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편 자로(子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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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편 자로(子路)
  • 이우재
  • 승인 2010.07.2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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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편 자로(子路)

1, 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 曰 無倦.
  자로가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이 솔선수범하고 나서 백성에게 일하게 하는 것이다.”
  자로가 좀 더 가르쳐 줄 것을 청하자, 말씀하시길 “태만히 하지 말아라.”

  <해설> 先之勞之는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고 나서(先之) 백성에게 일을 시키는 것(勞之)이다. 請益은 스승에게 더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無倦은 끝까지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로, 先之勞之를 행하기를 끝까지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2, 仲弓爲季氏宰 問政. 子曰 先有司 赦小過 擧賢才. 曰 焉知賢才而擧之. 曰 擧爾所知. 爾所不知 人其舍諸.
  중궁이 계씨의 가재가 되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먼저 관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사소한 잘못은 용서하며, 어진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어진 인재를 어떻게 알아내어 등용합니까?”
  “우선 네가 아는 자를 등용하거라. 그러면 네가 모르는 자들을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두겠느냐?”

  <해설> 재(宰)는 가재(家宰)이다. 유사(有司)는 관원이다. 先有司를 고주의 왕숙은 먼저 관원들에게 일을 위임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앞장의 先之勞之의 예에 비추어 볼 때, 먼저 관원들에게 모범을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나을 듯 싶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가 덕을 닦아 임금다운 임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 혼자로는 육체적, 물리적 한계가 있는 만큼, 그 다음에 요청되는 일은 바로 군주를 보좌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다. 우선 내가 아는 인재를 등용해 정중히 대접한다면, 남으로부터 인재의 추천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인재의 등용도 인(仁)과 같이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여 먼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3, 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자로가 말하길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치를 맡기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반드시 그 이름부터 바로 세우고 싶다.”
  자로가 말하길 “여전하시군요, 선생님의 우원(迂遠)하심이란. 어찌 그 이름부터 바로 세우신다고 하는 겁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답답하구나, 유야.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는 법이다. 이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으며,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않으며,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맞지 않게 되고, 형벌이 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군자가 이름을 세우면 반드시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그 말에 구차함이 없을 따름이다.”

  <해설> 위군(衛君)은 영공(靈公)의 손자인 출공(出公) 첩(輒)이다.
  정명(正名)은 이름을 똑바로 하는 것이니, 그 이름(名)과 내용(實)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한(漢)의 정현(鄭玄)은 정명(正名)을 정서자(正書字), 즉 글자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찬성하기 어렵다. 有是哉는 일찍이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迂)는 우원(迂遠)함이다. 야(野)는 사리에 어두워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궐여(闕如)는 비워두는 것, 言不順은 말이 서로 원만하게 통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우선 이름부터 바로 세우자고(正名) 대답한 데는 특수한 배경이 있다. BC 493년 위령공(衛靈公)이 죽자 그 지위는 아들인 괴외(蒯聵)에게 계승되지 않고, 손자인 첩(輒)에게로 이어졌다. 아들인 괴외가 위령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여 국외로 망명하였기 때문이다. 손자인 첩은 조부의 뜻을 승계하여 출공(出公)이 되었으나, 국외의 괴외는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부자지간의 왕위 다툼의 결과 위나라는 괴외를 지지하는 파와 출공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어 내분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 혼란한 상황은 술이 14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공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 정당한 계승권자인가를 밝혀 내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순자(荀子)의 정명론(正名論)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순자의 정명론은 전국 시대 학자들 간의 논쟁이 치열해지면서 나타나는 개념의 혼란과 그것을 악용한 언어의 유희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논리학(論理學) 비슷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정명(正名)을 순자의 정명(正名)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장의 진위(眞僞) 여부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공자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법가(法家)적이다. 공자는 형벌에 의한 정치를 반대하였다(안연 19). 그런데 여기서는 형벌의 사용이 당연시되고 있다. 평소의 공자의 언행과 일치하지 않는다.
  문체 또한 평소의 공자의 말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도 주의해야 한다. 공자는 말재주가 좋은 자를 영자(佞者)라 하여 탐탁해 하지 않았다(공야장 4). 그런 공자가 여기에서는 마치 오늘날의 삼단논법을 연상시키는 정연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공자는 일일이 설명을 해 주기보다는 본인이 직접 깨닫게 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말 또한 장황하기보다는 간략하며, 논리적이기보다는 비유적이었다. 여기에서 보이는 공자의 말은 논어의 다른 곳에서 보이는 공자의 말과 분명 다른 모습이다.
  크릴(H. G. Creel)은 이 장이 후세 법가에 의해 위작,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4,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 樊須也. 上好禮 則民莫敢不敬. 上好義 則民莫敢不服. 上好信 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 則四方之民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번지가 곡물 농사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야채 농사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니, 말씀하시길 “나는 늙은 야채 농사꾼만 못하다.”
  번지가 물러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소인이로구나, 번지는.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리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리 없으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이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을 리 없다. 이렇게 되면 사방의 백성들이 자식을 등에 업고 모여들게 된다. 어찌 농사가 필요하겠는가?”

