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 중 급한 전화를 받는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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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중 급한 전화를 받는다는 것은
  • 김연식
  • 승인 2016.07.24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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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다시 에스페란자로


<인천in>은 지난 3월21일 부터 국제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의 에스페란자호 항해사 김연식씨(33)와 함께 <에스페란자의 위대한 항해>를 격주 연재합니다. 세계적인 환경감시 선박 에스페란자호에서 부딪치며 겪는 현장의 이야기를 우리 항해사의 눈으로 보여드립니다. 


# 불길한 전화


곤히 자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연식, 암스테르담 본부에서 전화가 왔어. 급한 모양이야. 금방 받아야할 것 같아.

 

잠결에 어안이 벙벙했다. 잠자는데 누가 나를 깨운 적이 없고, 배에 있는데 누가 내게 전화한 일도 없고, 본부에서 나를 찾을 까닭은 더더욱 없으니 말이다.

 

-전화라니. 누가 나를 찾는 거지? 무슨 일일까?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 아니면 우리 가족에게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설마, 설마 그건 아니겠지!

 

배에서 받는 전화는 늘 그렇다. 고요를 깨부수는 한밤의 전화벨 소리처럼 불길하다. 경험상 그렇다. 세상에 한가하게 차를 마시다가 문득 내가 생각나서 배로 위성전화를 걸 사람은 흔치 않다. 국제전화보다 복잡한 위성전화 번호를 하나씩 꾹꾹 누르는 수고는 그런 때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도 깊은 밤에 말이다.

 

군대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전화가 왔다는 소식을 받으면 별안간 공기가 무거워진다. 근무 중이든 취침 중이든 전화 때문에 사람을 부르는 건, 또 전화를 받으러 가는 건 그닥 들뜨는 일이 아니다. 전화기가 있는 행정실까지 가는 병사의 발걸음에 불안이 묻어난다. 쭈뼛쭈뼛하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서 도착 할쯤이면 숨이 턱밑까지 차 있다. 불안을 예감한 다른 병사들은 돌연 숙연해진다. 다들 무슨 소식인지 촉각을 세운다. 군대든 배든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뜬금없는 전화소식에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한 층을 올라가는 아주 짧은 사이, 내게는 수십 가지, 정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 짧은 새에 나와 관련된 사소한 일, 그러니까 최근 내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 사소한 선행, 사소한 수고를 낱낱이 불러내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시나리오를 수십 가지나 엮는다. 적당한 궁금증과 어느 정도의 불안, 또 약간의 호기심이 섞였을 때 사람의 두뇌는 생각보다 많은 상상을 낳는다.

 

-아버지가 편찮으신가? 얼마 전에 항로를 손톱만큼 삐뚤게 그렸는데, 그걸 문책하려나? 요즘 내가 된장찌개를 좀 자주 끓여먹었지. 냄새 때문에 누가 고충을 터뜨렸나? 얼마 전에 요리사 대신 만든 김밥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었는데, 아무렴 요리사를 시키는 건 아니겠지? 시민들이 배에 찾아왔을 때 내가 안내를 재미있게 해줬는데 누가 칭찬이라도 했나? 아니면, 집에 사고라도 생긴 건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결코 태연하다고 할 수 없는 표정으로 통신실에 들어섰다. 엉덩이의 왼쪽 절반만 의자에 걸친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화기가 생겼을 때, 신하들은 고종의 전화를 받기 전에 실제로 궐을 향해 절을 하고 수화기를 들었단다.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어정쩡하게 앉은 내 모습이 어쩐지 그 신하의 심정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보였다. 왕께서 어떤 일로 친히 전화를 주셨는지 그 용건을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는 심정 말이다.

 




-헬로... 디스 이즈 김...연식

-아!! 김!!

 

선원의 승하선을 담당하는 직원이었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슬픔과 냉정, 위로와 걱정이 묻어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침을 한번 삼키듯 시간을 끌더니 천천히 또박또박 준비한 듯한 말을 꺼냈다.

