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인가? 해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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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인가? 해방인가?
  • 이한수
  • 승인 2016.08.1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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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팩션] (22) 월북, 탈북 문인의 해방전후사 인식 - 이태준과 선우휘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었으니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심정에 공감하는 일은 두 세대를 건너뛰어야 하는 지난한 일입니다. 저한테는 할아버지 되는 분들이 겪은 일이라 마주 앉아 옛날이야기로 들을 기회라도 있었지만 요즘 청년들에게는 증조할아버지 때 일이니 공감하기 참 어려울 겁니다. 우리 세대에게는 그래도 해방 전후 시대가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을 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던 분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다들 잘 아실 겁니다. ‘해전사’는 우리 세대를 상징하는 코드 중의 하나라고 할 만합니다. 2000년대 들어서 뉴라이트 역사학자에 의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이 나오기도 하여 ‘해전사’라는 시대 코드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전후’라는 말을 들으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역사 책 뿐만 아니라 이태준의 소설 <해방전후>도 금방 떠오릅니다. 요즘 학생들이 배우는 문학 교과서 18종 중에 이 작품이 수록된 교과서는 단 한 종에 불과해서 이 작품을 알고 있는 학생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우리 세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작품입니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금서로 묶여 있던 이태준의 작품들이 80년대에 들어 해금되면서 주목을 받았거든요.

이태준의 단편소설 <해방전후>는 해방 직후 지식인이 목도했던 이 나라 현실을 잘 포착했다고 봅니다. 해방 직후 서울 지식인은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져 버렸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한국 신탁통치 방안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문인들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단체를 만들고 세력 다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좌익 문인 단체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예맹)’, 우익 문인 단체로는 ‘전조선문필가협회’가 있었고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전선을 지향하는 중도파 문인 단체로 ‘조선문학건설본부(문건)’가 있었습니다. 이태준은 해방 직후 상경하여 ‘문건’에 가입합니다. 좌우 합작을 취지로 탄생한 ‘문건’이 점차 좌경화되자 이태준은 이를 우려합니다. 그랬던 그가 월북을 하였으니 그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좌익 성향과는 거리가 먼 순수문학 작가였던 그가 어찌하여 월북을 하게 되었으며 그가 월북하여 어떤 작품을 썼는지 궁금했지만 80년대만 해도 월북 이후 작품은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월북한 뒤에 쓴 작품이 90년대 중반에 남한에서도 출판이 되었지만 문학 전공자에게나 관심거리였을 겁니다. 이태준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해방 직후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그가 월북 이후 북에서 쓴 작품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에는 작가의 세계관이 투영될 수밖에 없으니 분단 시대의 작품은 관점의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해방 전후의 시대 상황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이태준의 [농토]와 선우휘의 [깃발 없는 기수]를 함께 읽을 것을 제안합니다. 이태준이 1946년에 월북하고 두 해 뒤 1948년에 발표한 [농토]는 해방 이후부터 단독정부 수립까지의 혼란기 북한 상황을 담아낸 작품이고 같은 해에 탈북한 선우휘 작가의 [깃발 없는 기수]는 해방 직후 남한의 이념 갈등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두 작품을 함께 읽으면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입체적으로 해방 직후 상황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우휘의 [깃발 없는 기수]는 영화로 만들어져 수월하게 접할 수 있고 이태준의 소설 [농토] 또한 검색하면 작품 전문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태준의 집필 장소였던 수연산방의 사랑방>


성북동에 남아있는 이태준의 고택에 가보면 그가 얼마나 유한(有閑) 계급 인텔리였는지 실감할 수 있는데 민중의 고달픈 삶에 대해서는 당최 모를 것 같은 그가 왜 북한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30년대 암울했던 시절 서울 변두리 성북동 고택 ‘수연산방(守姸山房)’으로 물러나 세상을 관조하던 상허(이태준의 호)였습니다. 택호 ‘수연산방’에 그의 고고한 심사가 다 녹아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 앉은 산 속’이라는 뜻의 택호도 그러하지만 그가 들어앉아 소설을 썼던 사랑방에는 ‘기영세가(耆英世家)’라고 써서 편액을 달았는데 그 뜻이 ‘고매한 인품의 노인이 사는 집’이랍니다. 이렇게 우아한 선비였던 그가 어떤 연유로 북 체제에 동조하여 뛰어들게 되었을까요.