<해설> 가(稼)는 오곡을 재배하는 것을 말하고, 포(圃)는 야채를 재배하는 것을 말한다. 用情은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襁負其子는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는 것이다.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는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있었던 시기다. 철기의 도입과 그에 따른 우경(牛耕)의 확산으로 농업 분야에서의 생산력의 발달은 특히 눈부셨다. 전통적인 씨족공동체의 집단 농업은 이제 철기를 앞세운 새로운 가족 단위의 농업으로 대체되어 갔다. 그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은 경제적 부(富)를 손에 쥘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자는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었다. 번지의 질문은 바로 이러한 사회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영농법을 배워 나라를 경제적으로 부강시키는 것, 번지가 물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번지의 기대와 어긋났다. 공자는 모른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번지를 소인이라고 비난까지 하고 있다. 자하의 말에 “비록 작은 도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으나, 멀리까지 가는데 발이 묶일 우려가 있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배우지 않는 것이다(자장 4).”라고 했다. 위정자가 몸소 덕을 갖춤으로써 모범을 보이면 저절로 나라는 부강해진다. 군자는 근본에 충실할 뿐이다. 지엽말단의 작은 일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공자의 생각일 것이다.
  격심한 시대 변화의 와중에서 스승과 제자의 입장 차이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5, 子曰 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시 3백 편을 외우고 있더라도, 정치를 맡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사방의 나라에 사신으로 나아가 혼자 상대할 줄 모른다면, 비록 많이 외우고 있다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해설> 시삼백(詩三百)은 『시경』의 시 305편을 말한다. 전대(專對)는 남의 나라에 사신으로 나아가 혼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대부가 남의 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군주로부터 명(命)을 받을 뿐, 그 해야 할 말까지 받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 가서는 자신의 판단만으로 말을 응대해야 한다. 이것이 전대이다.
  『시경』의 시를 공부하면 백성의 애환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수사학(修辭學)적 기교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정치를 잘 할 수 있고, 사신으로서의 업무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를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실제 필요한 상황에서 그것을 쓸 줄 모른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6,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여지고, 내 몸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하여도 따르지 않는다.”

  <해설> 군자의 정치는 백성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몸소 모범을 보임으로써(躬行), 백성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덕치(德治)요, 교화(敎化)다.

  <참고> 안연 17, 자로 13.

7, 子曰 魯衛之政兄弟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와 같다.”

  <해설> 노나라의 시조 주공(周公) 단(旦)과 위나라의 시조 강숙(康叔) 봉(封)은 주 문왕(文王)의 아들들로 형제간이다. 게다가 공자 당시 노는 삼환(三桓)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졌고, 위는 부자간의 왕위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것을 말한 듯하다.

8, 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曰 苟合矣. 小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
  공자께서 위나라 공자 형에 대해 말씀하시길 “그는 살림살이를 잘하였다. 처음 재산이 모이자 ‘약간 모았다.’라고 하더니, 조금 더 늘어나자 ‘대강 갖추어졌다.’라고 하였다. 넉넉해지자 ‘그런대로 아름답다.’라고 말하였다.”

  <해설> 공자 형(荊)은 위나라의 대부이나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거실(居室)은 살림살이를 말한다. 구(苟)는 그런 대로, 제법의 뜻이다. 합(合)은 모이는 것(聚), 완(完)은 갖추어지는 것(備)이다.
  공자 형이 재산에 연연해 하지 않고, 족(足)함을 알았음을 칭찬한 말이다.

9,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마차를 몰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많구나.”
  염유가 말하길 “이미 이렇게 사람이 많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부유하게 하여야 한다.”
  “이미 부유하다면,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가르쳐야 한다.”

