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도 봄이 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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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도 봄이 오니
  • 최일화
  • 승인 2016.05.27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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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11)숙명적인 시인의 삶, 홍윤숙 시집 <그 소식>을 읽고

봄이 오니
 
이 나이에도
봄이 오니 내 마음 마른 살갗에
푸른 잎 돋아날 것 같고
어디선가 그리운 소식 올 것도 같은
조용히 들뜨며 물살치는
생명의 불씨 피어오르는
황홀한 떨림알 수 없는 그리움

하늘 끝 아득하게 울리는
어린 날 고향 달운리 안마을의
시냇물 소리
손 끝 적시고 마음 적시고
돌돌돌 끝도 없이 굽이친다
잔돌 사이로 내 가슴 사이로
바람도 한 솔기 따라온다
뽀얀 아지랑이 사이 사이로
사 · 이 사 · 이로
아! 나 아직 살아 숨쉬네
( 시 <봄이 오니> 전문)

홍윤숙 시인은 192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47년 문예신보로 등단하여 <타관의 햇살>, <장식론>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냈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었으며 2015년 10월 12일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는 시인의 나이 88세이던 2012년에 펴낸 시집 <그 소식>에 수록되어 있다. 그 연세에 어떻게 이런 소녀적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지 경이롭다. 시인 스스로도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곤 ‘이 나이에’라고 첫 운을 떼고 있듯이 이 시는 봄을 맞이하는 노 시인의 소회를 담백한 어조로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봄이 오는 어느 날 노쇠하여 핏기 없는 자신의 살갗에도 푸른 잎이 돋아나고 어디선가 그리운 소식이 올 것만 같다며 봄을 맞이하는 설렘을 표현하고 있다. 아직도 몸속에서 생명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황홀한 떨림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2연에서는 고향마을의 봄 풍경을 회상하고 있다. 시냇물 소리는 손끝을 적시고 마음을 적시고 그 가슴 사이로 고향의 바람은 불어온다며 옛날을 떠올리고 있다. 오래 전 추억에 젖어 감탄사를 발하며 시는 끝난다. ‘아! 나 아직 살아 숨 쉬네!’

“50여 년 시를 써왔으나 나 역시 삶이 완전무결하게 행복하고 충만 되어 있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 비탄, 결핍, 욕망들이 붓을 들게 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나의 시는 마음의 역사, 자아 내면의 고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 성직자는 이렇게 말한다. ‘악(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 한다’고. 고통이 없고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원할 일도 없는 것이다. 결국 고통은 생의 알맹이, 핵심이며 인간을 존재케 하는 생명의 불이다. 따라서 문학의 중심 주제는 고통이며 그것을 밝히고 증언하면서 그 고통에서 희망 또는 해답을 끌어내는 고통의 미학이라고 말 할 수 있다.“ ― 시인의 산문 중에서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혹시 실향민이기 때문에 고향이 더 그리운 것일까 하면서 나의 어린 시절과 고향을 생각해본다. 나도 시인의 나이가 되면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 나의 고향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내 어린 시절엔 전깃불이 없었고 라디오조차 없었다. 앞으로는 논과 개천, 뒤로는 밭과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뒤편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새 둥지를 쫒고 산딸기를 따던 동산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저수지로 가고 칡뿌리를 캐러가던 길가엔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섰다.

초등학교가 새로 생기고 면사무소는 읍사무소로 승격되었다. 이런 변화를 나는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만 감으면, 아니 생각이 어린 시절로 미치면 옛날의 모습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맑은 시냇물 속 모래바닥이며 그 모래바닥에 놀던 모래무지며 송사리가 떠오르고 소가 몇 마리 매어있던 냇둑의 커다란 공터, 그 공터에 구불구불한 노송 몇 그루가 한적한 고향의 운치를 자아내곤 했다. 냇둑 한 편에 수령 수백 년의 느티나무 몇 그루가 있어 해마다 5월이면 그 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곤 했다. 그러나 농지 정리를 하며 느티나무도 노송도 모두 베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없는 고향 풍경이 생각 속에선 그대로 남아 있다. 노시인도 고향을 생각하는 심정이 나와 같으리라. 생각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모습들이 눈앞에 보고 있듯 선명할 것이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 시집에 이런 시를 실었을 것이다. 반드시 실향민이기 때문에 이런 시를 썼다고 볼 수는 없다. 실향민이 아니어도 생의 마지각 단계에서 삶의 보금자리였던 고향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숙명 혹은 인지상정으로 이런 시를 쓸 수 있다. 홍윤숙 시인은 오래 전에 시 <장식론>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장식론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기 때문이다.

