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 되풀이되는 오욕의 역사
상태바
잔인한 4월, 되풀이되는 오욕의 역사
  • 이한수
  • 승인 2016.04.12 07: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감 팩션] (13)실명 실록 정치 드라마 [잘 돼 갑니다]

4월은 참 잔인한 달입니다. 제주 4.3의 원혼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잠들지 못하고 있고, 생때같은 어린 학생들을 수장시킨 4.16 세월호의 진상은 두 해가 지나도록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4.19 56주기를 맞이한 우리 정치는 구태를 벗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인권 의식마저 의심스러운 자가 ‘건국의 아버지’라며 ‘국부(國父)’ 영화를 만든다고 떠벌이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 자리에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요. 56년 전 4월로 되돌아가 보면 지금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는지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60년대 정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잘 돼 갑니다』 만한 작품이 없을 듯합니다.  이 작품은 제작 과정 자체가 어두운 우리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명 실록 정치극이 라디오극으로 방송될 수 있었던 것은 4.19혁명이 이루어낸 자유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1967년 영화로 제작된 『잘 돼 갑니다』는 정보기관에 의해 상영이 금지되고 제작자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비극을 겪습니다.

영화 제작자의 미망인 ‘홍정순’ 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맺힌 사연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어 놓고도 극장에 걸지 못한 채 울화병으로 숨진 남편과 뿔뿔이 흩어진 자식들, 특히 청와대 경비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한 후 정서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로 베갯머리를 적시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의 비극적 종말을 그린 작품의 상영을 불허한 박정희 정권은 스스로 폭압정권임을 자인한 꼴이니 이 영화의 상영 무산 자체가 당대 정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운사 장편소설 『잘 돼 갑니다』          영화 『잘 돼 갑니다』 포스터


『잘 돼 갑니다』는 3.15 부정선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망명,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실명 역사극입니다. 영화 개봉이 예정된 1968년은 전 해에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위한 3선 개헌을 준비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입소문으로, 개봉되기 전에 주목을 받은 작품이 개봉 하루 전날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 취소되어 버립니다. 내로라하는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대작이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으며 제작자는 쫄딱 망하고 가족은 비참한 고통을 당합니다. 제작자 ‘김상윤’ 씨는 뇌출혈로 쓰러져 45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차남은 청와대로 찾아가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다 구타를 당하고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맙니다. 부인은 자살을 하려다가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영화는 만들어진 지 20년이 지나 6.10항쟁 직후인 1988년 7월이 되어서야 상영이 되지만 이미 낡은 이야기가 되고 난 뒤라 9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집니다. 

『잘 돼 갑니다』는 경무대(현 청와대) 이승만 대통령 전용 이발사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4.19의거로 권좌에서 물러난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의 신상을 털고 있습니다. 주인공 이발사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 작품은 명실상부한 실명 실록 정치드라마입니다. 이런 작품이 암흑의 시대 1964년에 라디오로 방송되었다니 참 놀랄 만한 일입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직후 독재 권력 공백기 틈새에 아슬아슬하게 꽃피운 작품을 가만 놔둘 리 없지요.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경무대 이야기는 친일 권력자들에게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신 집권을 위해 법질서를 문란케 한 이승만, 미군정을 등에 업고 친일 주구들을 앞세워 4.3 학살극을 주도한 조병옥, 정치 깡패를 동원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어린 학생들을 무참하게 살육한 이기붕 등 최고 권력자들의 야합과 이전투구를 속속들이 들추어냈으니 무사할 리 만무하지요.

1959년 종신 집권을 획책하는 이승만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자 이에 항거하는 데모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이기붕 국회의장은 민주당 대표 ‘조병옥’을 만나 협상을 벌입니다. [잘 돼 갑니다]에서는 둘이 만나는 모습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습니다. 오랜 친구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천하를 노나가질 때가 왔다.” “누가 노나갔는댔어? 나 혼자 다 가질려는데.” “혼자 욕심내지 말고 나하구 노나갖자구.” 농지꺼리를 하는 모습이 가관입니다. 그런데 코미디 같은 이 장면은 사실무근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1959년 1월 19일 둘은 비밀리에 만나 내각책임제 개헌을 약속했고 최근 공개된 기밀문서에도 미국이 한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이승만 이후 이기붕과 조병옥의 연합 정권을 기획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인자 이기붕 국회의장의 아들이자 1인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간 ‘이강석’은 하늘 아래 무서울 게 없었을 법합니다. 양자가 된 직후에 부정으로 서울대 법대에 편입해 들어갔다가 서울대 학생들이 집단 반발하자 육군사관학교로 다시 편입해 들어가는 등 온갖 비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가짜 이강석 사건은 ‘귀하신 몸’의 무소불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작품에서도 이 사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범인 ‘강성병’이 법정에서 한 발언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임꺽정, 장길산에 버금가는 희대의 의적이 된 일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법정에서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시험해 보는 것도 동기의 하나였습니다. 이번 체험을 통하여 느낀 건 권력의 힘은 위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배입니다”라고 발언하고 가득 매운 방청석은 박수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고 합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귀하신 몸 사칭 사건’ 2011년 11월 13일 방송


『잘 돼 갑니다』는 부패한 권력의 종말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보여 줍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서대문 경무대’ 이기붕의 끝은 처참했습니다. 분노한 시위대가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몰려오자 일가족을 데리고 파주 6군단으로 피신하지만 거기서도 홀대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와  큰아들 ‘이강석’에 의해 가족 모두 살해되고 맙니다. 4.19의거 9일째 되는 1960년 4월 28일 무소불위의 권력자는 그렇게 끔찍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5월 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갑니다.