  <해설> 복(僕)은 마차를 모는 것, 서(庶)는 인구가 많은 것이다.
  위나라는 작은 나라다. 그런 위나라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많은 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우선 백성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그 다음에 백성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맹자』 「양혜왕(梁惠王)상」편 7에 보면 “풍년이 들더라도 종신토록 고생해야 하고, 흉년이 들면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오직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부족할까 두려워할 뿐이니, 어느 겨를에 예의를 닦겠습니까?”라는 말이 있다. 주자는 이 말을 풀이하기를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도 없다(無常産而無常心)라고 하고 있다.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 중요하나 그것도 백성의 먹고 살 것이 해결되고 난 후의 일이다. 먼저 부유하게 하고 난 후 가르치는 것이다(先富後敎).
 
10, 子曰 苟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진실로 나를 쓰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일 년뿐이라도 좋다. 삼 년이라면 결과가 있을 것이다.”

  <해설> 기월(期月)은 일 년을 말한다.
  공자가 자신이 쓰이지 못함을 탄식한 말이다. 『사기』 「공자세가」에서는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한 말이라고 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큰 경륜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쓰이지 못하고 있는 공자의 안타까운 처지가 가슴을 저민다.

11, 子曰 善人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矣. 誠哉是言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선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백년이면, 잔혹한 행위와 사람을 해치는 것을 없앨 수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로구나 그 말은.”

  <해설> 勝殘은 잔혹한 행위를 억제하는 것이다. 去殺은 고주의 왕숙, 신주의 주자에 의하면 사형(殺)을 폐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사람을 해치는 행위를 없애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다산을 따랐다. 선인(善人)은 비록 성인(聖人)은 아니나 학덕을 겸비한 군자를 말한다.
  善人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矣는 아마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숙어일 것이다.
 
12, 子曰 如有王者 必世而後仁.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만일 왕자가 나타난다면, 반드시 한 세대 후에는 어진 세상이 이루어지리라.”

  <해설> 왕자(王者)는 맹자에 의하면 패자(覇者)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덕에 의지하여 다스리는 군주를 말한다. 그러나 논어에서는 여기서만 나타나므로,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聖人)을 뜻하는 것이리라.
  세(世)는 고주의 공안국에 의하면 30년이다.
  성인의 교화가 한 세대를 계속된다면, 백성 모두가 감화되어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사는 이상 사회가 이룩된다는 말이다.
 
13, 子曰 苟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진실로 그 몸을 바르게 한다면, 정치를 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자기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남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해설> 하유(何有)는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는 뜻이다.
  정치의 시작은 위정자 스스로부터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나부터 바로 한 뒤에 비로소 남을 교화할 수 있다.

  <참고> 안연 17, 자로 6에서도 자신의 몸가짐부터 바로 할 것을 말하고 있다.

14, 冉子退朝. 子曰 何晏也. 對曰 有政. 子曰 其事也. 如有政 雖不吾以 吾其與聞之.
  염자가 조정에서 돌아오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찌 이리 늦었느냐?”
  대답하기를 “정사(政事)가 있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것은 사사로운 일일 것이다.  만일 정사에 관한 일이라면, 내가 비록 벼슬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나도 그 일을 들었을 것이다.”

  <해설> 염자(冉子)는 염구(冉求)다. 조(朝)는 조정이다. 이 조(朝)에 대해 고주의 주생렬(周生烈)은 노나라의 임금 앞에서 행해지는 조회, 즉 공조(公朝)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주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씨(季氏)의 조회, 즉 사조(私朝)로 보고 있다. 염구가 계씨의 가재(家宰)였던 것을 미루어 볼 때 계씨의 사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안(晏)은 만(晩), 즉 늦는 것이다.
  정(政)은 나라의 일이고, 사(事)는 개인적인 일이다. 주자의 설(說)이다. 고주(古注)의 마융(馬融)에 의하면 정(政)은 고치거나 바로잡는 것이고, 사(事)는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라고 한다. 즉 오늘날의 정무(政務)와 사무(事務)에 비견할 수 있다. 여기서는 주자를 따랐다.
  이(以)는 용(用)이다.
  염구는 정사에 재주가 있는 인물로, 계씨에 출사하여 그 가재(家宰)가 되었다. 당시 노나라의 실권이 계씨의 수중에 있었던 까닭에 노나라의 국정이 계씨의 집안에서 사사로이 처리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염구 또한 계씨의 가재의 자격으로 노나라의 국정에 많은 관여를 했음에 틀림없다. 이 날도 염구는 계씨의 집안에서 평소 하던 대로 노나라의 국정을 처리하다 늦었으리라.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공자에게 정사를 처리하다 늦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것을 꾸짖고 있다. 그것은 노나라의 정사가 아니라 계씨의 집안 일이라고. 즉 계씨의 참람함을 꾸짖은 것이며, 그것을 구분 못하는 염구도 함께 꾸짖은 것이다.
  나라의 정사는 정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정당한 장소에서 광명정대하게 처리하는 것이지, 사사로이 몇몇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계씨는 국사(國事)를 사사로이 자신의 집안에서 처리했다. 국사에 관한 것이라면 공자도 비록 현직에 있지는 않더라도, 대부의 말석을 차지하는 이상 의당 참가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염구가 처리한 일은 정사가 아니라 계씨의 사사로운 집안 일이다.   
  실로 준엄한 꾸짖음이다.

