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같지 않은 아비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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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같지 않은 아비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이한수 선생님
  • 승인 2015.04.29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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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선생님의 교실밖 감성교육] 제24회
 
요즘 들어 아버지의 양육 역할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이가 단둘이 여행을 떠나 혈육의 정을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존재 의미가 의심받고 있는 세태를 반영한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이 시대 아버지는 매일 늦게 귀가하고 늘 피곤하며 말이 잘 안 통하는 딴 나라 사람인 게 일반적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직장 일은 합리성과 효율성을 원리로 돌아가며 냉철한 판단을 위해 늘 이성적으로 사고해야만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교감은 부차적인 문제이지요. 아이 양육은 그렇게 해서 되지 않습니다. 아이는 사업성과를 내기 위해 관리해야 할 직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태가 워낙 적자생존을 위한 피 말리는 경쟁이 만연하다 보니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노심초사 경쟁력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자식 사이도 사업 관계처럼 변질되고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식은 아버지를 직장 상사처럼 불편하게 여기게 마련이지요.
 
요즘은 엄마들도 아이들 눈에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직장일과 집안일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이 자식의 장래에 대한 걱정과 집착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은 엄마한테서도 정서적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고 감성이 메마를 수밖에 없지요. 요즘 애들 너무 불쌍합니다. 한편으로는 합리성을 척도로 한 경쟁과 목표 지향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이니 미약한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적자생존 자연도태가 자연의 섭리이니 이를 거역하는 건 철부지 한때의 낭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못 경륜가연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적자생존의 주창자 ‘찰스 다윈’마저도 개체와 종족의 보존에 ‘협동’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봤답니다. 자유 경쟁 이데올로기가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시켰다고 합니다. 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현실이라며 아이들을 겁박한 적이 있거든요. 아집에 사로잡혀 진실을 호도한 꼬락서니가 참담할 지경입니다. 여기에, 경쟁에서 승리하여 남부러울 게 없다 싶은 아비가 실상은 제 자식 하나도 품을 수도 없는 가난한 가슴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아비들이 이토록 정서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구나,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큼 현대 사회의 아버지 역할 문제를 탁월한 감성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가도 없을 겁니다. 어른이 된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걸어도 걸어도]와 자식들 다 키우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아버지의 쓸쓸한 말년을 그리고 있는 [엔딩 노트]가 특히 기억에 남는데,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고 ‘고레에다’ 감독이 아버지의 감성을 형상화하는 데에는 타의 주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작가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어린 자식을 기르며 아버지의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 반성하게 만드는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는 작품입니다. 대여섯 살 어린 아이와 아버지 사이의 공감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단연 으뜸이라고 봅니다.
 

영화에서 두 아이는 대비되는 가정환경에서 자랍니다. ‘케이타’의 아버지는 일류 대기업 중역으로 남부러울 게 없는 멋진 사람입니다. ‘류세이’의 아버지는 변두리 구멍가게로 근근이 먹고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너무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 같지만 어느 아들이 더 잘 자랄까요? 누가 더 행복할까요? ‘케이타’는 ‘류세이’를 부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 집이 더 잘 산다고 우쭐댈 수도 있겠네요. ‘류세이’는 자기 아버지가 못난 사람이라고 창피해 할 수도 있겠지요. 하루 종일 집에서 같이 먹고 자고 놀고 하니 아버지가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인 걸 자랑스러워할까요. 어느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까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이 두 아이가 사실은 태어나자마자 신생아실에서 뒤바뀐 사실을 여섯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면서 두 집안은 끔찍한 혼돈 상태에 빠집니다. 어찌 보면 뛰는 가슴으로 자식을 안으면서 진정(眞情)한 아버지가 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케이타’ 아버지의 심리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계층적으로 확연히 대비되는 두 집 아이 아버지의 양육 태도가 대비되어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부자 아버지의 아이가 유복할 것이라고 짐작을 하지만 영화는 그런 상식에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부자 집 아이가 아버지가 바뀌면서 가난한 집으로 가 살게 되고,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아버지를 더 좋아하게 됩니다. 대기업 중역에다 대도시 중심가 고층 아파트에 살며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잘나가는 아버지가 그야말로 볼품없는 구멍가게 아저씨보다 못한 아버지일 수 있다는 걸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공감하게 됩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참다운 인성 발달과는 거리가 먼 찌든 교육으로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가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고 그로 인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들 하지만 인간의 내면과 자연 환경은 파괴되고 있으며 삶의 질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위기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게 된 데에는, 따지고 보면 공동 육아를 위한 협력 과정에서 길러진 공감 능력 덕분이며,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금의 위기는 공감 능력의 위축, 모성(母性)의 상실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생태여성주의) 언설에 귀 기울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냥감을 노리는 수컷의 획득 지향으로는 이 비인간적 문화를 더 악화시킬 뿐이며 새끼를 돌보기 위해 주변 환경에 민감해지도록 진화한 모성(母性)의 공감 능력만이 우리의 미래를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문명사적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인성여자고등학교 이한수 선생님
블로그 http://blog.daum.net/2ha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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