영화 [잘 돼 갑니다] 이기붕 일가족 자살 장면

권력자들이 더러운 이해타산으로 서로 배신하고 죽이는 끔찍한 일들을 여실히 들추어내어 비참하기는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게 하는 회초리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조병옥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4.3 때 “제주도민을 다 죽여도 좋다”고 지시한 장본인입니다. 그런 자가 어떻게 이승만과 서로 죽일 듯이 척이 지게 되었을까요. 조병옥은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날 때 이기붕과 이승만의 환송을 받으며 기뻐하는데 도미(渡美) 하자마자 3월 15일로 선거 날짜를 앞당겼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합니다. 7월에 선거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유력한 야당 후보가 병 치료를 위해 출국하자 갑자기 일정을 앞당겼으니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 큰 병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하루빨리 귀국하려고 마음이 바쁜데 그만 돌연사하고 맙니다. 작품에서는 조병옥이 수술 후 미음을 몇 수저 떠먹고 화장실에 가 대변을 보면서 회복되었다고 좋아하다가 갑자기 죽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암살당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중앙정보부 창립 멤버이기도 했던 조웅 목사는 ‘신익희’와 마찬가지로 ‘조병옥’도 이승만 정권의 암살 청부업자들에 살해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조병옥이 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갈 때 엄00의 진두지휘 하에 김지웅을 비롯해 4∼5명이 갔다고 해요. 여성도 한 명 동행했다고 합디다. 월터리드 병원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 한 명을 돈으로 매수해서 수술 후 경과가 좋았다고 하는 조병옥을 암살한 거죠. 김지웅은 일본어와 중국어는 물론 영어도 능통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엄00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3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강력한 야당 후보 ‘신익희’가 선거를 열흘 앞두고 기차간에서 돌연사하고 4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조명옥’ 후보가 선거 한 달 전에 의문사 하니 누가 보아도 암살되었다고 볼 만합니다. 

『잘 돼 갑니다』는 권력자의 주변 얘기라 투쟁의 현장을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4월 18일 정치 깡패들이 시위대를 패 죽인 일이 일어나자 다음 날 분노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경무대까지 몰려가고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학생들이 죽는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현장을 취재한 것처럼 기록한 박태순의 [무너진 극장]은 기록 사진과 같이 귀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4.19 시위에 동참하면서 직접 목격한 것을 요동치는 가슴으로 써내려 갑니다. 이 작품은 4월 19일 시위 중 다친 친구를 병문안 하고 죽은 친구의 묘지를 다녀온 4월 25일 하루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월 18일 19일 양일 간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었습니다. 18일에는 40여 명의 죽거나 다쳤고 19일에는 경무대 앞에서 183명이 경찰이 쏜 통에 맞아 죽고 6000여 명이 다쳤습니다. 이 끔찍한 일로 시위는 며칠간 소강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4.18 고대생 천일백화점 피습                     4.19 경무대 앞 발포


4월 25일 죽은 친구 묘소 찾아보고 다친 친구 병문안하러 나왔다가 대학교수단 시위를 목격하고 시위대에 뛰어들어 평화극장 파괴 현장에 가담하게 됩니다. 평화극장은 정치 깡패 임화수의 것으로 실제로 그날 정치 깡패 이정재의 집이 부수어지고 임화수의 대한극장이 파괴됩니다. 추악한 깡패 정치의 주구 이기붕의 집도 파괴되지요. 작중 화자는 대한극장에 뛰어들었다가 계엄군을  피해 극장 안에서 하룻밤을 숨어서 지새우고 다음 날 거리로 나와 이승만 하야 소식을 듣게 됩니다.

 
         4.25 대학교수단 시위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환영 시위


『잘 돼 갑니다』는 60년 격동의 역사 현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기에 적합한 작품입니다. 장편소설로도 나와 있지만 영화로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영화를 접하기는 어렵습니다. 영화를 만든 제작자 가족들이 겪은 수난사를 보면 권력층이 이 영화 상영을 얼마나 기피하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TV 방영도 실패했고 VOD 제작 배포도 불발에 그쳤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는지, 대통령 전용 이발사 이야기는 영화 『효자동 이발사』로 부활합니다. 끔찍한 역사의 현장을 우스꽝스럽게 조롱하고 있어 좀 당혹스럽긴 하지만 부정선거 현장이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고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린 4.19 의거 정신이 훼손되고 마는 부끄러운 우리 정치사를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3.15 부정선거 규탄으로 촉발되어 4.19 의거로 탄생한 민주주의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병신이 되고, ‘잘 돼 갑니다’며 권력에 아부하는 간신배들에 의해 신음하게 되었노라고 풍자하는 이야기는 작금의 우리 정치 현실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정치 풍자 영화의 고전 『잘 돼 갑니다』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고통 받는 민중의 희생으로 부패한 권력자가 타도되었지만, 민중 민주주의 대의를 훼손한 위정자들의 분열은 또 다른 독재자를 불러들이고 역사 발전은 좌절되고 만다는 걸 웅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는 어떻습니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