15, 定公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정공이 묻기를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말로는 그런 것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의 말에 ‘임금 노릇 하기도 어렵고, 신하 노릇 하는 것도 쉽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임금 노릇 하는 것이 어려운 줄을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는 그런 말에 가깝지 않을까요?”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 그런 말이 있을까요?”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길 “말로는 그런 것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의 말에 ‘나는 임금 노릇 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고, 오로지 내가 하는 말에 대해 아무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즐겁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그 말이 선(善)한 것이어서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이 선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 그런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해설> 정공(定公)은 팔일 19에서도 나온 바 있는 노나라의 임금이다. 기(幾)는 고주의 왕숙에 의하면 근(近)으로, 가깝다는 뜻이다. 주자는 기(幾)를 기(期), 즉 기약(期約)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주를 따랐다.
  나라의 흥망성쇠를 어찌 한마디 말로 담아낼 수 있으리오. 다만 임금 노릇 하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삼가 솔선수범하여 덕을 갈고 닦으면 나라가 흥할 것이요, 임금의 말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하여 교만하고 망언을 일삼는다면 결국 나라를 잃고 말 것이다.

16, 葉公問政. 子曰 近者說 遠者來.
  섭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가까운 사람들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해설> 섭공(葉公)은 술이 18에도 나오며, 초나라의 이름높은 정치가이다.
  위정자가 선정을 베풀면, 제일 먼저 그 나라 백성들이 기뻐한다. 또한 그 소문이 멀리 퍼짐에 따라 먼 데 있는 딴 나라 백성들까지도 그 선정을 그리워하여 모여들기 마련이다. 

17, 子夏爲莒父宰 問政. 子曰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 則不達. 見小利 則大事不成.
  자하가 거보의 읍재가 되어, 정치에 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서두르려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돌아보지 말아라. 서두르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돌아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해설> 거보(莒父)는 노나라의 읍(邑)이다.
  자하가 작은 일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으므로 공자가 그것을 충고한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18,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섭공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 행실이 정직한 궁(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자식이 그것을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마을의 정직한 자는 그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깁니다. 그 속에 저절로 정직함이 있습니다.”
 
