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의 여름밤
상태바
섬에서의 여름밤
  • 이세기
  • 승인 2016.06.09 0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세기의 인천 섬이야기(16)] 이세기 / 시인

<억새와 수크령으로 가득한 굴업도의 여름 산기슭>
 

여름산이 온통 싯푸르다. 초여름 산기슭 억새는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푸르게 날을 세운 억새를 보면 마음마저 서늘해진다. 마음 한편에 차가운 기운을 품은 듯하다. 여름이 타들어 갈수록!

벌써부터 모기가 극성이다. 웬 모기가 이렇게 많은지 마당에 나가 있기가 두렵다. 팔뚝이며 복숭아뼈 등을 모기가 맹폭한다. 나는 이럴 때마다 파초가 우일신(又日新)하는 이 초여름의 즐거움을 빼앗는 모기가 마냥 싫어진다. 방은 또 어떠한가. 마당 숲 탓에 방으로 들어온 모기들이 극성맞다. 맑게 씻긴 보름달이 떠오르는 처서까지 각다귀같이 달려드는 모기가 나는 밉다. 쏘이면 또 얼마나 독한가.

독한 것으로 따지자면 산모기와 섬모기만한 것도 없다. 맹렬하게 돌진하는 모기는 애초에 타협이라는 것을 모르는 일방의 싸움꾼. 타협 없는 맹폭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그러나 때론 모기들이 생각날 때도 있다. 숲이 점점 사라지는 도시에서 여름 한철 나를 괴롭히며 ‘따끔’한 각성제가 돼주는 모기라도 없었으면 한심한 나날일 것이다. 그러나 모기를 퇴치할 궁리를 하면서 나는 원망하듯 여름밤 하늘을 올려다본다. 왜 이리 모기가 극성이누?
섬에도 모기를 퇴치하는 방법이 있다. 억새풀이다. 덕적군도 섬사람들은 억새를 ‘악새’라고 한다. 흔히 ‘악새풀’이라고 부른다. 갈대를 억새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명칭이다. 갈대와 억새는 다르다.

갈대가 해안 수초지대에서 자란다면, 억새는 산기슭에서 자란다. 갈대가 1m 이상 자란다면 억새는 50cm 정도다. 둘 다 꽃이 핀다. 억새는 여러 종류가 있다. 초가을 산야에 은빛물결을 이루는 억새가 있는가하면 수크령은 가을산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반면에 갈대는 여름 해안 개울가에 시원함을 준다. 푸른 대며 이파리가 서늘한 청량감을 준다. 꽃이 피고 누렇게 시든 가을 갈대는 풍치를 더한다.

억새와 수크령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는 섬으로는 굴업도가 있다. 초여름 산등성이는 온통 억새다. 개머리초지의 수크령은 봄부터 가을까지 장관이다. 5월 무렵 개머리 초지는 왕은점표범나비의 천국이 된다. 가을 햇살에 잘게 부서진 황금빛 수크령은 짙은 남빛 바다색과 어울려 극치를 이룬다.

시퍼런 갈대로는 방석을 만들기도 하고 배를 만들어 시냇가에 띄우기도 한다. 억새는 여치집을 멋지게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된다. 푸른 억새 줄기로 만든 여치집에서 들리는 여치의 울음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곡조인가.
이것말고도 억새와 수크령은 특별난 쓰임새가 있다. 천연의 모기 퇴치제이다. 섬에서 시퍼런 억새풀은 천연의 모기향이 된다. ‘사그락사그락’ 이파리가 부딪치는 소리에 그만 모기들이나 해충들이 놀라 도망간다. 소리만 들어도 서늘하다. 어찌보면 박수무당의 방울요령과도 같은 몸짓이다. 방 구석구석 화(禍)를 내쫓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별난 퇴치법은 벌레를 죽이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잠들기 전 방에서 잠시 모기와 나방 같은 벌레를 내쫓는 것이다. 그러니까 잠시 이들에게서 방을 빌려 하룻밤을 묵고 나면 방은 다시 모기 차지가 된다. 쫓고 쫓기는 하안거(夏安居)인 셈이다.

나는 지금도 여름밤의 섬을 떠올릴 때면, 억새나 수크령 풀을 한 낫 베어와 모기장을 치기 전에 방 구석구석을 휘두르며 모기를 쫓던 모습이 선하다. 그리고는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모깃불은 보름달이 뜬 여름밤보다 그믐의 여름밤일수록 좋다. 칠흑의 밤일수록 모깃불은 실오라기처럼 찬연하게 오른다. 바람이 부는 날보다 후덥지근한 날일수록 모깃불이 처연하다. 실오라기 같이 풀린 연기는 요염하기조차 하다.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을 가르며 꼿꼿하게 올라가는 연기야말로 여름밤의 절경이다.

흔한 모기향은 인공의 화학약품이지만 억새풀은 천연의 모깃불이다. 지금도 섬에서는 변함이 없이 모깃불로 억새풀을 태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연에서 길을 구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에는 그 나름의 지혜가 있다. 대대로 계승되어온 군집의 지혜가 아니었던가.

모깃불에는 탄복의 힘이 있다. 여름밤 마당에서 억새풀로 피운 모깃불 더미에 약쑥을 더하면 향긋한 냄새가 여름밤을 가득 채운다. 약쑥은 구절초가 제격이다. 제법 자란 구절초를 낫으로 베어 응달에서 잘 말려 모깃불로 사용한다. 모기 쫓기에는 젖은 구절초도 효과가 좋다. 은은한 모깃불이 밤하늘을 오른다. 보는 내내 덩달아 여름밤이 호사롭다. 향도 그만이다.

칠흑의 어둠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 어디 연기뿐이랴. 모든 상념이 밑도 끝도 없이 은하수 길로 빨려들 것만 같다.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아서 흥미진지하다. 시작은 있되,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그것을 나는 칠흑의 여름밤이 피어낸 푸른 꿈과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 꿈은 점점 야위어 간다. 한여름 밤 마당에 누워 풀베개를 베고 밤하늘을 보며 꿈꾸었던 은하수와 달과 계수나무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꿈을 꾸는 것은, 꿈이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갈 힘이 바로 꿈이기 때문이다. 꿈이 현실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