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양민 학살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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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양민 학살을 그리다
  • 이한수
  • 승인 2016.06.2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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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 (18)『손님』, 『작은 연못』

6.25전쟁이 일어난 지 66년 되었습니다. 1950년에 ‘북괴 남침’으로 발발하여 1953년 종전될 때까지 3년간의 끔찍한 동족상잔이라고 귀에 닳도록 들어 인이 박였는데, 요즘 어느 학자가 ‘한국전쟁’이 아니고 ‘동아시아30년전쟁’이라고 설파해 참 놀라웠습니다. 1945년 일제 패망부터 1973년 베트남전 종전까지 장장 30년 동안 한국, 일본, 중국, 소련, 인도차이나 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라는 겁니다. 종전협정이 맺어지지 않았으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전쟁이 아직 끝난 건 아니지요. 냉전시대가 끝난 게 언제인데 우린 아직도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아이들이 떼죽음(세월호) 당한 사고를 두고도 ‘서북청년단재건위’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빨갱이’ 막말을 하고 있으니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과언이 아닙니다.
 
이념(理念)이니 주의(主意)니 다 생뚱맞은 백성들이 어찌하여 사지(死地)로 휩쓸려 들게 되었는지 밝히려면 이 비극의 역사적 연원을 추적해야 하겠지만 그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게 먼저입니다. 하루 밥벌이가 궁한 이들이 자기 처지를 기록하는 일은 가당찮습니다. 이들 곤한 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그려내는 일을 지식인 예술가들이 해야 합니다. 참상의 현장을 온몸으로 기록하고, 왜 이런 끔찍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된 작업으로 위대한 팩션(팩트+픽션)은 탄생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역사소설로 대중은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아픔을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는 일도 무척 힘겨운 일인데 거기에다 시간을 뛰어넘는 통찰까지 감당해야 하니 그 일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입니까. 그 분들의 노고에 머리 숙여 절합니다.

 

<피카소 Massacre in Korea(한국에서의 학살)>
 

위대한 예술가 파블로 피카소가 우리 분단 문학에 경종을 울린 게 그 언제입니까.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지구 반대편 한국 황해도에서 벌어진 '신천 양민 학살'을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은 미국 당국에 의해 1980년대까지 전시가 금지되었었고 한국에서는 1969년에 이 작품을 출판한 업자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이 왜 미국과 한국 정부에 의해 불온시 되었을까요. 그의 예술은 전쟁이 한창이던 당대에 이미 한국전쟁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회화 작품 한 점으로 진실 규명을 예언했으니 그의 위대한 작가 정신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신천 학살을 주동한 반공청년단은 제주 4.3 사건에서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서북청년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모여서 1946년 11월에 창단한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들은 씨를 말려야한다’며 제주도로 들어가 학살극을 벌였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급진적으로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많은 지주들이 북한의 공산주의에 대해 원한을 갖게 되고 남하한 이들이 반공단체를 만들어 빨갱이 씨를 말리겠다고 보복에 나서는데 이승만 정권을 이 집단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전위 조직으로 활용합니다. 제주에서 일어난 4.3 학살도 이들이 주도했고, 김구 선생을 암살하는 등 테러에도 앞장섰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백골부대로 편성되어 북진의 선두에 섰다고 합니다.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양민 학살을 주도한 집단도 극우 청년단체였으니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충분히 짐작할 만합니다.
 
황해도에서 무고한 양민이 학살된 지 반 세기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신천 학살 사건’을 다룬 소설 황석영의 [손님]이 나옵니다. 북한을 방문했다 하여 감옥살이를 5년이나 하고 나온 뒤에 쓴 작품입니다. 이념의 장벽을 넘어 그리운 고향엘 다녀왔으니 신천 얘기를 안 쓸 수가 없었겠지요. 미국에 사는 한국인 목사가 형의 유골을 고향에 묻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이야기로 그려졌습니다. 북한 당국에서 설립한 ‘신천학살박물관’은 이 학살극이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선전하지만 소설은 우익기독교 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 ‘류요섭’ 목사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 ‘유태영’ 목사는 소설이 그리고 있는 동족간의 학살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향 신천을 방문한 경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 북에서 학살자의 가족들에게 심한 보복을 가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아주 잘살고 있더란 말입니다. 오히려 형수님은 자신은 ‘당의 배려로 잘살고 있다’면서 객지 생활, 외국 생활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고 저를 위로했어요. 북에서는 아무런 보복 없이 이들을 보듬어주었던 겁니다.” ‘유태영’ 목사의 형은 기독교청년단 소속으로 신천의 학살에 적극 가담한 자였는데 어떻게 그의 가족들은 아무런 보복도 당하지 않고 잘 살고 있을까요. 남쪽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일만 봐도 ‘신천리 사건’의 진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위원회’ 보고서에 이런 기록이 들어 있습니다. “1950년 12월 7일, 신천군 원암리의 창고 두 군데에서 900명의 남녀 학살이 발생했다. 건물 안에는 어린아이들도 200여 명 있었다. 미군들은 이들의 옷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창문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건물 안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의 두 아이를 창 밖으로 밀어냈다. 한 아이는 총에 맞았지만 한 아이는 도망쳤다. 어머니는 불에 타 죽었다. 해리슨과 다른 장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미국 당국이 피카소 그림이 전시되는 것을 막았던 것처럼 ‘신천리 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을 달가워 할 리가 없겠지요. 3만 5천여 명이나 죽은 대 학살극이 동포들끼리 서로 싸워 저질러졌다는 소설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 학살 사건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건 ‘노근리 학살’ 사건일 겁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에 전남 남원에서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이 처음 일어나고 수많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대부분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남원 첫 사건에서 죽은 사람 중에 18살 먹은 젊은이가 둘 있었으니 양민 학살이 분명하지요. ‘노근리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군에 있는 산골 오지 마을에서 벌어졌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40여 년이 지나 생존자 정은용에 의해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화 소설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은용은 노근리 학살 당시 5살짜리 아들과 3살짜리 딸을 잃고 부인은 총상을 입는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으로 평생 노근리 학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1994년에 이 작품을 내고 그의 노고는 비로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999년에는 AP통신에 의해 특종 보도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아 미군의 만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화 [작은 연못] 피난길 학살 장면>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는 2006년에 만화 [노근리 이야기]로 그려지고 2010년에 영화 [작은 연못]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이 끔찍한 참상이 우리 모두에게 알려졌습니다. 영화를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투자자도 없이 배우들이 출연료를 받지 않고 연기에 나서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피난을 가야 하나’ 두른거리기는 하지만 전란의 위기감은 눈곱만치도 느낄 수 없는 산골 오지 마을에 미군이 들어와 피난을 종용하자 마을 사람들은 일제 때에도 무사했다며 뒷산으로 피신을 합니다. 또 미군이 마을에 들어와 빨리 마을을 비우라며 강압을 하자 마을 사람들은 마지못해 짐보따리를 싸 피난길에 나섭니다. 산골 오지라 피난민이라 해봐야 노근리 마을 주민이 전부인데 느닷없이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피난길은 생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들이 나타난 줄 알고 급히 굴다리 밑으로 피했지만 총탄은 밤새도록 날아오고 결국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죽고 맙니다.

