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무진, 아버지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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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 아버지의 바다
  • 최정숙
  • 승인 2016.08.19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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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섬섬] (13) 백령도 이야기, 7번째


<아름다운 두무진, 디지털 꼴라지 12개판넬 112x60cm 2011)>


올 여름은 더워도 정말 쉬지도 않고 덥습니다.

저절로 백령도 바다가 떠오르네요! 그 깊고 푸르던 두무진 바다요!

백령도와 연관있는 장소에 가면 어디에나 두무진 사진이 크게 걸려있어 두무진 모습은 이제 대중적인 풍경이 되었습니다.

 

백령섬 최서북단에 위치한 두무진은 북한땅 장산곶을 마주보고 있는데 그 중간 바다에 심청이가 빠졌다는 설화의 인당수가 보이는 곳입니다.

40~50m 높이의 절벽의 기암 괴석들이 해안을 따라 3km나 이어져 있어 서해의 해금강이라 하니 백령도 관광의 백미입니다.

 

 



<멀리 장산곶이 보이는 두무진에 서서 29x21cm 2015>


<평화를 꿈꾸는 곡도-선대암 45,5x53cm 2013)>

 

제가 할머니와 살았던 진촌마을과는 섬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이라 옛날 들은 말씀으로는 어른들이 꼬박 네 다섯 시간을 걸어 가야해서 동네 어른들이 왕래할 일이 있으면 달구지를 타고 가셨답니다. 그러하니 어렸을 적 우리들은 두무진 바위와 절벽들이 멋있다고 얘기만 들었지 가 볼 엄두도 못냈습니다.

 

백령도를 떠나오고 제 나이 45세(1997년)에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백령 고향집을 찾았을 때야 처음 두무진을 보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는 백령도그림을 그려야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지요.

2011년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나자 인천시는 서해5도에 대한 안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문화예술계도 국내외 작가들을 초대, 인천 평화미술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는데 저도 그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답니다.

 

지역에서 해반갤러리와 해반 문화시민단체 일을 하느라 오랫동안 그림 작업을 하지 못했던 저는 그 주제를 어떤 양식으로 담아내야할지 참 고민이 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삶의 고향이며 제 본적지였던 백령도를 담는데 그 상징성으로 두무진을 택하였습니다.

80년대 유화를 만져보고는 너무 오랫동안 붓을 놓아 어떻게 할지 그 맥을 잃어 버렸지만 작업실에 오래전에 사용하다 둔 낡은 물감 튜브들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그동안 잠자고 있던 오일의 점성을 캔버스에 바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백령도 첫 유화작품 아버지의 바다 130x97cm 2011)>


<백령도에 대한 열정과 꿈을 담은 아버지의 바다 65x45cm 2012)>
 

 

두무진이라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가지고 붓과 나이프로 바르고 또 바르고 또 바르기를 수도 없이 하였습니다, 두무진과 바다작품을 하며 지척에 보이는 북녘땅 황해도 옹진반도가 보이니 조국 분단의 아픈 현실이 안타깝게도 느껴졌지만 그 바다가 아버지의 삶으로 투영되어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 바다는 아버지의 바다였으며, 운명처럼 내 근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가슴 밑바닥 숨어 드러내지 못했던 바다였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서해바다 저 멀리 떠있는 백령섬에서 태어나 젊은 면장이 6,25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구호물품을 마련하기 위해 먼 뱃길 하루 꼬박 배를 타고 인천에서 다시 서울 중앙정부를 오가셔야 했답니다. 얼마나 고단한 삶이었을까요?

 

나이들어 고향섬 백령도를 찾아 오래고 오랜 세월 동안 물과 바람으로 굴곡져 있는 두무진 바위 앞에 서봅니다. 아버지의 못다 펼친 짧은 삶과 그 꿈을 위해 깊은 바다 속으로 그 한을 풀어 드립니다.

 

                            (2016년 8월28일에  글, 그림  최정숙)


 


(별빛 내리는 섬-백령도 100x40cm 2015)


( 붉은 노을의 두무진 45,5x53c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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