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살인 당한 죽산, 평화통일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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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살인 당한 죽산, 평화통일의 꿈
  • 이한수
  • 승인 2016.07.19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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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 (20) 조봉암 평전 - 이원규

7월 31일은 죽산 조봉암 사망 57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이 간첩죄를 뒤집어씌워 사법 살인을 저지른 지 52년 만인 2011년에 다시 재판을 해 무죄 판결이 내려졌지만 책임자 처벌은 커녕 명예회복 조치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땅의 권력자들은 여전히 강대국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만 꾀하고 있으니 죽산 선생이 그토록 열망했던 평화통일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전쟁이 나자 국민들을 속이고 혼자 도망친 비겁자가 나랏일을 챙기다가 가족들마저 잃어버린 충신을 모함하여 죽였으니 이 부끄러운 역사를 후학들에게 어찌 전해야 하겠습니까.

뼈아픈 감동을 잘 전해야 할 텐데, 죽산 선생의 삶을 그려낸 형상물을 찾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전 생애가 우리 현대사 굽이굽이 굴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그 분이 살아온 걸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만큼 좋은 역사 교육이 없을 텐데 왜 죽산 선생 이야기가 이렇게 희귀할까요. 죽산 선생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합니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따른 의병 궐기부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아나키스트 운동과 공산당 창당, 좌우 연합 운동과 민족 유일당 건설, 해방과 건국, 동란의 비극과 평화통일 운동, 반독재 투쟁과 진보 정당 건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 현대사의 첨단 현장에 그가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한 때 공산당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철저하게 그의 삶이 가려져야 하는 것인지. 

죽산 선생이 등장하는 이야기로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과 허영만의 만화 [오! 한강]이  있는데 배경 인물로만 잠깐 나와 아쉬웠습니다. 공감이 수월한 대중적인 팩션으로 그분을 만나기에는 우리 사회가 아직 이념의 골이 너무 깊은 모양입니다. 김삼웅, 서중석 이원규 선생이 평전을 써서 죽산의 삶을 잘 조명했지만 젊은이들이 읽기에는 좀 전문적이라 공감하면서 빠져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원규 선생의 [조봉암 평전]이 그 중에서도 제일 팩션에 가깝긴 하지만 방대한 사료를 600여 쪽의 두꺼운 책에 담아내다 보니 대중적으로 읽히기에는 좀 부담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소설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죽산 선생의 삶을 간략하게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잠두교회 옛 모습>


조봉암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며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봐야 하니 강화도는 그의 육체적 태생지이자 정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건 강화도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를 다니면서 신사상을 접했기 때문일 겁니다. 강화도 출신이라는 인연은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거두 이동휘와도 닿아 있는데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체될 때 강화에서 의병 투쟁을 이끈 진위대장 이동휘는 잠두교회 권사였습니다. 잠두교회의 이런 전통은 3.1운동으로 계승되었으며 조봉암은 이 교회에 출석하며 사상적으로 깨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강화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로는 서울 YMCA 중학부에서 공부하고 고학으로 일본 유학까지 가는 등 열정적으로 공부에 빠져드는데 일본 유학생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가난한 사람과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러시아혁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그 또한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됩니다. 이 시대가 세계사적으로 격동기라 조선의 독립 투쟁에 투신했던 많은 선각자들이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볼셰비키(레닌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운동 내부에 민족주의 경향과 국제주의 경향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 원수가 되고 마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군이 러시아의 자유시(연해주 스보보드니)로 집결했을 때 조선 독립군을 러시아 공산군대로 편입하는 것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내분이 발생하고 자유시에 모여 있던 조선 독립군끼리 서로 죽이는 끔찍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주로 활동했던 상해파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독립군의 러시아 공산군 편입에 반대했고 러시아 연해주가 주 활동무대였던 이르쿠츠크파는 일본군과 싸울 때 연합했던 러시아 적군과의 통합에 대해 반감이 없었습니다. 자유시사변 이후 러시아 코민테른의 주선으로 소련에서 조선 독립운동 세력의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기 위한 연합대회가 열릴 때 조봉암은 국내 대표로 참석하게 됩니다. 이 때 여운형과 이동휘를 만나는데 [조봉암 평전]은 연합대회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 이동휘의 야망은 더 크게 드러났다. 이르쿠츠크파를 무조건 깔아뭉개고 자기 뜻대로 하려는 욕망을 주먹처럼 마구 휘둘렀다. “아아, 통합하자고 애써 모인 건데 저분이 고집을 부리는군. 조금만 양보해도 될 텐데.” 이 계파도 저 계파도 아닌, 봉암처럼 중립에 선 대표들이 탄식했다. 이동휘에 대한 유년시절부터의 존경심은 조봉암의 가슴 속에서 사라졌다.
- 이원규 [조봉암 평전] 中에서 -

