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피는 벚꽃 장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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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피는 벚꽃 장봉도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5.04.2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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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시민기자의 라이딩 코리아] 장봉도~신도~시도~모도 자전거라이딩 코스 최고

장봉도 인어상을 만지면 무병장수하고 아들을 낳는다!


 

장봉도는 면적 7㎢, 해안선길이 22.5㎞이다. 1999년 12월 현재 306세대에 89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에서 서쪽으로 21km, 강화도(江華島)에서 남쪽으로 6.3km 해상에 위치하며, 부근에 모도(茅島)·시도(矢島)·신도(信島) 등이 있다. 지명은 섬의 형태가 길고 산봉우리가 많은 데에서 유래하였다.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강화현(江華縣)의 속현인 진강현(鎭江顯)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는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에 속하였고, 1717년 수군의 진(鎭)이 설치되어 교동의 통어영(統禦營)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어 북도면에 속하였다가 1973년 7월 1일 부천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된 후,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섬은 북쪽을 향하여 느리게 만곡을 이루며, 해안 곳곳에 암석 갑각(岬角)이 돌출한데다 해식애(海蝕崖)가 발달하여 절경을 이루는 곳이 많다. 동쪽과 서쪽의 양안(兩岸)을 제외하고는 넓은 간석지로 둘러싸였으며, 구릉성 산지가 동서로 뻗어 섬의 골격을 이루고, 중앙에 평지가 있다.

일대에 천연기념물 제360호와 제361호로 지정된 노랑부리백로와 괭이갈매기가 집단으로 서식하며, 전체적으로 소나무숲이 무성하다. 포도와 김·백합·동죽·새우류·바지락 등이 많이 난다. 김양식이 활발하여 높은 소득을 올렸으나, 인근의 인천국제공항 건설로 인해 중단되었다. 고유의 민속놀이로 띠뱃놀이가 전해진다.

인천시 옹진군 장봉도에 만들어져 있는 인어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여오고 있다. 옛날 최씨성을 가진 어부는 이곳 장봉도에서 고기를 잡아서 생활을 하는 어부였는데, 어느때부터인지는 몰라도 흉어가 계속되고 매일같이 그물을 올려보지만 잡히는 고기는 한마리도 없어서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인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물을 끌어올리던 최씨어부는 그물이 올려지는 느낌이 아주 큰 고기가 걸린 듯 하였다.


묵직한 그물을 끌어올린 어부는 기절초풍을 하고 만다. 그물 안에 걸린 것의 윗몸이 완연한 사람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말 아름다운 여인으로,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살려달라는 애원하듯 바라보는 그 사람물고기가 무척 불쌍하게 보여 최씨 어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바다로 되돌려 보내준다.

그리고 이튿날도 언제나처럼 그물을 올린 어부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그물 가득히 들어있는 것이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날 하루 뿐이 아니라 그 다음날, 다음날 계속 그물가득 고기가 잡히는 것이었다. 최씨 어부는 필시 놓아준 인어가 자신을 살려준 보답으로 물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해준 것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장봉도 인어상을 만지면?100세까지 무병장수 건강할 수 있고,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여 인어상의 ?만지고 있다.특히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어상의 어느 신체부위는 너무 많이 만져 손기름이 묻어, 반질 반질한 윤기가 흐른다.

신도는 면적 6.92㎢, 해안선길이 16.1km이다. 1999년 12월 말 현재 165세대에 41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광역시에서 북서쪽으로 14km, 강화도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최고점은 구봉산(九峰山:178.4m)이다. 지명은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성실하고 순박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진짜 소금을 생산하는 곳이라 하여 진염(眞鹽)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와 유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이래로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특수마(特殊馬)를 사육하던 국영 목장으로 이용되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 때 강화군 제도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부천군 북도면으로 편입되면서 1922년 11월 5일 모도(茅島)에 있던 면사무소를 신도 구로지(九老池)로 이전하였다. 1971년 7월 1일 부천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구봉산 정상에서는 영종도(永宗島) 등 황해의 섬들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으며, 1992년 시도(矢島)까지 길이 579m의 연도교(連島橋)가 설치되었다. 섬의 북쪽과 남쪽에 2개의 산지가 솟아 있고, 남서부에 큰 만입(灣入)이 있으며, 섬 주위를 넓은 간석지가 둘러싸고 있다.

경지면적이 비교적 넓어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해변에서는 망둥이·맛조개 등이 많이 잡히며, 당도가 뛰어난 포도가 재배된다. 동쪽에 평촌(坪村), 남서쪽에 고남리(皐南里), 남서쪽 해안에 구로지(九老池) 등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 어업기지 구실을 한다.

시도의 면적은 2.46㎢, 해안선길이 10.9km, 최고점 104m이다. 1999년 12월 말 현재 110세대에 23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살섬이라고도 한다. 강화도 남쪽 5km 해상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으로 300m 거리에 신도(信島)와 띠섬[芽島]이 있고, 서쪽으로 3km 지점에 장봉도(長峰島)가 있다. 지명은 화살섬이라는 뜻으로, 고려 말에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이끄는 군대가 강화도 마니산 기슭에서 이 섬을 과녁삼아 활쏘기 연습을 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조개무지와 출토된 토기 등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에 속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 때 강화군 제도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22년 11월 5일 모도(茅島)에 있던 북도면사무소를 신도 구로지(九老池)로 이전하였다가 1942년 지역 실정 등을 감안하여 시도로 다시 옮겼다. 1971년 7월 1일 부천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섬 주변에는 넓은 간석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과 북쪽 해안과 중앙부의 서쪽에는 암석해안이 발달하였으며, 섬의 남쪽과 북쪽에는 낮은 구릉이 있다. 중앙부는 낮은 안부(鞍部)를 이루어 평지가 넓게 발달하였다.

전반적으로 상수리나무군(群)이 우세하나 산지는 소나무와 참나무의 2차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민들의 생업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이고, 지역 특산물로 포도가 유명하며, 넓은 개펄에서 맛조개·낙지 등이 많이 난다. 1992년 시도와 신도를 잇는 길이 579m의 연도교(連島橋)가 설치되었다.

모도는 면적 810㎡이며, 인천광역시에서 북서쪽으로 14㎞ 떨어져 있다. 행정구역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모도리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에서 조선 말기까지 강화도호부에 속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 때 강화군 제도면에 속하였고, 1993년 7월 옹진군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3월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섬의 명칭은 이 섬의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 고기는 잡히지 않고 띠[茅]만 걸린 데서 유래되었다. 신도·시도와 더불어 삼형제 섬으로 불리며, 세 섬은 연도교(連島橋)로 이어진다.

삼목선착장에서 신도까지 차량을 적재할 수 있는 선박이 운항되며, 영종도에서 장봉도를 거쳐 신도로 접근할 수도 있다. 조각가 이일호가 조성한 배미꾸미조각공원이 알려져 있으며, 특산물로는 당도가 높은 포도와 자연산 굴이 유명하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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