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부지 바람피셔서 할무니한테 꼼짝도 못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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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부지 바람피셔서 할무니한테 꼼짝도 못하시는구나."
  • 김인자
  • 승인 2016.05.27 0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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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5년 저짝 살다온 할아버지
"어디야?"
"집이지."
"아직 집이믄 어떻해?"
"왜?"
"우리 오늘 만나기로 했잖아."
"목욜에 만나기로 했잖아. 오늘 비와서 몸 무겁다고..."
"그래도 만나기로 했잖아."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하다 거뜬해진 내친구 성아랑 밥먹기로 했다가 비가와서 약속이 미뤄진거로 알고 있는 나와 예정대로 보자고 하고 월차내고 기다리고 있던 내 친구 성아 만나러 백화점 가는길,
길치인 나는 오늘도 무사히 잘 가려나 걱정하고 가는데 전철 잘못타기 징크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계속 되었다. 안그래도 늦었는데  내가 가야하는 방향 전철을 반대방향가는 거로 또 잘못 탔다.
아놔, 내 다리에 네비를 달던가 해야지 매번 신경 쓰고 타는데 왜 매번 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인가.
후다닥 건너편으로 뛰어 승차장에 내려오니 할무니 한 분이 예쁘게 앉아서 헐떡거리는 나를 쳐다보신다.

"할무니, 저 전철 잘못 탔어여."
"그런거 같네. 숨 넘어간다. 숨 크게 쉬어."
"네~~
하~~~~아~.근데  할무니, 옷이 너무 예쁘세요."
"이뿌긴, 애덜이 다 사다준거야."
"진짜 색도 곱고 너무 이뿌세요."
"울 영감이 이거만 입으믄 춥다고해서 벽에 걸려져 있는거 암거나 줏어입고 나왔더니 색깔도 안 맞고 숭허지."
"아녜요, 할무니 때깔도 곱고 디자인도 너무 예뻐요."
"이뿌긴 고생을 너무 해가지고 맛이 갔어."
"할무니,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응, 고생 많이 했어.
우리집 영감이 바람을 하두 펴가지고
내가 애들 서히 멕이고 키우느라 내가 좋아하는 서예도 못하고 이렇게 폭삭 늙어뿌렀어."
"우와, 할머니 서예하시고 싶으셨어요?"
"응, 서예하고 싶어가지고 내가 야간으로 공부 가르쳐주는데는 죄다 알아보구 다녔었지."
"그래서 서예 하셨어요?"
"하기는 뭘햐. 애들 차비도 줘야하고 내 차비도 많이 들어야하고 해서 못했지."
"에구 많이 하구 싶으셨을건데 서운하셨겠어여."
"응, 너무 하구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해서 많이 서운했어. 그런데 우리 친정오빠 처제 남편이 인쇄소를 했어 그래서 내가 종이를 엄청 많이 얻어왔지. 오빠 모르게... 십오 년을 그걸 끌고 다녔어. 이사갈 때 마다..."
"와, 할무니 대단하시다. 붓글씨 써가지고요?"
"쓰기는~ 쓰고 싶어서 종이만 맨날 끌고 다녔지."
"와~~~할무니 멋지다아."

"할무니 사진 한 장 찍어두 되요?"
"사진은 뭣허러?"
"할무니 이뻐서요."
자 김치~
"와 울 할무니 고생하셨다고 하시는데 고생 하나도 안한 얼굴이세요. 참 고우세여."
"남들도 다 그렇게 말해. 이거 볼래?  손은 더 이뻐. 손보믄 부잣집 마나님손 같다고 해."
"와~ 진짜 그러시네여."
전철에 올라타고도 73세 이기애할머니의 재밌는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이책 읽어봤어?
2045,무지개원리,홍대리,훈장통,시크릿,꿈꾸는 다락방"
"우와, 할무니 이책  다 할무니가 사서 보셨어요?"
"그럼, 내가 다 사서 봤지. 우리집에 책이 엄청 많아. 난 책읽는게 좋아.

책 읽다가 밥도 태우고 그랬어."
"할아부지 뭐라고 안하세요?"
"뭐라고 하긴. 감히 나한테.."
"아, 할아부지 바람피셔서 할무니한테 꼼짝도 못하시는구나."
"응, 갔다 왔어."
"갔다와여? 어딜여?"
"15년 저짝 가서 살다가 왔어."
"아니, 할무니 근데 받아주셨어요?"
"없는 거보다 낫거든."
"뭐가 나은데요?"
"못질도 해주고 어지께는 구두도 닦아주고 빗물받아 옥상청소도 해주고 ‥그리고 물 함지박이 찢어진 것도 실로 꼬매  테잎부쳐서 깜쪽같이 물 받게 해주고...
아쿵 나좀 봐 임학역에서 내려야 하는디."
이기애할무니 나한테 얘기하시다가 한 정거장을 더 가셨다.
"할무니 뛰지마시고 조심히 가셔요."
"응 길 잃어버리지말고 잘 가여. 가다가 길잃어버리믄 나한테 전화 좀 해봐여~."
네~~
나는 길치여도 안쫀다아.
왜냐? 내가 길을 잃어버려도 네비 할미들이 이 세상 어디에든 계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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