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는 사랑 없이 숙제더미만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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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는 사랑 없이 숙제더미만 안긴다"
  • 최종규
  • 승인 2010.08.0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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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인천] ① 방학숙제 … '식물채집'


 

 국민학교 4~6학년 때 만든 식물채집장


국민학생이던 때, 방학이면 늘 어마어마하게 쌓이는 방학숙제에 짓눌립니다.
 
방학 동안 우리한테 주어진 숙제는, 첫째 일기, 둘째 탐구생활, 셋째 과목에 따라 산더미 같은 베껴쓰기 숙제, 넷째 만들기와 독후감과 여행감상문 쓰기 들이었습니다.
 
일기는 한 주 이레 가운데 나흘은 꼭 써야 했고, 탐구생활은 빼곡하게 채워야 했습니다. 탐구생활을 하자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을 반드시 들어야 했기에, 탐구생활 방송이 나오는 20분 남짓 한 때에 밖에 나가서 논다든지 어머니 심부름을 한다든지 하면 못 풀고 지나칩니다.
 
과목 숙제는 여느 때에도 늘 있는 숙제이지만, 방학을 맞이하면 담임 선생은 과목마다 무슨무슨 숙제를 해야 한다고 잔뜩 적어서 아예 표를 만든 뒤 나눠 주는데, 방학하는 날 나누어 주는 숙제표를 받을 때마다 동무들은 괴로운 소리를 뱉어냅니다. 다른 숙제도 숙제이지만 과목 숙제를 하자면 날마다 몇 시간씩 숙제에만 매달려도 빠듯하거든요.

만들기 숙제는 으레 '과학 만들기'입니다. 저는 다른 숙제는 그리 내키지 않아도 종이와 빨대 따위를 오리고 자르고 붙여서 집을 만든다든지 석유 캐는 배를 만든다든지 하면서 조물딱조물딱 하기를 즐겼습니다.

독후감 숙제야 여느 나날에도 한 달에 몇 차례씩 하는 숙제입니다. 걱정거리라면 여행감상문인데, 어디 여행을 다녀올 수 없는 형편일 때에는 '가까운 동무'한테 찾아갔다가 온 이야기를 이렁저렁 살을 붙여서 씁니다. "이게 무슨 여행감상문이야?" 하고 담임 선생이 꾸짖으면, "어디 멀리 나갔다가 와야지만 여행인가요. 어느 곳을 다녀오든 새롭게 느끼고 생각하면 여행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면서 대꾸했습니다.

국민학교 낮은학년을 마감하고 높은학년으로 접어드는 4학년이 되니 새로운 방학숙제 하나 생깁니다. 바로 '곤충채집'이나 '식물채집' 한 가지 하기. 여기에 '취미활동 결과' 하나 내기.

그리 길지 않은 방학 동안 우리들한테 숙제만 하라고 하는 학교라 할 만한데, 따지고 보면 여느 나날에도 언제나 숙제더미를 안기고 있던 학교였습니다. 학교라는 곳은 숙제와 성금과 체벌과 시험과 단속과 검사와 훈련과 강요가 넘치는 곳이었어요. 학교를 다니는 동안 무엇인가 알차고 즐겁게 '배운다'고 느낀 적은 한 차례조차 없었구나 싶습니다. 무언가에 길들도록 우리를 내몰았고,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우악스럽고 무시무시한 주먹과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식물채집장 들여다보기

4학년이 되어 맞이하는 여름방학 날, 과목 숙제와 탐구생활 따위와 함께 더 얹은 숙제를 담임 선생이 알려줍니다. 다른 동무들은 죽겠다는 소리를 지르며 "방학 때 하루도 놀지 말라는 얘기예요?" 하고 따집니다. 책상을 치고 걸상을 끌며 대꾸합니다. 담임 선생은 당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숙제가 참 많다고 느끼지만, 동무들이 대꾸하는 모양새가 적이 짜증스러운 듯 "왜 이리 시끄러워? 방학 첫 날부터 맞아 봐야겠어?" 하며 굵직한 몽둥이로 교탁을 내리치며 조용히 시킵니다.

새로운 방학숙제가 더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던 저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다른 숙제라면 모르지만 곤충채집이나 식물채집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취미활동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형하고 우표모으기를 해 왔거든요. 과목 숙제가 너무 많아 늘 힘들지, 다른 덤 숙제는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숙제가 없어도 이런 일은 언제나 으레 하고 있었으니, 으레 하던 그대로 숙제로 엮기만 하면 됩니다.

곤충채집도 함께 할까 하다가, 벌레를 아무렇게나 잡아서 죽여 모으는 일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 동네를 다니며 낯선 풀을 모조리 뽑아 모으는 일을 하자고 생각합니다. 벌레 한 마리도 산 목숨이라면 풀 한 포기 또한 산 목숨인데, 이무렵 여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식물채집장 들여다보기

4학년과 5학년과 6학년 여름방학 동안, 아니 방학이 아닌 동안에도 언제나, 동무들하고 놀던 가운데 틈틈이 풀을 뽑아서 그러모읍니다. 뿌리까지 알뜰히 캐야 하지만 호미 같은 연장은 없었기에(밖에서 뛰어놀며 호미를 챙길 수는 없으니까요) 손으로 땅을 파서 풀포기를 한 뿌리 두 뿌리 모읍니다. 뽑은 풀포기는 뿌리와 잎에 묻은 흙을 잘 털어낸 다음 신문 사이에 누르고 두꺼운 책들, 이를테면 전화번호부를 위에 올리고 눌러 놓습니다. 적어도 이레쯤 눌러 놓아 납작쿵을 만듭니다. 셀로판테이프(비치는 테이프)를 가늘게 잘라서 두꺼운 도화지 하얀 쪽에 붙입니다. 뿌리가 길면 뿌리는 잘라서 옆에 붙입니다. 뽑거나 캐 온 풀마다 이름이 무엇인가는 거의 어머니가 알려줍니다. 방학을 하기 앞서 제 '식물채집장'은 일찌감치 서른 장이든 쉰 장이든 꽉꽉 찹니다. 방학 동안 제 식물채집장을 꾸미려고 하는 일이란, 겉에 글씨를 종이로 파서 예쁘게 붙이기. 껍데기를 얼마나 더 예쁘고 돋보이도록 할까에 마음쓰기. 어쩌면 너무 마땅하고 자연스러울는지 모르는데, 제 식물채집장은 방학이 되기 앞서 다 이루어져 있었기에, 다른 동무하고 견주어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밖에 없고, 5학년 때 식물채집장은 학교를 통틀어 가장 잘한 방학숙제라며 '최우수'를 받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식물채집이든 곤충채집이든 방학이라는 짧은 동안에 하라고 시킬 숙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풀이든 벌레이든 사람들이 함부로 갈무리해서는 안 되기도 하지만, 이를 숙제로 여기도록 하면서 애먼 목숨을 죽이도록 하면 안 돼요. 참다이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가운데 풀을 들여다보고 벌레를 살펴보는 마음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여느 때에 이러한 일을 해서 한 해에 한 번 '그동안 죽 해 온 아이만 내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채집이나 모으기나 만들기'를 안 했다고 해서 두들겨패거나 점수를 깎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숙제가 아닌 사랑으로 커 나갈 저마다 곱고 어여쁜 어린이일 테니까요. 우리들은 아름다운 눈길을 익히고 고운 손길을 다스리며 착한 마음길을 북돋울 어린이일 테니까요.
 

집에서 키우던 나팔꽃 가운데 한 뿌리를 캐어 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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