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스런 영화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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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스런 영화 '인천상륙작전'
  • 이한수
  • 승인 2016.07.05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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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팩션](19) 이원규 [황해]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가 곧 개봉이 된다고 합니다. 전쟁 영웅 맥아더(배우 리암 리슨)를 재조명한 작품이며, 상륙 작전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덕적도와 팔미도 등대에 침투한 특수부대의 활약상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져 역대 최고 흥행 성적을 올릴 것으로 예상들을 한답니다. 영화가 나오기 전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어쭙잖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스토리를 접하면서 기대감은커녕 걱정이 앞섰습니다. 상륙 작전 때 무차별 폭격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통한을 또 덧나게 할 게 뻔하고, 원자탄을 퍼부어 싹쓸이를 하자고 주장하던 끔찍한 전쟁광을 영웅으로 미화하는 게 이 시대에 가당키나 한지 울분이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상륙작전 때 불타는 인천항>
 

맥아더는 멀찍이 앞바다 함상(艦上)에 앉아서 인천이 불바다가 되는 장면을 구경했으니 그 불구덩이 속에서 끔찍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참상을 볼 수 없었겠지요. 덕적도 영흥도에 침투한 특수부대가 등대를 확보하면서 주민 대부분을 먹염(흑도)으로 끌고 들어가 살해한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이 작전을 영웅적 쾌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기판의 수를 읽듯 멀찍이 물러나 조망(眺望)하는 역사는 참 비인간적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자칫 우리네 삶을 승리와 패배 패러다임으로 각인시켜 사람들을 비정하게 만들까봐 걱정입니다.

 

<‘부평도서관’에서 어렵게 찾은 소설 [황해]>

 
무차별 포격 때 그 불구덩이 속에 있었던 사람들, 점령군처럼 진주한 군인들에게 부역자로 몰려 떼죽음 당한 보통 사람들이 겪은 인천상륙작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원규의 소설 [황해]는 인천 사람이 들려주는, 가난한 보통 사람이 겪은 분단소설의 전형입니다. 대부분의 분단 소설들이 이념 갈등으로 시대를 조감(鳥瞰)하거나 아니면 역사의식 없이 사건에 매몰되거나 둘 중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아쉬웠는데 [황해]는 지식인의 시각에 매몰되지 않고 민중적 시각을 확보하면서 역사에 대한 통찰을 형상화해낸 작품으로 진실한 감동을 줍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이 땅 역사를 그려내면서 누가 봐도 그 시대에 공감하도록 전형성을 획득해 내었으니 인천 사람으로서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소설은 해방되기 전 고학으로 어렵게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를 졸업한 ‘서준혁’이 마쓰다 정미소 노동쟁의를 이끌다 체포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서준혁’은 대아도(현 덕적도)에서 태어나 뱃사공의 아들로 가난하게 자랐지만 선주(船主)의 후원으로 중학교까지 다니게 되었는데 사공들의 수익 분배율을 올려달라는 연판장을 돌렸다가 선주의 미움을 사 학비 후원이 끊어지고 막일을 하면서 고생 고생해 학교를 마치게 됩니다. 졸업을 하고 황도(대부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인천항 정미공장으로 옮겨 쟁의를 주도해 경찰서에 잡혀 들어온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정미소 모습(조우성, [인천 이야기 100장면])>
 

채만식의 [탁류]와 조정래의 [아리랑]이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 수탈의 현장으로 그려낸 군산의 미두(곡물 투기)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인천에서도 미두가 성행했다는 건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경기 지역에서 생산된 미곡은 인천 욱정(旭町, 현 신흥동) 일대 정미소에서 가공되어 일본으로 반출되었는데 지금의 국제여객터미널 길 건너가 정미공장이 밀집해 있던 곳으로 이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이 일본인 감독의 행패를 견디다 못해 쟁의를 일으키는 일이 잦았고 1926년에는 9개 정미소 직공 3천여 명이 연대하여 총파업을 벌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준혁’의 아버지 ‘서달호’와 학생 때 따르던 ‘한관호’ 선생이 인천경찰서로 찾아와 각서를 쓰고 ‘준혁’을 데리고 나옵니다. 한 선생님의 딸 ‘정임’도 함께 와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올라가 도시락을 푸는데 ‘서준혁’은 그 도시락을 도로 싸서 경찰서 동지들에게 사식으로 넣어줍니다. ‘정임’은 남몰래 ‘준혁’을 연모하고 있었는데 ‘준혁’이 워낙 자기를 냉담하게 대해 겉으로 드러낼 엄두를 못 냅니다. 한 선생님은 ‘서준혁’이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에 다닐 때 사회 과목을 맡아 가르치던 선생님으로 동생 ‘관수‘가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일제의 탄압을 받는 걸 지켜봐온 터라 ‘서준혁’의 정의감을 높이 사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공회당, 인천경찰서 앞 거리>
 