죽산은 이동휘의 상해파가 당권을 장악하려는 모습에 반감을 갖게 되고 상해파롤 포함한 민족주의 진영은 자유시 참변으로 반공 의식 더 강화됩니다. 조봉암은 상해파보다 이르쿠츠크파에 가까운 성향이었지만 범민족 연합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습니다.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 신민부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조봉암을 찾아왔을 때 조봉암이 그들을 대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조봉암 평전]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걱정을 시켜드려 미안합니다. 신민부 조직을 약화시킬 생각은 없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추구하는 이념이 다르지만 우리는 공통의 적인 일본과 싸우는 공동운명체입니다. 혹시 위급한 일이 생기면 우리 조직을 이용하십시오. 언제든지 도우러 달려갈 겁니다.”
- 이원규 [조봉암 평전] 中에서 -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일본은 동북아시아 주둔 군대를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게 되고 조선독립군은 이를 피해 연해주로 이동해 갔지만 자유시참변을 겪고 뿔뿔이 흩어져 참담한 지경에 빠집니다. 만주지역에 이주해 살던 조선인 주민들도 끔찍한 참변을 당합니다. 결국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장악한 일본이 중국 본토를 넘볼 무렵인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 의거가 일어고 일본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게 됩니다. 조봉암은 이때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 투옥되고 7년이나 옥살이를 하다가 1939년에야 출소하여 그 뒤로 쭉 인천에서 살았습니다.



<미강조합장으로 고려정미소(현 수인사거리)을 둘러보는 조봉암>


인천에 자리잡고 있던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강조합장 일을 맡아 하며 가족들과 도원정(도원역 광성고 사이)에서 살면서 해방을 맞이합니다. 일제의 패망이 기정사실화 되고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될 때 조봉암은 인천 건국준비워원회 건설을 주도합니다. 미군정이 건준을 부정하고 좌우 갈등이 심화되자 조봉암은 좌우연합 운동에 집중하고 남로당 박헌영과는 정치적으로 결별합니다. 인천 을구(현 부평 계양 선거구)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고 초대 내각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초대 내각을 구성할 때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합니다. 조봉암은 농림부장관으로서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데, 가구당 열 마지기 이상의 땅을 소유할 수 없게 하고 대지주의 소작농 수탈을 원천 봉쇄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토지개혁은 농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으며 지주들의 정당인 한민당의 견제를 받는 계기가 됩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이 공산당원이었던 조봉암을 각료로 불러들인 건 일제에 협력하며 기득권을 누렸던 지주들의 세력인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한 노림수였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48년 초대 내각 -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조봉암 농림부장관>

이승만 국부(?)의 안하무인으로 한국 민주주의는 엉망진창이 됩니다. 경찰이 의회를 포위하고 기립 투표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대통령이 되고, 어린 애들도 조롱하는 4사5입 개헌으로 종신토록 대통령을 해먹겠다고 하고, 강력한 도전자 신익희, 조병옥이 투표일 며칠 전에 의문사 당하는가 하면, 조봉암에게 누명을 씌워 사법살해 하는 등 저지른 만행이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결국 노골적인 3.15 부정선거로 국민들의 분노가 터지고 권좌에서 쫓겨납니다. 조봉암 선생은 이런 인면수심의 독재자를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해방과 동란 와중에 연안파, 남로당파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개인 우상화를 밀어붙이는 북한의 일당 독재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제3의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선 일이 진보당 창당이었는데 이 일로 사법살인을 당하고 맙니다. 