(씻은 무)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보면
쇼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 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 장의 낙엽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홍윤숙 시인의 시 <장식론> 전문)

이 작품은 1968년에 펴낸 시집 <장식론>에 수록되어 있지만 문예지 발표연도는 1964년이다. 시인의 나이 40대 초반이다. 그때 시인은 늙어가는 자신을 감지하고 몸에 장식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자신의 손에서 물기 없는 한 장의 낙엽을 느끼던 시인은 50 년 세월이 흘러 자신의 핏기 없이 마른 살갗을 보며 다시 회한을 더듬는다. 90가까운 시인의 옛날 육성을 다시 듣는 일은 경이롭다. 모든 독자는 이 시인의 목소리에 독자 자신의 목소리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 훗날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절실하게 들려올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이 시인을 통해 미리 듣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목소리, 장차 우리가 듣게 될 우리의 내면의 목소리를 우리는 지금 시인을 통해 미리 듣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인의 시를 읽어야 한다. 시인은 90평생을 시 하나 의지 삼아 살아왔음을 시를 읽으며 깨닫는다. 그로써 시가 지상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詩 1

사는 일도 죽는 일도 내 뜻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힘에 의해
살려지고 죽어가는 황폐한 지상의 돌밭에서
날마다 부질없는 노고의 집 짓느라
땀 흘리며
보이지 않는 무지개 쫒아
나만의 장미 한 송이 찾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걷고 걸어 밤을 지새우고
무한세월 목말랐던 그 무상한
시는 나에게 무엇일까
오늘 나를 이 자리에 서 있게 하고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서 걷게 하는
내 살 속의 뼈 뼈 속의 골수

발밑에 어둠 다가오고
생의 멀고 아득한 길도 끝나가는 시간
꿈이란 허망, 희망이란 짐 염치없어
모두 내려놓고
이제 가벼운 날개 되기 위해
남마다 허물벗기에 마음 다지고 다지면서도
아직 못 다 버린 배냇병
슬픈 시 하나 내 목을 조여
살이 내린다
(시 <詩 1> 전문)

이 시인에 의하면 시는 ‘나만의 장미 한 송이’이며 ‘살 속의 뼈 뼛속의 골수’이며 ‘아직 못 다 버린 배냇병’이다. 이 시인은 무상한 세월 장미 한 송이 찾기 위해 살아왔고 쓰러진 나를 다시 걷게 하는 살 속의 뼈 뼈 속의 골수 같은 시를 의지해 살아왔다. 희망도 꿈도 모두 내려놓은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배냇병처럼 시를 붙들고 있다. 이 시인에게 시란 시인과 공동운명체이며 운명이다. 그리고 신앙이며 목숨과도 같은 존재다. 시인의 시에 대한 경건한 숙명의식은 작금의 문단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를 향한 절대적인 가치 부여, 영혼의 불씨처럼 시를 안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시인에게 시는 바로 생명이며 구원의 샘물인 셈이다.

詩 2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하늘의 구름, 무지개
오작교 따라가면
너를 만날까
가시에 찔리고
비바람 맞으며
고개를 넘고 골짜기 돌아
날마다 네게로 가고 갔지만
너는 어디에도 없고
나는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열병
어디선가 만날 그날을 위해
목숨 저미는 탯줄의 숙명
그 숙제 풀기 위해
나는 산다
가시에 찔리고
비바람 맞으며
 ( 시 <詩 2>전문)

시인에게 시는 오작교에서 견우를 만나던 직녀처럼 영원한 이성적 대상일 수도 있고, 모든 고난을 겪으며 찾아 나선 절대적인 구원의 초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여전히 찾아가고 있는 미지의 대상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열망의 대상이며 만날 그날을 위한 목숨 저미는 숙명이며 생의 마지막 숙제인 것이다. 어쩌면 풀 수 없는 영원한 숙제인지 모른다. 시인에겐 각자의 시론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시인의 숫자만큼 시론은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 찾아내려고 하는 궁극의 시가 이렇게 치열하고 온 정신을 다하고 한 생애를 다하도록 절실한 그 무엇이라면 이 시인의 시론은 어떤 것일까. 시인의 산문 한 토막 인용한다. “적어도 문학은 자신들의 고통을, 나아가서는 세계의 고통을 밝혀내고 증언함으로써 인간의 흐려진 시력, 어두운 청각을 깨우치고 고통에 마주 서게 함으로써 상실한 자아의 회복과 자기 성취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이렇게 절대적인 기준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 시에 대한 그의 이런 엄격한 시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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