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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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 뭣이 중헌디?
  • 편집부
  • 승인 2016.07.2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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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칼럼] 김성미경 /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옛날 옛적 중 고등학교 시절에 무척 좋아하던 영어선생님이 있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도 그 영어선생님은 무척이나 스마트하면서도 따듯했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적 성향이 공존하던 분이었으니 여학생들 사이에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덕분에 영어시간은 시작 전부터 아이들은 거울한번 더 보느라 바빴고, 스승의 날엔 경쟁적으로 카네이션과 선물을 투척했다. 공인이니 혼자 소유할 수 없어 속상해도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수업시간에 눈길이 누구에게 더 간다 싶으면 질투가 일어나 다음 시간부터 몇 번은 그 선생님의 시간에 딴 짓을 하는 것으로 소심한 보복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영어점수는 늘 좋았어야 했겠지만 돌이켜 보니 좋아하는 것과 성적은 꼭 비례하는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어쨌든 선생님에 대한 로망은 주로 첫 사랑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 같다. 사랑의 감정에 미숙한 만큼 좌충우돌 지옥과 천당을 순간적으로 오르내리는 경험을 하고, 혼자 시름시름 앓다가 마음에 상처를 간직한 채 “그래,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야” 하며 스스로 위로하고 끝내기 했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청소년 시기의 사랑은 왜 꼭 슬프게 끝나야만 했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진 않는다마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라는 자책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슬픈 사랑의 힘으로 사춘기를 버텼다.
 
사실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는 건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 하루의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학교이다 보니 다른 사람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선생님이 타켓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사랑은 주로 백 미터 반경에서 만나는 사람과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두 번째로 성공한 어른으로서의 좋은 모델이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된다. 이 선망의 대상을 사랑해 버린다면 그 성공을 함께 공유할 기회도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성적이며 저돌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청소년들과 관계하는 교사, 혹은 나이 많은 어른, 혹은 경찰 등 어른들은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까?

얼마 전 부산의 학교 전담 경찰 2명이 각각 여고생과 성관계(?)를 맺은 사건, 대구의 33세 여교사가 15세 남학생과 모종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케이스의 사건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논쟁이 진행 중이다. 스쿨폴리스, 즉 학교전담 경찰관과 대상학교 피보호자인 학생 간에 사랑한다는데 그게 불가능한 일인가? 또 교사와 학생 간에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인가? 된다면 무엇 때문이고 안 된다면 또 무엇 때문인가?

이 두 사건의 소위 “가해자”로 몰린 사람은 성(性)이 다르다. 스쿨폴리스의 가해자는 남성이고 경찰이고 보호의 의무를 가진 자이고 피해자는 여성이고 학생이며 보호를 받는 대상이이다. 또 다른 사건은 가해자가 여성이고 교사이고 피해자는 남자이고 학생이다.
이 두 사건을 보는 사회적 시선은 외형적으로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스쿨폴리스 사건은 경찰 측에선 이 사건을 경찰관과 피보호자 여학생의 문제가 아닌 남녀간의 일탈적 행위(사랑)로 보아 조용히 넘어가려 시도했다. 그 궤에 맞추어 기혼자인 경찰은 임신 중인 아내와 이혼하고 그 학생과 살려고 했다고 변명을 했다고 한다. 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학생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일반적 시민 정서는 가해자의 뻔뻔스러운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보며 학교에 호감가는 경찰을 파견한 것이 문제라며 호감도와 인기도로 평가하는 제도자체를 문제 삼았다.
 
또 다른 사건은 나이 많은 여교사(33세)가 나이어린 남학생(15세)와 적절하지 않은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서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와 나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교사는 학생을 교육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서 학생과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책무가 있는 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교사’가 자신의 제자이며 어린 남학생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문자를 보냈다는 것이 비난의 핵심이다. 여기에 일반적 시민의 정서는 어떻게 여교사가 그럴 수 있냐는 것이다.

여기서 남학생의 반응은 그다지 중요한 판단 기준이 아니다. 기존에 남교사와 여학생간의 부적절한 관계가 문제가 되었을 경우 여학생이 졸업하고 나서 남자교사와 결혼하면 용서가 되기도 했던 일이었다. 아마도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는 사랑이었다고 이해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향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마도 둘 간의 관계는 더 이상 여교사의 힘으로 해결되긴 어려울 것이라 보인다.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답이라고 볼 것이다.
 
경찰의 사건은 비록 내부조직의 관점이긴 하지만 여학생의 동의에 의한 일탈적 사랑으로 읽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반면에 후자는 여지없는 여교사의 이기적인 성적 욕망의 결과로 위계에 의한 성폭력으로 읽힌다. 아마도 여자 교사이기에 괘씸죄가 더해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 합의가 가능할까?
성년과 미성년의 사랑, 위계관계가 분명한 사람간의 사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랑.
이것뿐인가? 법적으로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의 사랑, 생물학적으로 친족 간의 사랑, 동성 간의 사랑 등, 어떤 것을 범죄로 보고 어떤 것을 사랑이라 할 것인가, 그 기준은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매우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마음에 머물러 있을 때와 그 대상과 현실에서 나눌 때는 다른 차원으로 변화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고 상호간의 관계가 생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서로 간에 사회적 책임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관계라는 것은 상호 민주적이고 평등한 관계에서의 소통을 뜻한다. 그래서 성관계는 성적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하며 기본 전제는 “민주적이고 평등함”이다. 성폭력은 그래서 비민주적이며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기에 성관계와는 전혀 다름에도 은연중에 성폭력이 상호적 관계인 것처럼 섞여서 표현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교사와 학생, 경찰과 피보호자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학생과 피호보자의 동의여부보다 교사와 경찰 등 위계, 즉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의 사회적 책무의식이다. 상상은 자유, 그러나 그 상상이, 그 마음이 타인과 관계하는 행위로 나타날 때는 사회적으로 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발생한다는 것을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권력의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 수많은 유혹에 시달리고 힘드셨을, 그러나 의연하게 자신의 책무를 다하신 그 옛날 영어선생님께 존경과 사랑을 보내드린다. 오늘따라 영어선생님이 무척이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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