾아가는 것이 노하우 아닌 노하우가 되었다. 그러면 언어로 인한 곤란함을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만나는 조선족 사람들마다 친절하고 살갑게 대해주어 여행의 쓸쓸함도 해갈되었다. 그때마다 그들의 솜씨로 차려낸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차림표가 있긴 했지만 손님인 내게 이런 저런 걸 먹어보라고 (거의 윽박지르는 수준으로) 추천해줘 그것들을 주문했는데 대개 나쁘지 않았다. 쑹위안의 식당에서는 어찌나 허물없이 대하던지, 손님인 내 앞에 내온 음식을 자신이 먼저 한 점 먹어 보고는 “요리가 잘 됐네요!” 하는 데는 적이 당황하기까지 했다.
 


어느새 푸짐한 명태 찜이 내 앞에 놓였다. 크기는 어릴 적 먹던 것보다 훨씬 작은데 살피듬이 좋았고 그런 놈으로 3마리나 놓여있는 것 아닌가. 매콤한 고추장 같은 것으로 졸여낸 찜 맛은 일품이었다. 양념이 맵지 않게 배어 있으면서 흰 살이 두툼하게 입안을 채웠다. 맞아! 명태는 이런 맛이었어! 그러고 보니 요즘엔 명태를 예전만큼 많이 먹지 못한단 생각이 들었다. 옛날엔 명태가 정말이지, 명태만큼이나 흔했는데 말이다. 우리 바다의 수온이 지난 수십 년 사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명태는 자신들에게 맞는 환경을 찾아 북쪽 오오츠크 해나 베링 해로 올라갔다고 한다. 명태가 드물어지니 명태로 만든 음식들도 솜씨를 잃어가는 것일까, 요즘엔 어느 식당에서도 이렇게 맛있는 명태를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네 음식문화가 청결과 위생, 잔반 줄이기 쪽으로 고급화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 정성어린 손맛 같은 걸 잃은 건 아닌지 자문해볼 만했다.

명태는 중국에서는 ‘밍타이위’라 발음한다고도 하니 조선족 아줌마의 발음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몸집이 작은 대구’라는 뜻의 ‘샤쉬에’라고 더 많이 불린다 했다. 영어에도 명태를 일컫는 말이 따로 없고 ‘알래스카에서 잡히는 대구 Alaska pollack’라 한다니 명태를 우리처럼 살갑게 대접하는 나라, 민족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니 명태가 멀리 가지 말고 제 집 찾아 돌아오면 좋으련만. 고등어, 갈치와 더불어 우리네 소박했던 시절을 버티게 해준 명태. 그 명태가 만주의 조선족 식당에서 낯설게 다가온 건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여행 동안에도 내가 밟은 곳이 ‘만주(滿洲)’로 불리던 땅이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했다. 다녀와서 보니 거기가 만주였다. 그 땅이 얼마 전부터 자꾸만 나를 불렀다. 식민지 시대 시인 백석에 관한 글을 읽다가 그랬다. 1930년대 말 일제의 압제가 심해질 무렵 이 맑고 가난한 시인은 “만주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하며 조선을 떠났다고 했다. 백석뿐이랴. 시인 이육사, 윤동주의 얼굴도 떠올랐다. 육사가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고 말한 곳. 시인 동주가 나고 자란 땅. 무수한 독립운동가가 생사를 넘어 활동한 땅. 어쩐지 만주는 한겨울에 찾아야 마땅할 듯싶었다. 백석, 동주, 육사 모두 내겐 겨울 만주의 시인들이었다.