<허영만 만화 [오! 한강] 3권 표지>

조봉암이 새로운 정치에 뜻을 두고 국민들의 지지를 넓혀가던 때를 디테일하게 그린 작품으로  허영만의 만화 [오! 한강]은 많은 독자들에게 한국 현대사의 진실을 환기시킨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강토’는 1954년 4사5입 개헌 얼마 후 죽산 조봉암을 알게 되고 그의 인품과 조국애에 감동하여 진보당 창당 일에 발 벗고 나섭니다. 조봉암을 위해 일을 하다가 자유당 정치 깡패들의 테러를 받는데 그 깡패 우두머리를 일본놈 앞잡이 노릇을 하던 매국노로 그리는 등 당대 한국 사회의 모순을 꼭 짚어 내고 있습니다. [오! 한강]은 ‘강토’가 진보당 창당 발기대회에 참석하여 조봉암 당수를 만나 대화하는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부탁 하나 드릴까 허는데요, 자본주의의 맹점은 그 어떤 권력보다도 금력이 우선 헌다는 디 안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허실 줄 믿습니다만 부디 금전에 의한 정의와 도덕의 파탄이 오지 않도록 힘써 주십시오.”
“그 충고 고맙게 받아들이겠네. 그렇지 않아도 난 자본주의 사회가 도달하게 될 위기에 대해서 수없이 생각해 왔었네. 이제 오랜 진통 끝에 창당도 됐고 하니 어떤 반대에도 굴하지 않는 신념으로 과감하게 우리 정책을 펴 나아갈 생각일세.” 
-  허영만 만화 [오! 한강] 中에서 -                

진보당 강령에 담긴 정책의 골자는 공산독재와 자본독재를 배격하고 민족자본을 육성하며 농민 노동자의 생활권을 확보하고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이었는데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고 이승만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1956년 진보당이 만들어지고 그 해 선거에서 신익희의 돌연사로 조봉암은 급작스럽게 단일 후보가 되어 20%나 지지를 받게 되자 이승만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봤던 것입니다. 1959년 조봉암은 간첩혐의로 체포되고 사법살인을 당하게 됩니다. 천인공노할 만행은 결국 4.19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고 이승만은 쫓겨나고 맙니다. 조정래 [한강1-격랑시대]에서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령을 근거로 삼아 유족들이 공개적으로 장례식도 못하게 하는 등 자유당 정부의 만행이 앞으로 어떤 일을 불러올 것인지 주인공 ‘유일민’이 이렇게 예측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한 것을 빼고 현시점에서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는 건 세 가지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첫째 평화통일론의 말살입니다. 둘째, 진보세력의 파탄이고, 셋째, 반공주의와 북진통일론의 강화입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큰 문제는 민심의 동요일 겁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민심의 동요는 조봉암의 옹호가 아니라 이 정권에 대한 불신입니다. 이승만은 정적 하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대신 새로운 민심의 불신을 사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이익이고 손해인지는 더 두고 볼 일입니다.“
- 조정래 [한강 1 격랑의 시대] 中에서 -
 
죽산 선생의 삶을 그냥 기록만으로 추적하는 일도 이렇게 힘든데 당신께서는 어떻게 그 역경을 버티어 내셨는지……, 젊은이들한테 그 분의 삶에 대해 얘기를 들려주는 게 주저될 정도입니다. 너무 힘겨우면 외면하고 돌아가려고 하는 게 우리 보통 사람들 심사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 분의 역정을 따라가며 힘을 북돋워 어기차게 할 수 있을까요. 죽산 선생의 지난한 삶을 좇아가다가 너무 지쳐 그만두고 싶은 고비를 두어 차례 넘기면서 어렴풋이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그 분의 삶 자체가 그랬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게 만드는 건 감동과 열정뿐이란 걸 한 평생을 바쳐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삶을 형상화하는 일만큼 위대한 일도 없겠다 싶었습니다. 감동적인 소설 창작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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