 

-아. 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받은 걸 알고 있어요. 어, 그런데, 어, 그런데 다름이 아니라.

남자는 머뭇거리며 내 애간장을 태웠고, 그 사이 내 직감은 아무렴 아니겠지 하던 방향을 향해 자석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에스페란자 호가 라스팔마스 제도의 카나리 섬에 있는데, 거기 2등 항해사의 어머니가 위독해요. 그래서 그 친구가 급히 귀국하게 되었는데, 대신 승선할 다른 2항사가 없네요. 그래서 미스터(갑자기 ‘미스터’가 붙었다) 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내일 에스페란자 호에 갈 수 있을까요. 2주 후에는 귀국할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표적의 정중앙을 관통한 화살처럼 그의 용건은 내가 ‘아무렴 아닐거’라고 걱정했던 ‘휴가 연기’ 소식이었다. 그는 내게 선택을 줬지만, 그가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이미 ‘예스’를 입에 머금고 있었다. 나는 바르고 차분하고 협조적이고 세상만사의 평온에 헌신하는 ‘미스터 김’이 아니던가.



-네, 그... 그러죠 뭐.


‘미스터’에 홀려 엉겁결에 ‘네’라고 답한 순간, 남자는 어린양을 꾄 늑대처럼, 또는 상대를 속여 도장을 받아내려는 사기꾼처럼 얼씨구나 준비된 일정을 줄줄이 퍼부었다. 갑자기 내가 정신을 차리고 ‘저기 잠깐만요. 다시 생각하니 그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네요’라고 말하는 걸 막으려는 것처럼 약간의 틈도 여유도 없이 말이다.

 

그리하여 비행기표의 목적지는 하루 아침에 인천에서 라스팔마스로 바뀌었고, 나는 지금 이 글의 서두를 노르웨이 본토의 북쪽 끝 관광도시 트롬소의 작은 공항에서 쓰기 시작해, 이 후반부를 수도 오슬로 공항에서 작성하고 있으며, 라스팔마스의 에스페란자 호에 도착해 비통한 심정으로 퇴고한 후 인천in에 전송할 예정인 것이다.

 

트롬소 공항에서 원래 타려던 비행기를 보내고 다른 비행기를 타는 심정은 참 이상야릇했다. 군대에서 전역한 후 집에 가는 길에, 다른 친구들은 예정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 앞에 갑자기 훈련소행 버스가 놓인 기분이랄까. 군대에 다시가는 재난, 난리, 사변, 재앙, 흉사에 비할 바 아니지만, 고종의 전화를 받은 미스터 김의 심정은 그런 비슷한 상태다.

 

배를 탄다는 건 그런 것이다. 늘 약간의 불안을 달고 사는 것. 배에서는 가족을, 고국의 가족은 배에 있는 나를 걱정하는 것. 전화벨 소리가 불안한 것,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고 감사하는 것 말이다.

비보는 다른 2항사에게 갔다. 이어서 전화는 내게 또 내 가족에게로 도미노처럼 연결됐다. 평소 떨어져 지내다가 가족이 아파서야 돌아가는 심정은 어떨까. 그런 불행은 내게 또 어느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 그걸 알기에 나와 내 가족, 모든 동료들이 슬픔과 위로로 작게나마 이바지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휑하니 북극을 떠나 여름나라로 왔다. 그리고 다시 에스페란자 호를 만났다. 작렬하는 카나리아의 태양에 서니 순백의 북극이 꿈만 같다. 북극에서 보낸 두 달여간은 평생 잊지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얼음이 녹아 새로 열린 바다, 원격 로봇의 카메라로 본 원시의 심해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았던 순결무구한 바다를 향해 저인망 어선들이 전진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적절히 배를 모아 연구팀과 촬영팀을 돕는 정도에 불과했다. 허나 선원은 나 혼자가 아니다. 많은 이들의 꾸준한 노력과 의지가 모이면 결국 세상은 변할 거라 낙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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