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역사의 명맥을 지켜오다'
상태바
'인천 역사의 명맥을 지켜오다'
  • 김도연
  • 승인 2010.01.10 0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따라 발따라…인천新택리지 ②중구 신포동

 
 인천시 중구 신포동(新浦洞)은 중앙동 1~4가, 해안동 1~4가, 관동 1~3가, 항동 1~7가, 송학동 1~3가, 사동, 신생동,  답동 등 무려 25개 법정동을 포함한 거대 동이다.

 신포동의 본디 이름은 순 우리말로 '터진개'였다. 지금은 모두 매립돼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원래 신포동 지역이 바다에서 가까워 바다 쪽으로 터져 있고, 바닷물이 드나들었기에 생긴 이름이다.

 구한말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다가 1903년 부내면이 만들어질 때 '새로 번창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창동'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신창동은 1930년대 들어 '터진개'를 한자로 바꾼 '개포동'이나 일본식인 '화정'으로 불렸다. 광복 후인 1946년부터 '새롭게 발전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신포동으로 부르고 있다.

 신포동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 있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중앙동 일대 건물들과 인천 최고의 재래시장 가운데 하나인 신포시장, 신포 문화의 거리, 그리고 연안부두로 불리는 항동 일대가 그 곳이다.

 독특한 양식의 근대 은행 건축물들

구)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

 신포동은 인천에서 가장 많은 근대식 건축물들이 위치한 곳이다. 정확히 말하면 신포동 내 법정동인 중앙동과 송학동 일대에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구)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 (구)인천일본제58은행지점, (구)인천일본18호은행지점, (구)제물포구락부, 인천우체국, 홍예문 등이다.

 주요 근대식 은행 건물들은 중구청 앞 해안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

 인천시지정유형문화재 중 하나인 (구)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은 1883년 11월 일본의 제일국립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출발해 1909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창립되면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바뀌었다. 언뜻 보면 작은 중앙청 건물과 비슷해 보이는 건물은 중앙에 돔을 설치한 석조 단층의 후기 르네상스 양식을 하고 있다.

 (구)58은행은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58은행의 인천지점으로 1892년 7월에 개점했다가 이후 제3은행 등 군소은행과 합병해 야스다은행으로 바뀌었다. 1939년 신축된 이 건물은 현재 중구 요식업조합에서 쓰고 있다. 프랑스식 르네상스 양식의 2층 건물로 2중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붕구조와 2층 발코니가 이국적이다.

 (구)18은행은 일본이 우리나라 금융을 지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운 곳으로, 1890년 준공돼 그해 10월에 문을 열었다. 단층으로 고전적인 장식의 절충주의 양식을 하고 있어 역시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지금은 근대건축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인천에서 일본이 많은 은행의 문을 연 이유는 개항 후 각종 상거래로 일본인들의 돈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때 '융단폭격'으로 인천은 폐허가 되다시피했지만, 그나마 일본 은행과 인천우체국 등이 남아 있는 까닭은 그 건물들을 석조로 지은 탓이다.   

 서울에서 관광차 중구를 찾았다는 김수남(58)씨는 "일본식 건물들이 오히려 지금 것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워 놀랐다"며 "일제 침탈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마음 아프지만 개항 시점에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진 건물들이 들어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으니 잘 보존됐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신포동 일대 근대 건축물들을 돌며 카메라에 모습을 담던 그는 교육적 차원에서라도 이 일대 근대 건축물들이 잘 있어주기를 희망했다.

 다양한 형태의 근대 건축물들

구)제물포구락부 

 중앙동에 위치한 근대식 은행 건물들을 뒤로 하고 지금의 중구청 뒤 인천문화원 길을 따라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편(송학동 1가 7번지)에 있는 (구)제물포구락부를 만난다.

 1901년 6월에 세워진 이 건물은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 독일,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영어 '클럽'의 일본식 발음인 '구락부'이다.

 벽돌로 된 2층 건물로 당시에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장 등이 있었으며 따로 테니스 코트도 마련돼 있었다고 한다. 1914년 조계제도가 철폐되면서 일본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가 들어서기도 했고, 광복 후에는 미군의 장교클럽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1953년부터 1990년까지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쓰다가 이후 인천문화원에서 사용했다.

