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흘리는 아버지 - 조창인 장편소설 [가시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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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흘리는 아버지 - 조창인 장편소설 [가시고기]
  • 이한수 선생님
  • 승인 2015.05.0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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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선생님의 교실밖 감성교육] 제25회


시비를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감성은 주로 자애로운 엄마의 것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비판적 지성은 정의로운 아버지의 몫이라는 게 관습처럼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공감 능력으로 자식을 잘 품어주고, 아버지는 냉정해 보이는 거리두기 비평 능력으로 자식을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치는 게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눈물이 많아야 사랑받으며 남자는 평생 세 번 말고는 절대로 울면 안 된다는 문화가 알게 모르게 우리 감성을 틀 지우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공감의 시대에 남자의 감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공감 부재의 남성성이 우리 삶을 삭막하게 만든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는 만큼 남성의 정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눈물 찔찔 흘리는 남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성애(父性愛)를 그린 작품으로 [가시고기]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수컷이 제 몸을 먹이로 주기까지 하면서 새끼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가시고기 닮은 아버지 이야기로 널리 읽힌 작품입니다. 한결같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고 하네요. 문학 비평을 공부한 사람은 이런 신파극에 몰입되어 눈물을 짜거나 하면 안 되는 법인데 솔직히 저는 읽는 내내 눈시울이 시큰거렸습니다. 남자가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가시고기]를 읽으면 어떤 면에서 좋을까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슬픈 이야기가 우리 정서에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감정이입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인성(人性)의 발달과 사회 진보에 각각 어떤 기여를 하는지 규명하려는 시도는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브레이트’의 비평 이론은 카타르시스에 대해 부정적으로 논설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로 보일 수 있는데 전 이 문제를 좀 단순화하여 심리적 접근과 사회적 접근으로 양분하여 설명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에게만 잘 해주는 사람이 좋습니까? 아니면 만민을 위해 일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좋습니까? 저는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브레이트’의 비평 관점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인 저한테는 학생을 가르치면서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실천적으로 기여하는 선생님보다 나에게 남다른 정성을 기울이는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논리적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비판 정신과 실천적 참여와는 거리를 둬야 합니다. 내가 맡은 학생이 성적이 오르도록 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제 자식과 학생만을 잘 가르치려고 하는 풍조는 그 자식과 학생들의 미래를 점점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남보다 잘 살기 위해 저마다 경쟁에 충실하면 다 잘 살게 될까요? 권력자는 힘 안 들이고 백성을 통제 관리할 수 있게 되고 힘없는 백성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점점 더 고달파지는 게 아닐까요.

교육을 예로 들어 설명했지만 문화 전반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봅니다. 대중은 당장 듣기 좋은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극중 인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대리만족하는 심리는 누군가 나한테만 특별히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어린 학생들의 심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중에 영합하는 대중문화는 결국 대중을 더 나쁜 사회적 조건으로 몰아넣을 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브레이트’는 바로 이런 점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객이 극적 상황에 몰입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이런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예술 작품을 아름답다고 평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저는 ‘브레이트’의 비평적 관점에 대해 많이 공감하는 편입니다. 따라서 무턱대고 몰입하여 울고 웃고 하는 건 어떻게 보면 추한 일일 수 있다는 겁니다. [가시고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도 되는지 속으로 찜찜해 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작품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정서 공감에 유효한 작품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읽어나가면서 인물 간의 갈등이 너무 뻔하고 눈물샘만 자극하는 신파극이 아닌가 싶기도 했으며 복잡한 이 시대에 이런 작품이 의미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시고기]의 시인 아빠는 너무 착한 사람입니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너무 나쁜 사람입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을 너무 쉽게 버렸고 제 영욕을 위해 자식의 재능을 이용하는 듯한 뻔뻔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으니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이럴 수 있을까요? 사람 관계라는 게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쁜 편과 좋은 편으로 갈릴 수 있을까요? 백혈병에 걸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아비 혼자 갖은 고생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치르고 자식을 살려내게 된다는 이야기 전개는 가슴 뭉클하긴 하지만 왠지 이 세상 일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오직 우리 마음 씀씀이가 순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삶이 고달프고 누추한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천상 세계의 천사와 같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으로 우리 삶은 회복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소설이 독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해서 좀 불편했습니다.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대는 마음 씀씀이가 가장 큰 행복 조건이라고 널리 설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내가 먹고 살만하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염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물질이 만능인 시대에 진정한 행복이란,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이기심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천사 같은 마음의 구체적 형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감히 이 작품을 추천합니다. 그냥 착하기만 해서 살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살아남기 위해 한없이 뻔뻔해진다고 제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란 걸 말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삶의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다 참다운 삶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만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가시고기]는 비정한 이 시대에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자식의 생존을 위해 모성마저도 접어야 하는 살벌한 야만의 시대에 부성애가 웬 말이냐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치달아 우리 삶이 이렇게 피폐해지지 않았느냐 하는 물음에는 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막막한 건 부인할 수 없지 않습니까. 생산성 향상을 위한 무한 경쟁,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으로 우리 삶은 보다 행복해진 것인가요. ‘무조건적 소모’만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한 ‘바타이유’의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요모조모 따져 챙겨서 넉넉해지는 게 아니라 헌신과 무아(無我)로 진정한 생(生)이 회복될 수 있다는 역설을 거듭 되새겨야겠습니다.


인성여자고등학교 이한수 선생님
블로그 http://blog.daum.net/2ha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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