 

<영화 [작은 연못] ‘쌍굴다리’ 학살 장면>
 

어떻게 무고한 양민에게 이렇게 무차별 총격을 가할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한국전쟁 때 미군이 저지른 무차별 폭격 사실을 살펴보면 노근리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경북 예천과 충북 단양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격으로 주민이 몰살당한 사건은 비교적 많이 알려진 사건인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 120여 건을 넘는다고 합니다. 미군이 비행기로 민가를 폭격할 때 주로 사용한 무기가 네이팜탄인데 이 폭탄은 끔찍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네이팜탄은 공중에서 1차 폭발하여 수많은 폭탄으로 쪼개져서 비 오듯이 쏟아져 내리는데 주변을 온통 불태워 잿더미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폭탄입니다. 이 끔찍한 무차별 살상무기가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사용되었고 한국전쟁 때 사용한 폭탄의 양이 태평양전쟁 전 기간 동안 사용한 양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폭탄 한 발이면 작은 운동장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벽돌까지 녹아내렸다고 하는데 이 끔찍한 네이팜탄이 북한에만 150만 발 퍼부어졌고 도시 대부분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미군은 양민과 군인을 가려 적법하게 공격할 의사가 아예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 전 지역을 초토화한 네이팜탄이 인천상륙작전에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 미리 정찰을 해서 민간인이 사는 지역과 군부대가 주둔한 지역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네이팜탄으로 무차별 폭격을 하여 월미도 주민 대부분이 불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월미도 주민 생존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10일 날 새벽에 휘발유를 끼얹는 줄 알았어. 그게 네이팜탄이래. 그게 떨어지고 나면 완전히 불바다가 되는 거야. 비행기가 서쪽에서 떠서 북쪽으로 가는데 우리 동네만 폭격하는 거야. 그 옆에 미국부대는 놔두고. 그 다음에 기총사격을 하고. 나도 그 당시 팬티바람으로 기어 도망갔어. 낮에 도망갔던 사람들이 꾸역꾸역 왔지. 가보니 집이 다 탔어. 아무것도 남은 없어. 가족들은 다 죽은 거야. 자는 사람들을 모두 몰살한 거야. 우리는 몇 백 명이 죽었는지 몰라. 양놈들이 시신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렸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들이 팔순 노인이 된 지금에도 동족상잔의 비극은 우리의 사회심리를 지배하는 트라우마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이념 갈등으로 부대끼고 있는 건 처참한 기억에 얽매여 있기 때문일까요?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에서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팔순 할머니를 두고 ‘한을 품은 세대가 속속 죽어야 뭔 일이 된다’며 전후 세대가 푸념하는 장면이 얼핏 떠오르는데 그렇게 잊혀지면 만사 다 잘 풀릴까요. 상흔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긴 해야 하겠지만 이념 갈등을 부추겨 권력을 유지하려는 구태 정치가 여전하니 그래서 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는데 이 전쟁이 내전(內戰)이 맞는지 분명하게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학자가 ‘동아시아30년전쟁’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이 전쟁의 본질이 외세의 대리전이었다면 그렇게 잊혀져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진실을 밝히는 일은 아직도 풀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문학은 이런 시대적 상황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전쟁의 끔찍함을 형상화한 작품은 전란 중에도 많이 나왔으며 지금도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문학 하는 사람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다고 그냥 치유가 될 리도 없고 다음 생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넋두리만 하고 앉아 있을 수도 없습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면하지 말고 그 고통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 처참했던 광경을 직시한다는 게 이만저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지만 그 참상을 직시해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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