  <해설> 당(黨)은 마을이다. 직궁(直躬)은 고주의 공안국이나 신주의 주자에 의하면 몸가짐을 곧게 행하는 것(直身而行)이다. 즉 곧게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청(淸)의 유월(兪樾)의 『군경평의(羣經平議)』나 유보남(劉宝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에 의하면 궁(躬)은 사람의 이름으로, 행실이 곧은(直人) 궁(躬)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가리킨다. 당(唐)의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經典釋文)』에 인용된 한(漢)의 정현(鄭玄)의 주(注)도 궁(躬)은 궁(弓)으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증(證)은 고(告)로, 고발하는 것이다.
  국가의 법질서와 가족 질서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때 어느 것이 우선할까하는 문제이다. 섭공은 국가의 법질서를 우선시하여 자기 아비를 고발한 사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다르다. 공자가 보기에 국가는 혈연공동체의 연장에 불과하다. 국가의 질서라는 것도 실은 종족 내의 효제(孝弟)가 외연적으로 확장된 것이다. 효제는 세상 모든 질서의 근본이다. 따라서 아비가 비록 도둑질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그 아비를 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충> 국가의 질서가 우선하느냐 아니면 씨족공동체의 질서가 우선하느냐 하는 것은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 간의 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의 하나였다. 전자는 법가로 후자는 유가로 대표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전통적인 혈연공동체가 파괴되면서 중앙집권적 전제국가가 성립해 가는 시기였다. 황제(皇帝)를 정점으로 하여 관료제의 지원을 받는 이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는 혈연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 속에 속박되어 있던 각 개인을 직접 군주의 지배 체제하에 끌어들였다. 전제 군주의 의사(意思)의 표현인 법(法)은 그 앞에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았다. 군주의 권력이 무제한이듯이, 법 또한 무제한이었다. 자신들의 특수성을 주장하며, 국가 권력의 침투를 제한하려고 했던 공동체적 질서는 마땅히 해체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한비(韓非), 상앙(商鞅) 등으로 대표되는 법가(法家)의 정치 철학이다.    
  그러나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입장은 달랐다. 공자가 그랬듯이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는 혈연공동체의 연장이다. 혈연공동체의 질서는 사회 질서의 기초를 이룬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바로 이 혈연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혼란을 수습하는 것은 바로 혈연공동체의 질서를 복원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국가 법질서의 무제한성(無制限性)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혈연공동체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며, 세상을 더욱 혼란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국법이라 하더라도 공동체의 특수성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 이것이 유가의 입장이다.
  이렇듯 유가와 법가는 공동체적 질서의 존폐(存廢)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전제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 유가란 공동체의 특수성, 백성의 행복 운운하며 군주권의 확대를 가로막는 골치아픈 존재에 불과했다. 군주의 입장에서는 군주권의 무제한적인 강화(强化)를 추구하는 법가야말로 가장 환영할 만한 존재였다.
  중원의 서방에 치우친 야만 국가였던 진(秦)나라는 상앙의 변법(變法)을 받아들여 가장 먼저 중앙집권화에 성공하면서 일약 중원의 최강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어 BC 221년 마침내 전 중국을 통일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실용적 목적 이외의 모든 학문을 금지한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300여 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제자백가의 논쟁은 결국 법가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역사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법가의 약점은 그것이 통치자의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인 것만큼, 백성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가혹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폭정으로 인해 진제국(秦帝國)은 20년도 채 유지하지 못하고 BC 206년 멸망하고 만다. 한(漢)의 유방(劉邦)이 진의 수도 함양(咸陽)에 입성했을 때 진의 악법을 폐지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공포함으로써 진나라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법가가 진의 조정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안 유가는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제국(漢帝國)은 유교를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한다. 최후의 승리를 거둔 것은 유가였던 셈이다.

19, 樊遲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평소에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일을 할 때는 삼가 신중히 하며, 남과 더불어 사귈 때에는 성실히 하라. 비록 오랑캐 땅에 가더라도 이것을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해설> 거처(居處)는 평상 시 행동하는 것이다. 이적(夷狄)은 오랑캐다.
  일상 생활에서 예를 잃지 않으며, 일을 할 때는 삼가 신중히 하고, 남과 사귈 때는 성의를 다해 신의(信義)를 돈독히 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이다. 비록 오랑캐 땅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처신해야 한다.
  논어에서 번지는 인(仁)에 대해 세 번 묻고 있다. 옹야 20과 안연 22, 그리고 이곳이다. 그때마다 공자의 대답은 각각 다르다. 옹야 20에서는 어려운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얻는 것은 남보다 뒤에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안연 22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공자가 번지의 사람됨과 질문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대답한 것이리라. 물을 당시의 상황은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전말을 추측하기 어렵다. 다만 번지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자로 4의 번지가 농사 짓는 것에 대해 물은 데서 약간은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번지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공동체가 해체되어 가던 당시 상황에서, 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부의 축적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기에 농사 짓는 데 관심을 가졌고, 이상주의적 정치보다는 직접적으로 결과가 나타나는 그러한 부국 정책에 힘을 쏟았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공자가 어려운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얻는 것은 남보다 나중에 하라고 한 것은 아닐런지. 또 사람을 사랑하라고 한 것은 아닌지. 아무튼 획일적인 추상적 가르침보다는, 각자의 사람됨과 그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가르침을 베푸는 공자의 진면목이 여실하다.
 
20, 子貢問曰 何如斯可謂之士矣. 子曰 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曰 敢問其次. 曰 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 曰 敢問其次. 曰 言必信 行必果 硜硜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 曰 今之從政者何如. 子曰 噫 斗筲之人 何足算也.
  자공이 묻기를 “어찌하여야 가히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알며,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가히 선비라고 일컬을 수 있으리라.”
  “감히 그 다음을 묻겠나이다.”
  “친척들로부터 효성스럽다는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공손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감히 그 다음을 묻겠나이다.”
  “말에 신의가 있고, 일을 할 때 반드시 결과를 보는 것이다. 비록 고지식한 소인이기는 하나, 그래도 아마 그 다음은 될 수 있으리라.”
  “요즈음 정치에 종사하고 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아아 그릇이 작은 자들이다. 세어 볼 것도 없다.”