월북 이후 발표한 첫 작품 [농토]는 노비의 아들인 ‘억쇠’가 황해도 농촌 마을 ‘가재울’에서 소작농으로 조선인 지주의 착취와 일제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의 착취를 다 겪으면서 조선인 지주나 왜놈이나 가난한 농민들 쥐어짜기는 매한가지라는 걸 알게 되고, ‘성필’이라는 마을 청년과 교우하면서 조선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깨닫게 됩니다. 일본이 전쟁을 더 키워 태평양전쟁으로 확대시키면서 군량미 공출까지 당하게 되니 뼈 빠지게 농사지어도 춘궁기 굶주림은 더 심악해집니다. ‘동척’의 가혹한 착취를 성토하는 마을 청년들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갈 때 ‘억쇠’도 경찰서로 끌려가 따귀를 맞으며 취조를 당하고 수십 일 구류를 살기도 합니다.

일본놈 앞잡이를 두들겨 패고 도망 다니다가 해방을 맞은 ‘억쇠’는 천지개벽을 목도합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얼마 안 있어 소련 군인들이 촌구석 ‘가재울’에까지 나타나 주민들에게,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지주의 착취로부터도 해방되었다고 축하를 하고 마을 주민들은 열광을 합니다. 얼마 안 있다가 토지개혁이 실시되고 ‘억쇠’는 일한 만큼 곡식이 쌓이는 게 꿈만 같았습니다. 지주나 친일 부역자들은 하나 둘 3.8선 아래도 떠나면서 싼값에라도 땅을 팔아 버리려고 하지만 소작농들은 이제 땅을 살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며 거들떠보지 않게 됩니다. [농토]는 해방 직후 ‘가재울’ 마을 주민들이 소련 군인을 만나는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하루는 가재울 앞 행길에 납작한 자동차에 빨간 기를 단 소련 군인 몇 사람이 나타났다. 밭에서 논에서 마당에서 사람들은 길이 메게 모여들었다. 먼저 성필이가 나서며 소련 군인들에게 손을 내어밀었다. 그들은 두툼한 손으로 벙글벙글 웃으며 성필의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논에서 뛰어나와 손에 흙이 묻은 채 억쇠도 그들의 악수를 받았다. 어깨에 금줄이 번쩍이는 장교들이나 이들의 평민적인 태도에 억쇠뿐 아니라 모두가 감격되어서 성필이의 선창으로 진정에 넘치는 '소련 군대 만세!'를 불렀다. 군인들의 말을 통역은 이렇게 옮겨 주었다.
  "여러분 기뻐들 하시랍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여러분은 이 앞으로는 그런 억울한 착취를 당하지 않고 사실 거라 합니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자본가나 지주를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살 수 있는 조선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성필이는 열광해서 소련 군인들의 묵직한 손을 다시금 잡으며 감사했다.
- 이태준 [농토] 中에서 -

‘수연산방’에서 문인들과 한담을 나누고 글이나 쓰던, 해방 직전에 강원도 철원 시골에 들어가서도 구시대적 선비와 술잔이나 기울이고 세태나 논하던, 유한계급 지식인이 월북해서는 환골탈태하는 모습이 참 놀라웠습니다. 작가는 소련을 여행하면서 혁명 사회를 직접 목격하고 크게 달라진 듯합니다. 소련 기행에서 돌아와서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이런 작품이 나왔을 겁니다. 월북한 지식인이 이렇게 변하는 동안 북의 체제가 마뜩찮아 탈북한 지식인은 남한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어떻게 변모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 선우휘는 이태준과 대칭점에 서 있었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선우휘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입니다. 평북 정주는 남강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건립한 곳으로 서구 문물이 빨리 자리 잡았으며 민족주의 지사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친일파, 춘원 이광수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이곳 출신인데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등 많은 민족 지사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선우휘의 복잡한 의식 세계는 이런 성장 환경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대중 씨가 납치되었을 때 비판 논설을 써놓고 사표를 낼 만큼 의기 있던 그가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천황의 교육칙어 외우기 내기를 하곤 했다는 요령부득의 행적은 우리를 참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는 왜 이런 자기 분열적인 모습을 보였을까요.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해방 후 나는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놀란 것은 소련 군정하의 이북에서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학생을 위시하여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거의가 좌경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옛날 동창생을 만나면, 대개가 “혁명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곳을 등지고 뭣하러 양키와 친일파와 악질 자본가, 악덕 지주, 간상 모리배, 반동분자가 판을 치고 있는 이 너절한 곳을 찾아왔느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북의 상황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역설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조소뿐이었다. 나는 일생을 통해 그때처럼 정신적으로 당황하고, 사상적으로 회의하고, 인간적으로 고민한 적은 없다."
- 선우휘 수필 <세 학생에게 주는 글> 중에서 -