 언덕을 넘어 자유공원을 뒤로 하고 동인천역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차량 1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작은 터널이 나온다. 이곳이 송학동 지역의 또다른 근대 건축물 홍예문(虹霓門)이다.

 홍예문이란 이름은 윗머리가 무지개 형상을 하고 있는 문을 말하는데, 지금은 이 굴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덩굴식물이 수를 놓아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이면 마치 서양의 작은 성 입구를 보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곳이다.
 
 홍예문 2길을 따라 버스가 지나다니는 제물량 길까지 내려오면 근대 문화의 향기를 담은 인천우체국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인천우체국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해인 1884년에 우정총국이 설립된 그해 11월 17일 우정총국 인천분국으로 문을 열었다. 서울보다 먼저 우편업무가 개시되면서 인천우체국은 사실상 우리나라 우정업무의 '효시'로 떠올랐다. 현존하는 인천우체국은 1923년에 신축된 것으로, 서양과 동양의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다.

 관공서가 있던 옛 인천의 중심지

지금의 중구청 건물은 1984년까지 인천시청이 들어섰던 곳이다.

 신포동의 법정동 가운데 관동(館洞)이란 곳이 있다. 관공서가 모여 있는 지역이란 뜻에서 관동이란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지금의 중구청 주변 지역을 일컫는 관동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한 뒤 인천으로 들어온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지계의 중심지다.

 각국 지계가 없어진 1912년부터 주한 인천 일본영사관, 인천 거류민단 사무소, 경찰서, 우체국 등이 모두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광복 후인 1946년 1월 일본식 동네 이름을 새로 바꾸어 지을 때 관청이 많이 모여 있던 곳이라는 뜻에서 관동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거나 시내 다른 데로 옮겨져 그 이름이 무색해졌다.

 중구청 앞 중앙동경로당 유흥수 회장은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인천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관동을 가자고 하면 택시 기사가 '어휴 좋은 동네에 사시네요'라고 할 정도로 관동은 대단한 동네였다"고 회고한다. 유 회장의 말처럼 관동은 광복 이전에는 인천부청, 광복 후에는 인천시청이 자리했던 지역이어서 인천의 중심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의 중구청은 과거 인천시청 청사였다. 지금의 규모와 비교하면 시청 자리였다고 상상하기 어렵지만, 1984년까지 인천시청이 있었다. 인천시청이 남동구 구월동으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1965년 신축된 지금의 신포동주민센터가 중구청 청사였다.

 몇 달 전 신포동으로 발령을 받아 온 한 여직원은 "이곳이 구청사였다는데, 이렇게 작고 좁은 곳에서 구청 규모의 행정이 가능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다"며 믿기 어려운 표정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관동지역에선 '옛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유흥수 회장은 "시청이 이곳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지금의 중구청 앞쪽으로는 음식점들과 다방 등 많은 점포가 성행했으나 시청이 구월동으로 옮겨가며 상권이 죽은 상태"라며 "당시에는 유동인구가 많았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나이 든 사람들만 거주하는 동네로 아주 작아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유 회장의 말처럼 지금 관동지역에는 관광객들만 지나다닐 정도로 한적한 곳으로 변모했다.

 인천을 대표하는 재래시장

인천의 대표 재래시장 신포시장

 중구청 앞길을 따라 답동 사거리 방향으로 10분 가량 걸어가다 보면 재래시장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인천에서 부평시장과 함께 내로라하는 신포시장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닭강정과 통만두 등으로 인식돼 있지만, 신포시장은 이미 19세기 말에 형성된 곳이다.  신포동에 있던 중국인 푸성귀전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시장 내 쉼터에는 중국인이 개설한 푸성귀전을 형상화한 조각물이 놓여 있기도 하다. 당시 푸성귀전은 배추, 무, 양파, 토마토, 피망 당근 등 주로 야채를 파는 시장이었다고 한다.
 
 개항 당시 신포동은 정치, 경제, 금융,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신포동에 없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고 할 만큼 신포동에서 개항장을 통해 온갖 상품이 들어왔고, 그것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신포시장은 어시장과 야채시장으로 출발해 1927년 공설 제1일용품시장과 공설 제2일용품시장으로 됐다가 광복 이후 지금의 전통시장을 유지하고 있다.