  <해설> 有恥는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고칠 수 있다. 使於四方不辱君命은 천하 각지에 사신으로 가서 그 맡은 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군자가 학덕을 연마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에 나아가 백성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으면서, 사신이라는 나라의 큰 일을 무난히 완수할 수 있다면 족히 큰 선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종족(宗族)은 조상을 같이하는 일족(一族)을 말하며, 향당(鄕黨)은 같은 마을 사람이다. 유자는 효제(孝弟)를 모든 도덕의 근본으로 보았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학이 2). 따라서 선비가 비록 재주가 없어 나라의 큰 일을 맡을 수 없다면, 마땅히 근본에 힘써,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사람에게 공손하여야 할 것이다.
  行必果의 과(果)에 대해 고주(古注)의 정현(鄭玄)은 과감(果敢)한 것,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에서 이충(李充)은 결과를 성취하는 것(成)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후자를 따랐다. 硜硜然은 작은 돌의 단단한 모양으로, 고지식한 사람이 융통성 없이 자기에게만 충실한 것을 일컬은 말이다. 말에 신의가 있고 일을 함에 반드시 결과를 보는 사람이면, 적어도 자기가 한 말, 자기가 맡은 일은 책임질 수 있다. 따라서 비록 부족하나마 선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공자의 생각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사람에게 공손한 사람보다는 못하다. 왜냐하면 효제(孝弟) 책임질 수을 행하는 근본으로, 그 마음을 널리 남에게까지 넓힌다면 그것이 바로 인(仁)이기 때문이다.
  『맹자』 「이루(離婁)하」편 11에는 이와 관련하여 “대인(大人)은 말에 반드시 신의를 지키려 하지 않고, 행동에 꼭 결과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의(義)를 따를 뿐이다.(大人者 言不必信 行不必果 唯義所在)”라는 말이 있다. 소인(小人)이 자기에만 연연해 하는 데 반하여, 대인(大人)은 자기보다는 천하의 의(義)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斗筲之人의 두(斗)는 한 말 들이, 소(筲)는 한 말 두 되 들이 그릇을 가리키며, 도량이 좁은 사람을 말한다. 산(算)은 수(數)로 세는 것이다.
  이 대목을 자공의 말재주(言語宰我子貢―선진 2)를 알고 있는 공자가 그로 하여금 사신으로 나아갈 것을 은근히 권유한 말로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아무튼 자공은 노나라의 사신이 되어 제(齊)나라의 침략의 위협에서 조국인 노나라를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중원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자공의 대활약으로 결국 오(吳)나라는 멸망의 비운까지 겪게 된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자공은 훌륭한 선비가 되어 사방에 사신으로 나아가 자기 임금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21,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용의 길을 걷는 사람을 얻어 가르치지 못할 바에야, 반드시 뜻이 높은 자나 고집이 센 자를 얻어 가르치겠다. 뜻이 높은 자는 진취적이며, 고집이 센 자는 행하지 않는 바가 있다.”

  <해설> 중행(中行)은 중도(中道)의 길을 걷는 자이니,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는 중용(中庸)의 길을 걷는 자이다. 여(與)는 함께 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가르친다는 뜻이다. 광(狂)은 뜻은 높으나 행동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고, 견(狷)은 고집이 세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다.
  사람의 자질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을 제일로 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뜻이 높거나 고집이라도 세어야 한다. 뜻이 높으면 멀리 보고 나아가므로 진취적이며, 고집이 세면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한다. 비록 한쪽으로 치우치는 잘못은 있지만, 장점을 잘 살리면 얻는 바가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근후(謹厚)한 척하면서 시속(時俗)의 더러움에 아부하는 향원(鄕原)이라면 얻어 가르칠 바가 못된다. 『맹자』 「진심하」편 37을 읽어보기 바란다.. 

22, 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恒其德 或承之羞.
子曰 不占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남방 사람들의 말에 ‘사람으로서 마음이 한결같지 않은 자는 무의(巫醫)도 어쩔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좋은 말이다. 그 덕이 한결같지 않은 자는 부끄러운 일을 당할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점을 칠 필요조차 없다.”

