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신설(新雪)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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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신설(新雪)을 꿈꾸며
  • 이설야
  • 승인 2016.06.1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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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쓴 인천(5) - 한하운의 시
  

  1975년 2월 28일, 인천 부평 십정동에서 자신의 시 ‘답화귀 踏花歸’처럼 꽃을 밟으며 하늘로 돌아간 시인이 있다.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리.”(‘파랑새’)라고 노래 부르던 시인, “피―ㄹ 닐리리”(‘보리피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보리피리를 불던 시인. “가갸 거겨/고규 구규/그기 가”(‘개구리’)로 가득한 개구리 울음을 들을 줄 아는 시인 한하운.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벌(罰)’ 부분>

  열일곱 살(1936년)의 한하운에게 찾아온 문둥병은, 그를 죄인처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벌(罰)’)서며 살게 했다. 세상은 언제나 열리지 않는 문(門)이었다. “병원 문은 집집이 닫혀 있”고, “약국이란 약국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시인은 그때마다 “막 인력거에 누워서 가는 환자”(‘열리지 않는 문(門)’)를 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치르듯이, 매일 형벌 같은 삶을 살았다. 그가 인식한 세계는 “인간폐업”과 “인간 공동묘지”였다.

  한하운 시인은 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지만, 문둥병으로 인해 거지가 되어, 혹독한 겨울 여관비를 마련하려고 ‘파랑새’, ‘비오는 길’, ‘개구리’를 도화지에 써서 다방  등을 돌아다니며 시를 팔러 다녔다. 그러던 중에 정지용과 이용악을 만나게 된다. 정지용은 “오늘 밤 돈이 없으니 이 만년필을 갖다가 쓰시오”(<한하운 전집>, 561쪽)라며 손에 쥐여 주었지만, 한하운은 그 만년필을 두고 뛰어나왔다고 한다.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밤을 새”우다가, “배꼽 아래 손을 넣으면/37도의 체온이/한 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뭉클 쥐어”(‘목숨’)지는 숱한 밤들을 지내던 어느 날, 이병철과 박거영 등의 눈에 띄어 1949년 30세 되던 해, 월간 종합 잡지 <신천지> 4월호에 ‘전라도 길’외 12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인이 된다. 그리고 5월에는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를 냈다. 이 시집의 표지 안쪽에는 시인의 수인(手印)이 찍혀 있다. “신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지고,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전라도(全羅道) 길’) 길을 갔던 시인은, “간밤에 얼어서/손가락이 한 마디/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손가락 한 마디’)졌는데, 나머지 손가락마저 다 떨어질까 두려워 자신의 수인(手印)을 첫 시집에 미리 찍어놓았을지도 모른다.


 
<한하운시초>(표지 안쪽의 한하운 수인手印)     <한하운시초>(정음사, 1949.5.30.초판)    

  
   <한하운 시초>는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우리 문단의 대문호이자, 세계문학의 반열에 우뚝 선 고은은 미룡초등학교(지금 군산대 자리) 시절, 누군가 길에 흘리고 간 <한하운 시초>를 주워 밤 새워 읽으며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49년 8월, 한하운은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하천 부락(下川部落)에 잠시 정착했다가 1949년 12월 30일 밤, 70여 명의 나병환자를 이끌고 부평 공동묘지 골짜기로 왔다. 이후 이 골짜기 안에는 600여 명에 달하는 환자들이 모여 그들만의 자치회를 조직하였다. 나병환자들의 집단촌이었던 ‘성계원’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었는데, 지금의 인천가족공원(부평공동묘지)의 위쪽 산속에 있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농장을 설립하여, 한때 인천 달걀의 대부분을 공급했다고 한다.


  부평(富平) 성계원에 진달래 피면
  이 세상 울고 온 문둥이는 목쉬어.
                  <여가(驪歌) 부분>

  한하운은 25년간 인천 부평에 살았다. 필화사건과 간첩 논란을 겪은 시 ‘보리피리’(1953)와 이후 출간한 작품집 등이 모두 부평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인천 문학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특히 1950년대 전후문학의 큰 줄기 속에서 한하운의 시가 ‘소수자문학(하위자문학)’의 최전선에 있었다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전국 최초이자, 인천에서도 최초인 나환자 집단촌을 만든 시인 한하운은 지금 인천의 중요한 시인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인간 공동묘지”로 표현했던 그들만의 나라, 그 깊은 부평 공동묘지 골짜기에 꽃잎이 휘날리고, 낙엽이 부서지고, 함박눈이 푹푹 내리는 “신설(新雪)”을 갈망했던 한하운의 시가 지금 부평 만월산을 지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신설新雪


눈이 오는가.

나요양소(癩療養所)
인간 공동묘지에
함박눈이 푹 푹 나린다.

추억같이……
추억같이……

고요히 눈 오는 밤은
추억을 견뎌야 하는 밤이다.

흰 눈이 차가운 흰 눈이
따스한 인정으로 내 몸에 퍼붓는다.

이 백설 천지에

이렇게 머뭇거리며
눈을 맞고만 싶은 밤이다.

눈이 오는가.

유형지流刑地
나요양소
인간 공동묘지에.

하늘 아득한 하늘에서
흰 편지가 소식처럼
이다지도 마구 오는가.

흰 편지따라 소식따라
길 떠나고픈 눈 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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