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 머릿속에 외워 그리는 동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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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 머릿속에 외워 그리는 동양화"
  • 강영희 임시기자단
  • 승인 2015.06.25 15: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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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당 김기순 작품전, 30일까지 인천여성문화회관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작은 두루마리 족자 하나를 건넨다. 동양화에서 으레 보아왔던 꽃 그림이었다. 낙관뿐 아니라 그 위에 평범한 고무인까지 어울리지 않게 찍혀있어 좀 무심히 보고 접었는데 친구의 한마디. “니 같어. 잘 포장을 못해서 그 가치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너무 아쉽고 안타까워!”
 
서툰 초기 습작부터 근 20여년에 이르는 작업이 제대로 된 액자도 없이 걸리고, 만원 이만 원에, 큰 작품도 3만원이면 살 수 있단다. 작품이 빠지면 다시 걸리고, 다시 걸린단다. 선생님이 아프신 와중에 당신 작품을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려 하시는 것 같다 한다. 거저 주려 하는데 족자 값이나 받는 걸로 친다는 거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전시
<나의 인생 희노애락喜怒哀樂>

 
“그림이 많네요?” 라고 말씀드리니 “내 생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하는 전시예요” 하신다. 고무인이 그림의 여운을 해치는 것 같아 아쉬움을 표했더니 몸도 많이 아프고, 손도 많이 떨려 세필로 이름 석 자 적는 게 힘들어서 고무인도 자녀들에게 찍으라고 하셨단다. 낙관이 그림의 화룡점정이라 알고 있는데 당신 말씀을 듣고 나니 괜스레 가슴이 저릿해왔다.
 
사람들과 나눠 쓰라며 부채 몇 개를 가져가라 하신다. 그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떼어본 부채에는 소박한 그림과 함께 고무인으로 찍혀있는 한마디 ‘나 젊어 너였고, 너 늙어 나 이니라’ 병든 몸의 82세 노 작가의 허무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따뜻한 미소와 겸손하고 소박한 말투로 사람들을 대하시며 이렇게 거저 작품을 나누시는 모습 속에 해탈(解脫)이나 초월(超越), 당신 생生을 간소히 하고 정리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라만상을 다 기억해뒀다가 그걸 그리는 거야
보고 그리는 건 모방이야

 
“어떻게 그림을 시작하셨어요?” 하고 여쭈었더니 당신의 짧지 않은 그림 인생이 이어진다. 용현초, 경인여상 등 초중고 교사생활 40여년을 하시다가 명예퇴직을 하고 손주를 보다가 무료하셔서 61세의 나이로 평소 해보고 싶었던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내 그림 선생님이 이정이라고 부평에 화실이 있는데 거기서 배웠어. 그때가 47-8세쯤 되셨던 걸로 기억해. 나보다 어린 선생이었지. 지금 육십대 후반인데 ... 그러고 보니 선생님한테 연락도 못하고 전시를 하네, 아이고 ...
 
그림선생이 동양화는 삼라만상을 머릿속에 외워 그려야 한다고 하셨어. 보고 그리는 건 모방이라고 .. 요즘 사람들은 사진 찍어서 그거 그리잖아? 동양화는 그러면 안 된다고, 다 기억해뒀다가 붓을 들고 머릿속에서 끄집어 내 바로 그리는 거라고 ... 나도 다 외워서 그리는 거야. 보고 그리지 않아.”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다. 웃으실 때는 소녀같이 수줍어하셨다. 불편한 몸으로 몇 번의 촬영요청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전시장에서 한없이 부드럽고 따듯하며 여유롭게 느껴졌던 당신을 사진을 정리하며 다시 뵈니 꼭 다문 입술, 흔들림 없는 눈동자, 아픈 몸에도 곧게 세운 허리, 곱게 접은 손에서 단호함, 단단함, 견고함, 강인함을 느꼈다.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

 
보러 와줘서 고맙다며 그림을 하나 골라서 가져가라 하신다. 아니라고 했는데도 가져가라 하시니 많은 작품들 속에서 슬그머니 하나 고르는데 파랑새 두 마리가 있는 족자를 잡으니 “그건 어느 노부부가 사겠다고 한거야. 아파서 못 온데. 오면 주려구... 전시 끝나기 전에 와야 하는데 ... ”
 
석류 액자를 손짓하시며 가져가라 하신다. 차마 그냥 가져올 수 없어 족자 몇 개를 골라 구입했더니 벽에 붙어있는 부채 마음에 드는 거 가져가 나누란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몇 개 떼었는데 노란꽃이 눈에 들어오기에 쳐다봤더니 더 가져가라신다. 그걸 떼어내면서, 액자를 들고 배다리로 향하면서 괜한 욕심에 슬쩍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무리 할 수 있을지, 예술은 뭐고, 문화는 뭐고, 나는 무엇일지 답도 없는 질문에 다시 나를 세워두게 된다.
 

 <어느 노부부를 위한 선물>

 

※ 혜인당 惠仁堂 김기순
주로 문인화, 한국화, 사군자 및 산수화, 인물화, 풍경화 등을 그림. 제1회 인천미술전람회 특선, 제6·7·8 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제22회 대한민국서화예술대전 입선 등의 수상.
 
※ 혜인당 惠仁堂 김기순 작품전 <나의 인생 희노애락>은 오는 30일까지 인천여성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작품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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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2015-06-26 19:11:10
다시 보이네요 선생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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