  <해설> 항(恒)은 항상심(恒常心), 즉 일관된 마음이다. 남인(南人)은 남방 사람이다. 무의(巫醫)를 주자는 무당과 의사로 나누어 생각한다. 그러나 청(淸)의 유월(兪樾)이 『군경평의(羣經平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고대의 무당은 대개 의사도 겸하고 있었던 관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不可以作巫醫는 고주의 정현에 의하면 무의도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자나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위관(衛瓘)은 무의도 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주를 따랐다.
  不恒其德 或承之羞란 말은 현재 주역 항괘(恒卦) 九三의 효사(爻辭)에 나타나 있다. 자기의 덕이 한결같지 않으면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현재의 주역에 있다고 해서 공자가 주역의 글을 인용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술이 16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공자는 결코 주역에 심취하지 않았으며, 오히 주그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만일 역(易)의 글을 인용하였다면 易曰이라고 했을 것이다. 아마 당시 전해 내려오던 숙어(熟語)였으리라.
  子曰 不占而已矣는 앞의 글을 부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 子曰이 다시 붙었는가는 불분명하다. 마음이 한결같지 못한 자는 점을 칠 대상조차도 못 된다는 말이다.

23,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서로 어울리면서도 부화뇌동하지는 않으며, 소인은 부화뇌동하면서도 서로 어울릴 줄은 모른다.”

  <해설> 화(和)는 서로 다르면서도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요, 동(同)은 무조건 같이 따라 하는 것이다. 화(和)에는 주체성이 살아 있으나, 동(同)에는 없으며, 화에는 조화가 숨쉬나, 동에는 획일성만이 있을 뿐이다. 화가 의기(義氣)로 결합한 것이라면, 동은 이해관계나 감정으로 결합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0년에는 당시 제나라의 재상이었던 안자(晏子)가 제경공(齊景公)과 화(和)와 동(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실려 있다. 거기에서 안자는 군주가 옳다고 주장하나 옳지 않은 것이 있을 때는 그 옳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 군주가 아니라고 하지만 옳은 것이 있을 때는 그 옳은 것을 밝혀 내어 군주를 보완하는 것이 화(和)요, 군주가 옳다고 하면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면 그르다고 하며 무턱대고 따르는 것이 동(同)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고> 위정 14에 “군자는 두루 사귀되 편당을 짓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을 지어 두루 사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24,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자공이 묻기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직 옳다고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직도 옳다고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 중 착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해설> 모름지기 사람은 자신의 일관된 입장을 가져야 하며, 옳은 것은 옳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선한 사람들로부터는 평판이 좋을 것이요, 옳지 못한 자들로부터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잘 보이려고 하는 자는 거짓군자(僞君子)일 뿐이다. 양화 13에서는 그런 사람을 향원(鄕原)이라고 하면서 덕을 해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鄕原德之賊也). 

  <참고> 이인 3에 “오직 어진 사람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위령공 27에는 “뭇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뭇 사람들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25, 子曰 君子易事而難說也. 說之不以道 不說也. 及其使人也 器之. 小人難事而易說也. 說之雖不以道 說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를 섬기기는 쉬우나,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옳지 않은 것으로써 기쁘게 하면, 기뻐하지 않는다. 사람을 부릴 때에는 각기 그 기량에 따라 한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우나, 기쁘게 하기는 쉽다. 옳지 않은 것으로써 기쁘게 하더라도 기뻐한다.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는 모두 갖출 것을 요구한다.”