해방 직후 남한으로 내려와 고향 사람 방응모가 사장으로 있는 조선일보사에 기자로 들어갔고  미군정과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추진하면서 정치 깡패로 활용한 서북청년회의 중앙집행위원장 선우기성은 선우휘의 일가친척이었으니 그는 해방 이후 혼란기 남한의 우익 세력과 가까웠으며 그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쓴 소설 [깃발 없는 기수]는 그가 우익의 시각으로 본 남한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으로 그 당시 남한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 보기 싫어 탈북했다고 했는데 그가 남한으로 와서 본 미군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화 [깃발 없는 기수]의 미군과 매음녀 장면>


[깃발 없는 기수]의 주인공 ‘윤’이 양키들을 유혹해 팔자를 고치겠다는 매음녀들의 추한 모습을 보고 아니꼬워 하는 장면은 작가가 본 남한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고 봅니다. 북한에 있을 때 소련군의 행태를 증오했듯이 남한에 내려와서도 미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그의 시각은 고향 정주에서 내면화한 민족주의 때문이었을 겁니다. 사장이 고향 사람이라 조선일보에 입사할 수 있었듯이 반공 정치 깡패 집단 서북청년단 사람들도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작품에서는 친구 ‘순익’이가 ‘평안청년회’(실명 ‘서북청년단’)에 잡혀가자 그 단체의 잘 알고 있는 간부에게 부탁해 친구를 구해 나오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려낸 친구가 고마워하기는커녕 자기를 밀고자라고 의심하는 것으로 그렸는데 실제로 작가 선우휘는 서북청년단 깡패들과 잘 아는 사이었지만 그들의 폭력적 행태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다고 합니다.

 

<영화 [깃발 없는 기수]의 어린 시위대 장면>
 

선우휘는 미군과 우익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못지않게 공산주의에 대해 심한 환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작품에서는 공산당 간부 ‘이철’이 애인 ‘윤임’을 미군정 고위 관리의 정부(情婦)로 들여보내 기밀을 빼내오게 하는 타락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윤’은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저주하게 됩니다. 과격한 시위에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한 공산 청년단의 만행을 목격하고는 공산당 선전부장 ‘이철’을 처단하려고 나섭니다.

탈북 월북 대척점에 있었으면서 분단의 아픔을 가장 치열하게 겪은 두 작가의 작품으로 해방 직후 조국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해방이 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아직 광복은 요원하기만 한 이 나라 분단의 비극을 절감하게 됩니다. 황석영이 방북 때 북쪽 문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이태준은 남로당 숙청 때 홍명희, 이기영, 한설야와 함께 숙청을 당했다고 합니다. 북 체제가 못마땅하여 탈북했던 선우휘가 남한에 와서 겪은 자기 분열의 혼란은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본질을 꿰뚫어 보고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지식인의 본분을 망각한 타락한 위선자였을까요. 일제가 패망해 해방은 되었지만 우린 아직 온전하지 못한 반쪽에 불과하다는 비감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방 직후 한국 사회만큼 제국주의 시대에서 냉전 시대로의 전환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아무리 뛰어난 통찰력이라 하더라도 이 시기를 정확히 꿰뚫어 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소설 한두 작품으로 이 시대를 들여다보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긴박하면서도 압축적인 갈등을 복합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전환기였던 만큼 두루 포괄하는 통합적 안목을 갖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서로 방향은 달랐지만 사선을 넘으며 저들이 꿈꾸었던 광복을 이뤄내는 건 지금 이 시대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요. 진정한 광복과 통일을 위해서는 시각의 분별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 다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 고민해야 할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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