 재래시장이 침체돼 있긴 하지만, 지금도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닭강정을 사려는 인파로 줄을 이을 정도로 신포시장에는 활기가 넘친다. 괜찮은 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70년대부터는 '신포만두'와 쫄면으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고, 요즘에는 닭강정이 아주 유명하다.    

 인천 천주교의 상징 답동 성당

인천 천주교의 상징 답동성당 본당 모습

 신포시장 앞 우현로 길 건너 편에는 인천 천주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답동성당이 우뚝 서 있다.

 인천에서 천주교 활동이 시작된 때는 고종 26년인 1889년부터로 전해진다. 1889년 7월 1일 빌렘 신부가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답동 언덕에 성당을 지었고, 후임 르비엘 신부 때인 1891년에 건물 1동을 건축해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894년 5월 코스트 신부와 샤르즈뵈프 신부가 설계한 것으로, 1895년 8월에 공사에 들어가 1년 후에 종탑과 벽돌 공사를 마치고 2년 후인 1897년에 완공됐다. 당시 종탑은 인천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교회의 상징물이었다고 한다.
 
 그 후 제4대 드뇌 신부가 1934년 4월에 성당 개축 공사를 벌여 3년 2개월만인 1937년 6월 30일 준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당은 이후 치자렛 신부가 개축 공사를 하면서 로마네스크식으로 변했다.

 답동성당은 근대 건축사의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1981년 9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됐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과 높은 천정, 그리고 파이프 오르간에서 오랜 역사와 권위가 느껴지는 본당을 만날 수 있다.
 
 "평일에는 150여 명이 미사 등을 위해 방문하고 주말에는 1200명 이상이 찾는다"는 성당 사무실 직원의 말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인천 천주교의 상징적 힘이 느껴진다.

여객터미널과 어시장의 연안부두

인근 도서지역으로 가기 위한 정거장 연안여객터미널

 신포동의 법정동 가운데 한 곳이 항동이다. 항동에는 유행가 노래 제목으로 잘 알려진 연안부두가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포시장 앞 쪽에서 시내버스 12번이나 24번을 타면 연안부두로 갈 수 있다.

 20여분을 가면 연안여객터미널과 제1 국제여객터미널을 만난다. 1995년부터 운영을 시작한 연안여객터미널은 연평, 백령, 덕적 등 인천 앞바다 섬들을 왕래하는 선박을 탈 수 있는 곳이다.

 여객터미널 운항관리과 관계자는 "12개 항로에 15척의 배가 하루 44차례 운항한다"며 “이곳은 인천의 주요 도서지역을 가려는 관광객과 지역 주민들의 정거장인 셈이다"라고 말했다.

 연안여객터미널 바로 옆에는 제1국제여객터미널이 있다. 2000년에 운영을 시작한 이곳은 칭다오, 텐진 등 중국의 주요 지역을 오가는 배편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 여객터미널보다 연안부두를 떠올리면서 가장 먼저 생각하는 곳이 어시장으로 불리는 인천종합어시장이다.

 인천종합어시장의 역사는 꽤 길다. 인천어시장사업협동조합 박천 상무이사에 따르면 1902년 신포동 일원에서 시작된 어시장은 1929~1931년 북성동 해안가로 이전해 하인천 어시장 시대를 열어갔고, 이후 1975년 12월 20일 항동에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서울의 노량진, 부산의 자갈치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어시장으로 꼽히는 이곳에는 현재 500여개 점포에서 선어, 활어, 건어물, 조개류, 냉동수산물, 젓갈 등을 판매한다. 수산물은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온갖 생선을 판다. 거래량으로 치면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평일에는 4천~5천명이, 주말에는 3만~4만명이 찾는다고 하니 가히 국내 최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매일 새벽 4시 30분부터 문을 열어 밤 9시까지 불을 밝히는 이곳은 연안부두란 이름을 대표하는 장소이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수산물 재래시장인 인천종합어시장

 이처럼 신포동은 근대문화유산과 재래시장, 어시장 등이 자리 잡아 사람들에게 활기를 되찾게 한다. 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삶의 애환, 그 언저리에서 맛보는 인생의 굴곡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