  <해설> 열(說)은 기쁠 열(悅)이다. 기지(器之)는 그 그릇에 맞게 하는 것이다. 구비(求備)는 모든 것을 다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즉 전능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군자는 사람을 부릴 때, 그 사람의 기량에 맞게 일을 부린다. 따라서 누구라도 자신의 능력대로만 하면 되므로, 군자의 밑에서 일을 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군자는 도(道)가 아니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인은 사람을 부릴 때, 그 사람이 전능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소인의 밑에서는 일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소인을 기쁘게 하기는 쉽다. 옳던, 옳지 않던 소인의 기분만 맞추면 되기 때문이다. 남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꼭 명심해야 할 말이다.
  위에서는 설(說)을 열(悅)로 풀이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기에 동의하고 있으나, 청(淸)의 모기령(毛奇齡)의 『논어계구편(論語稽求篇)』에는 다른 주장이 소개되어 있다. 모기령에 의하면 설(說)은 글자 그대로, 말하는 것(言說)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고 한다. 중국의 조기빈(趙紀彬)은 『논어신탐(論語新探)』에서 모기령의 주장에 약간 수정을 가하여 說之不以道, 說之雖不以道의 설(說)은 해(解), 즉 이해시킨다는 뜻으로, 君子易事而難說也, 不說也, 小人難事而易說也, 說也의 설(說)은 열(悅), 즉 기쁘다는 뜻으로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조기빈에 의하면 “군자를 섬기기는 쉬우나,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옳지 않은 것으로써 이해시키려 하면, 기뻐하지 않는다. …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우나, 기쁘게 하기는 쉽다. 옳지 않은 것으로써 이해시키려 하더라도 기뻐한다. … ”가 된다. 같은 설(說)을 한 문장 안에서 해(解)와 열(悅)로 각각 다르게 풀이하고 있는 점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나, 설(說)을 열(悅)보다는 해(解)로 풀이하는 것이 더 문리(文理)가 순탄한 문장이 논어 안에 여러 곳(옹야 10, 26, 선진 3, 양화 5)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26, 子曰 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태연하나 교만하지 않다. 소인은 교만하나 태연하지 못하다.”

  <해설> 태(泰)는 태연한 것, 교(驕)는 교만한 것이다.
  청(淸)의 이공(李塨)은 『논어전주(論語傳注)』에서 이 말을 풀이하여 말하길 “군자는 많고 적음이나 크고 작음도 없고, 감히 오만한 것도 없으니, 그 얼마나 여유있고 태연하며, 또한 어찌 교만할 수 있겠는가? 소인은 자신을 자랑하고 남에게 오만하며, 오직 남으로부터 존경을 잃을까 두려워하니, 그 얼마나 교만하고 방자하며, 또한 어찌 태연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있다. 

  <참고> 술이 36에는 “군자는 편안하고 너그러우나, 소인은 항상 초조하다.”는 말이 있다.
  泰而不驕라는 말은 요왈 2에도 나온다.

27, 子曰 剛毅木訥近仁.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강직하고, 의연하며, 질박하고, 어눌하면 인(仁)에 가깝다.”

  <해설> 강(剛)은 욕심이 없어 강직한 것이요, 의(毅)는 뜻이 굳세어 의연한 것이다. 목(木)은 질박한 것이요, 눌(訥)은 말이 어눌한 것이다.
  사욕에 흔들림이 없어 강직하고, 어떤 고난에도 의연하며, 그 성품이 허식(虛飾)을 좋아하지 않아 소박하고, 말을 아낄 줄 안다면, 인(仁)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인(仁)에 가까이 갔음에는 틀림없다.
  학이 3, 양화 17에 보이는 巧言令色 鮮仁矣가 인(仁)에 대해 소극적인 관점에서 한 말이라면, 이 말은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강의(剛毅)는 영색(令色)과, 목눌(木訥)은 교언(巧言)과 대비되고 있다.
 
28, 子路問曰 何如斯可謂之士矣. 子曰 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
  자로가 묻기를 “어찌하여야 가히 선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서로 간절히 격려하고 화목하면 가히 선비라고 일컬을 수 있으리라. 벗에게는 간절히 격려하며, 형제에게는 화목해야 한다.”

  <해설> 절절(切切)은 아주 간절한 모양, 시시(偲偲)는 서로 격려하는 것이다. 이이(怡怡)는 서로 화목하는 모양이다.
  벗과는 학문의 길에 매진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형제간에는 화목해야 한다. 이것이 선비의 길이다.

29, 子曰 善人敎民七年 亦可以卽戎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선인이 백성을 교화하기를 7년이면, 전쟁터라도 내보낼 수 있다.”

  <해설> 즉융(卽戎)의 즉(卽)은 취(就)로 나아가는 것이며, 융(戎)은 병(兵)으로 전쟁을 뜻한다.
  전쟁터에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인이 교화하면, 백성과 군주가 하나가 되어,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30, 子曰 以不敎民戰 是謂棄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백성을 교화하지 않고서 전쟁에 내보내는 것은, 그들을 버리는 것이다.”

  <해설> 백성을 교화하지 않으면 백성은 나라의 소중함을 모른다. 나라의 소중함을 모르는 백성들이 무슨 전쟁을 하겠는가? 패망하여 죽음만 있을 뿐이다.  
  바로 윗 장(章)과 같은 내용이다.
  고주의 마융(馬融)은 교(敎)를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군사 훈련을 시키지 않고 백성을 전쟁터에 내보내면 반드시 패망하여 죽음만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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