하얼빈의 추위는 끔찍했다. 보온이 뛰어난 재킷을 입고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온도계가 영하 23도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목도리며 옷으로 칭칭 감은 얼굴에서 바깥으로 살짝 내민 부분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하얼빈에서는 시 외곽에 자리한 731부대를 참관했다. 일명 마루타 부대. 사람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경악할 만한 범죄가 저질러진 장소다. 중고등학교 운동장 크기의 너른 공터에 2층 건물 하나가 전부인 731부대의 박물관을 돌며 전시물들을 보는 동안 내 피는 서서히 끓기 시작했다. 특히 1층 한 구석의 전시실. 당시 상황을 재현한 미니어처의 방이 있었다. 얼어붙은 한겨울에 실험 대상자를 얼음물에 빠뜨려 동상에 걸리게 한 뒤 망치로 무자비하게 두드렸다든가, 진공의 공간에 압력을 가해 사람을 터뜨려 죽인 모습, 산 사람을 마취 없이 해부한 실험, 탄저균, 페스트균, 매독균 등을 투여해 진행과정을 관찰한 실험 등 오래전 본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천인공노할 부대를 창설하고 이끈 도쿄대 의학부 출신의 이시이 중장은 일본 패망 뒤 생체실험 자료를 미국에 넘겨 면죄부를 받음은 물론 말년까지 행복한 여생을 살았다 하니 과연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얼빈을 떠나 찾은 곳은 지린 성 북부에 위치한 쑹위안이다. 거기 꽤 너른 호수가 있는데 한겨울 두꺼운 얼음을 깨고 전통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어로 작업이 장관이란 소릴 들었다. 늦은 밤 도착한 쑹위안은 어둡고 괴괴했다. 다행히 터미널 부근에 조선족 호텔을 발견해 들었고 친절한 주인 여자를 통해 이튿날 호수로 향할 차편도 마련할 수 있었다. 낯선 이방의 음습한 호텔 침대에서 벽을 보고 누워 있자니 말 못할 객창감이 엄습했다. 여행 중 틈틈이 읽은 백석의 시 구절이 꼭 내 마음만 같았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 이 흰 바람벽에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백석, ‘흰 바람 벽이 있어’에서
 

 


사위가 캄캄한 새벽에 출발한 택시가 1시간 반 가량을 달려서야 몽골식 텐트가 듬성듬성 눈에 들어오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갑자기 택시는 도로를 벗어나 꽁꽁 언 호수 안으로 돌진했다. 꽤 넓은 호수였다. 택시가 한참 달려서야 호수 한가운데 모인 어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보다 먼저 눈에 띈 건 서너 마리 말이 원을 그리며 작업을 하는 모습이었다. 얼음이 워낙 두꺼워 말과 기계의 힘으로 호수에 구멍을 내야 했던 것이다. 말의 갈기며 잔등의 털이 땀에 젖어 하얗게 서리가 낀 듯 얼어붙어 있었다. 줄잡아 2, 20여명이 함께 작업을 했다. 마침내 그물을 끌어올리는 시간. 어마어마하게 크고 긴 그물 역시 사람보다는 말의 힘에 의존해야 했다. 큰 얼음 구멍 속에서 긴 그물이 한참동안 끌어올려졌다. 안타깝게도 그물 안은 텅 비다시피 했다. 허탕을 쳤지만 사람들 얼굴은 그래도 밝았다. 뭐, 이럴 때도 있는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호수에서 쑹위안으로 돌아온 뒤 다시 길을 떠나 만주의 이 도시 저 마을들을 찾아 떠다녔다. 하나같이 꽁꽁 얼어붙은 동토의 땅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지린 성의 성도인 창춘(長春)이다. 조선을 넘어 중국과 아시아에까지 손을 뻗친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꼭두각시로 세운 괴뢰 정부 만주국의 수도가 창춘이다. 그때 이름은 신경(新京). 바로 이곳이 시인 백석이 시 백편을 가져오겠노라며 찾아와 머물렀던 곳이고 안수길, 최남선, 염상섭, 이태준 등 문인들도 찾은 곳이다. 문인들뿐이랴? 조선 독립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인 독립군들은 물론, 반대로 일본에 협력해 출세의 기회를 잡고자 이곳을 찾은 이들도 많다고 한다. 예전 어르신들이 ‘만주에서 개장사를 했다’는 식의 농담을 심심찮게 하신 걸 보면 1940년대 어간에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이 땅을 찾았는지 미뤄 짐작할 만했다.
 


창춘 역 부근에서 단단히 옷을 여민 채 옥수수며 군고구마, 먹거리를 파는 사람들을 보았다. 살을 에는 추위 때문이겠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쟀다. 그 위로 70여 년 전 거리의 모습이 그려졌다. 황량한 겨울 거리 위에서 나는 쓸쓸하고도 맑았던 시인인 백석과 동주, 육사들을 내내 떠올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도 눈이 푹푹 나린다’고 읊은 백석이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기도했던 시인 윤동주.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찾아올 밝고 의로운 세상을 꿈꾸던 육사의 단호한 음성도 자꾸만 내 안에서 ‘고조곤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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