<같은 위치에서 바라본 현재 모습>
 

필자에게는 이 장면이 남다른 감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독립투사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인천경찰서는 제가 근무하는 인성학원 바로 길 건너(육교 뒤 빌라)에 있었으며 ‘준혁’ 부자와 ‘정임’ 부녀가가 함께 올랐던 만국공원에는 철거, 이전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맥아더 동산이 우뚝 서 있습니다. 실로 우리 분단 역사의 아픈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 그 시대 아픔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매일 올려다보는 만국공원을 작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반 세기 동안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문호로 탈바꿈한 비운의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만국공원은 본래 만국조계의 자리였다. 일본과 청나라가 인천에 치외법권 지역으로 각각 신흥정과 포구 해안 언덕에 자기네 조계를 설정한 뒤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 만국조계였고, 한일의 합병으로 그들이 물러간 후 이곳은 사람들에 의해 저절로 만국공원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 이원규 [황해] 中 -
 
‘준혁’은 일본 군대에 지원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남방전선으로 이송되는 도중 탈출하고 이를 이유로 아버지 어머니, ‘한관호’ 선생과 ‘정임’은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합니다. 어물장수로 변장하여 인천으로 돌아온 ‘준혁’은 옛 동지들과 다시 만나게 되고 곧 해방을 맞이하여 인천경찰서 구속자 석방, 대아도 청년 보안대 조직 등 바쁘게 일을 추진하며 조봉암 선생을 중심으로 한 인천 건국준비위원회 건설에 참여합니다. 8월 25일 인천역 앞 인영극장에서 건준 인천대회를 열었는데 극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이 꽉 차 극장 앞 대로까지 인파로 가득 메워질 정도로 사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해방의 열기는 이렇게 달아올랐는데 미군의 상륙을 기점으로 시국은 다시 혼란스러워집니다.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일본 경찰이 총격을 가하여 사람이 죽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인천 조선해방의 사절로 지난 8일에 인천항에는 미국군의 입항이 시작되자 이날의 반가움을 참지 못하여 미군을 환영키 위하여 인천보안대원과 조선 노동조합원 등이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지어 연합국기를 들고 행진하던 중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본인 경관대들이 발포하여 노동조합위원장인 권평근(權平根·47)이 가슴과 배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고 보안대원 이석우(李錫雨·26)도 등허리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다. 그리고 중상자와 경상자 14명을 내어 도립의원에 수용하고 응급치료중인데 이 사건의 전말을 미군 CIC에서 조사중이다. 이에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도 미군을 통하여 일본관헌에 대하여 엄중 항의중이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12일자-



<일본경찰의 통제 속에 인천시가 행진하는 미군 (KBS 영상실록)>

 
이 사건은 향후 정국이 시민들의 예상과 크게 다르게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을 다시 기용하고 친일 지주 자본가들이 한민당으로 모여 세력을 형성하면서 좌우 갈등은 격심해지고 친일 부역자들은 반탁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면서 자신들의 반민족 행위를 반공운동으로 덮어 감추었으며 급기야 단독정부 수립, 분단으로 치닫고 만 것입니다. [황해]는 좌우 갈등과 분단의 과정에서 인천에서 벌어진 일들은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1946년 4월 14일 김구가 인천에 내려와 내리교회를 방문하고 6월 23일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 주최로 ‘미소공위 속개 촉진을 위한 인천시민대회’가 인천공설운동장(현 숭의운동장)에서 열렸으며 같은 날 송학동 공회당(현 인성여고)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인천지부의 '신탁통치 반대 시국 대강연회'가 열리는 등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대립은 나날이 격화되었습니다. 조봉암은 민전 인천위원장을 사임하고 공산당을 탈당하게 되고, 좌우 합작을 고수했던 여운형과 김구는 암살되고 맙니다. 결국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분단은 기정사실화되고 남한에서는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소설에서 끈질기게 ‘준혁’를 추적하던 악독한 친일 경찰 ‘김무길’은 공안 책임자로 승진하고 ‘준혁’은 도피하기 위해 어부 생활을 하게 되는데 선원들의 고통을 좌시할 수 없어 또 다시 어부들의 생존권 투쟁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어 감옥에서 전쟁을 맞이합니다. ‘준혁’은 인공 치하에서 대아도 지도원으로 파견되어 반동분자로 몰린 선주의 아들 ‘유동우’를 몰래 살려주는데 탈출한 ‘유동우’는 미군(클라크 공작대)에게 발탁되어 백아도(덕적도) 폭격, 점령에 협조하게 되고 미군에 의해 점령된 백아도에서 ‘준혁’은 처형되고 맙니다.
 
친구가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고, 민족 반역자가 애국지사로 둔갑하여 설치고 다니니, 세상 물정 모르는 무고한 양민들만 죽어나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하루 벌이가 급급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곧 생존 투쟁인데 이를 두고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어 재단하는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풍찬노숙을 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쳤는데 이 나라 장래는 제국주의자들 탁상농간(卓上弄奸)에 좌지우지 되고 말았으니 이 비극의 역사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겨우 가라앉을 만한 통한의 기억을 들쑤셔 원한이 사무치게 할 수도 있고 철천지원수가 되어 찢어 죽여도 시원찮노라 격분케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아픔이 화해와 통일의 기운으로 승화되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억울하게 죽어간 분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제 잇속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농단하는 모리배를 가려내는, 역사의 진실에 한 발 다가가도록 하는 문학 창작만큼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원규 선생님의 노작(勞作)에 고개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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