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새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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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새해를 위하여
  • 윤현위
  • 승인 2016.01.0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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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윤현위 / 자유기고가, 지리학박사


어김없이 새해가 다가왔다. 늘 그렇듯 정동진 가는 길은 교통정체로 꽉 막히고 종로3가부터 북적거렸을 종각 일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을 하고 연인들은 입맞춤을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다짐으로 새해를 맞이했을 것이다. 허나 이들은 사실 전체 국민들 중에 아주 소수다. 꼭 그런데 가지 않고 전국의 수많은 술집에서 술을 먹었을 사람들을 합쳐도 작게나마 이벤트를 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다수라기 보기 어렵다.

대부분은 묵묵히 아마도 여전히 전과 다르지 않게 피곤한 상태에서 새해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싶다. 삶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노동개혁이라고 부르고 한쪽에서는 노동개악이라고 부르는 법안이 통과됐다. 기간을 두고 격론이 오가지만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건 모두 아실게다.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공공부분이던 민간부분이던 결국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 늘어날 것이다. 정규직이 갖는 소속감과 안정감보다 더 처절하고 강도 높게 일할 각오가 되어 있는 예비비정규직들이 지금은 넘쳐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면 결국 노동조건을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야근수당 없는 야근이 늘어난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니 손학규 더민주당 고문이 내세웠던 ‘저녁이 있는 삶’은 어디 다른 나라에서나 가능할 것만 같다. 야근수당이 있으면서 저녁이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될까? 공무원들은 한달에 56시간까지 수당을 받고 야근을 할 수 있다. 물론 민간기업에 비해서 기본급이 적기 때문에 무조건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균적은 삶보단 낫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공무원, 공사, 공단, 중고등학교의 교사, 대학교수와 교직원을 제외하고 현재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 중에서도 임용된지 5년 이내의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근속 20년 이상 이후에 보장되던 공무원연금을 온전히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20대와 65세 이상의 사람들은 1인가구의 비율이 높고, 전세난을 언급 하는게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의 수준의 주거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얼마전 장하성 교수의 말처럼 지금의 20-30대는 전후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못 살 확률이 높은 사람들이 되었다. 반대로 지금의 부모세대들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음으로 자식에게 버려질 가능성이 높은 세대가 되었다. 이러니 헬조선이니 금수저니 하는 말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사실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기본적인 먹고 사는 일이 팍팍해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회현실과 정치상황에 무관심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힘차게 외친다고 한들, 너희만 힘들지 않다며 외면하고 지나칠 것이기 때문이다. 몇 개월 단위로 계약을 연장하는 야근에 지친 직장인이 다른 노조의 파업이나 사회이슈에 큰 관심을 두기 어렵다. 결혼과 출산에 접근하기 어려워 인구가 줄어들 위협은 미래의 위협이 아니라 현재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게 그 증거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러는 사이에 교과서가 국정화됐고, 최근엔 위안부 문제가 과거 65년의 한일외교정상화의 데자뷰처럼 지나갔다. 대학생들이 길거리로 나왔고, 많은 반발이 SNS에 퍼지고 있지만 전국민적인 분노로 모아진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지쳐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를 잊은 국민이 된 것이 아니라 삶에 처한 상황이 이 상황을 잊게 만든 것 같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열광하지만 송곳의 시청률이 낮았던 것도 나는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비약일까?

두 가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첫 번째, 2013년 철도민영화총파업 당시 철도노조의 부위원장이 종로2가의 조계사에 은신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성탄전야였고 신부님들은 조계가 앞에서 시국미사를 드렸고 많은 사람들이 정권퇴진 피켓을 흔들며 시위를 했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욕을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코레일 연봉이 얼마인데 데모를 하냐는 말들이 가장 많았다. 당시 신문에 나왔던 코레일의 평균연봉은 7600만원이었고 평균 근속년수는 19년이었다. 7600만원이라는 그 액수는 아마도 많은 직장인들의 등을 돌리게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비난 받아야할까? 19년을 일하고 76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있다면 그것 분명 양질의 일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일자리는 민영화해야할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지금 취직을 준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지켜야할 양질의 일자리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이 난무하던 시기가 있었다. 선거에 나오는 정치인들은 모두 감히 증세란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표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유권자인 우리들은 모두 증세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우리는 왜 증세를 싫어할까 스스로 생각해 본적이 있으신지 독자들께 묻고 싶다. 또 증세를 하더라도 복지를 늘리면 좋은게 아닌가하고 묻고 싶다.

필자는 특정계층이나 집단을 조롱하거나 일반 대중들을 무시하기 위해서 이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해가 왔다. 우리는 조금 더 처한 상황이 다른 이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둘러서 이리 긴 글을 쓴 것이다. 나와 상황이 다른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우선되어야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매체들과 SNS들은 공감이 아니라 적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건 아닌가 나부터 반성해본다. 그 덫에 갇히면 나보다 상황이 나은 사람들은 모두 금수저가 되고 한 가지 차이점만 있어도 친구가 될수 없다. 그럼 내년도 올해보다 더 어려운 새해를 맞이해야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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