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무게에 눌려 늘 울고 있어야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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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무게에 눌려 늘 울고 있어야할 이유는 없다"
  • 김연식
  • 승인 2016.08.21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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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 기다립니다

지난 4월 독일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아틱 썬라이즈(Arctic Sunrise) 호를 타고 브레멘(Bremen)이라는 도시에 기항했다. 음식과 선박 부품을 싣기 위해서다. 이곳은 동화 ‘브레멘 음악대’ 덕분에 잘 알려진 관광도시다. 중세 시대의 교회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어 연중 관광객들을 모은다. 시청사 근처 관광지에는 동화에 등장하는 수탉과 고양이, 개, 당나귀의 청동상이 있다. 맨 아래 손닿는 곳에 있는 당나귀의 코와 다리는 관광객들이 하도 만지는 바람에 늘 반짝반짝 윤이 난다. 이걸 만지면 복이 온다나? 도심은 늘 여행의 설렘으로 활기 넘친다. 여행자들의 넉넉한 웃음소리와 함께 행복이 퍼져 나간다. 당나귀의 빛나는 코처럼 도시는 늘 명랑하다.

처음 며칠 동안 주로 관광지를 구경하다가 하루는 자전거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페달을 조금 돌리니 평범한 거리가 나왔다. 사람 사는 곳은 거기서 거기다. 사실 나는 이런 게 좋다. 꾸며진 관광지보다 현지 사람들이 사는 진짜 모습 말이다. 종종 창문 열린 집에서는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말없이 텔레비전을 보는 노부부와 난간에서 빨래를 터는 주부, 그리고 티격태격하는 사춘기 형제가 보였다.

멀리 곡면을 돌자 공원이 나왔다. 주말을 맞은 사람들이 늦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둠지어 공을 주고받으며 놀았다. 그런데 뭐가 이상했다. 그게 무어라 콕 집을 수 없지만 아무튼 냄새처럼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유심히 지켜보니 아이들이 차는 축구공이 전부 똑같았다. 군대 보급품이나 정부 구호품같이 어디 한곳에서 받은 것처럼 말이다. 가만 보니 아이들의 눈썹이 검고 짙다. 코가 높다. 피부색이 어둡다. 머리가 검다. 그리고 언어가 다르다. 멀리 공원의 여성들을 보니 더운 날씨에도 머리에 히잡을 둘렀다. 남녀가 멀찌감치 따로 어울린다. 중동 지역 사람들이 분명했다.



<공원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들. 더운 날씨에도 여성들은 히잡을 쓰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실내 운동장처럼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건물이라기보다 패널을 조립한 텐트다. 크고 하얀 텐트
두 동이 있었다. 그 주변을 컨테이너만한 작은 조립식 주택 수십 채가 둘러쌌다. 그 모든 게 철조망 너머에 있었다. 공원과 연결된 곳에 자동차 두 대가 엇갈려 지나갈 만큼 큰 문이 있었다. 피부가 희고 머리카락 노란 독일인 경비원 둘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난민촌임을 직감했다.



< 독일 브레멘(Bremen)의 시리아 난민촌. 철창 너머로 경비원과 남성 난민이 보인다.>


사진기를 들어 급히 셔터를 눌렀다. 안으로 들어가던 남자가 잠시 멈추더니 밝게 웃으며 포즈를 잡아줬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평범한 남자였다. 급히 사진을 몇 장 찍고 말을 붙였다. 경황이 없는 통에 이름은 묻지 못했다.

-어디서 왔어요?
-시리아.
-뭐해요?
-뭐하냐고요? 기다려요.
바로 그 순간, 문을 지키던 독일인 경비원이 급히 달려와 남자와 나 사이를 갈랐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갔고, 경비원은 단호한 표정으로 집게손가락을 흔들며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나는 “잘 알겠다” 말하고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가방 지퍼를 꼭 잠그고 살살 물러섰다.



< 난민촌의 시리아인 남자. 그는 “기다린다”고 말했다. (신변상 눈가림)>


등 뒤에 서 있는 경비원의 시선을 의식하며 철조망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 날카로운 철조망 너머로 시리아 사람들이 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 역시 주택가처럼 아이 우는 소리와 사춘기 형제가 다투는 소리,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고, 빨래를 터는 주부가 보였다. 난민촌 모서리쯤에 있는 집에서 젊은 남자들이 모여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지 아주 크게, 그리고 오래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건 내가 상상한 난민촌의 풍경과 달랐다. 어디 사진에서처럼 난민들은 아주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 편견이다. 삶의 풍경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철조망 안이든 밖이든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은 먼 타국의 조립식 가건물 안에 있을 뿐이다. 이들이 불행의 무게에 짓눌려 늘 울고 있어야할 이유가 없고, 이들이 집을 떠나 이방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시리아 인구 2천300만여 명 중 절반인 1천160만여 명이 난민이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우리나라에도 시리아 난민 500여명이 있다. 이 숫자는 시리아 난민에 국한된다. 유엔 난민기구의 자료를 보면 전 세계 난민 숫자는 유럽 115만 명, 아시아 631만 명, 아프리카 337만 명 등 1천17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순수 난민의 숫자로, 자국내 실향민과 귀환민, 보호신청자, 무국적자 등 난민보호대상자를 합하면 전 세계에서 4천287만여 명이 난민에 준하는 상태다.

지난 2014년부터 아프리카와 중동의 난민이 급증하면서 사고도 잇따르고 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14년 1월부터 현재까지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가려다 숨진 난민들의 숫자는 1만100여명에 달한다. 바다를 건너려던 81명 중 1명은 침몰사고로 숨지는 것이다.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나는 사진 찍은 남자에게 ‘뭘 기다리느냐’고 묻지 못했다. 답이 무언지 직감하지만 그게 맞는지 확인하지 못했으니 적을 수 없다. 다만 그 기다림이 길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나는 ‘지금 뭐하느냐’고 물었는데, 뒤늦게 남자의 답변을 곱씹으니 점점 의미심장해진다.)


# 어디 난민뿐인가.

이번에는 지난 8월 9일의 이야기다. 나는 이런 저런 까닭으로 에스페란자 호를 타고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기항했다. 선박 관련법상 피할 수 없는 정기점검 차 이곳에 들렀다. 점검과 수리는 보름쯤 걸릴 예정이었다. 매일 오후 5시, 과업을 마치면 동료들과 시내를 구경했다.

이날 미국에서 온 ‘조슈아’라는 친구가 선원들을 모았다. 관광지가 아닌 의미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다들 관심을 보였다. 작정하고 모여서 따라갔다. 우리는 관광지 뒷골목의 ‘브랑크릭(Vrankrijk)’이라는 낡은 클럽에 도착했다.



<클럽 ‘브랑크릭(Vrankrijk)’의 입구. 놀라운 클럽은 허름한 뒷골목에 숨어있었다.>


학교 교실 두 칸쯤 되어 보이는 클럽의 벽은 온통 페인트 그림(그래피티)으로 얼룩덜룩. 입구부터 화장실까지 깨끗한 곳이 없었다. 이런 곳에 찾아 올 관광객은 없어보였다. 둘러보니 사람들의 옷차림과 화장, 문신이 독특했다. 절대 모범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벽에는 이런 글이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사진 찍는 개자식은 없겠지.’ 그러나 나는 사진을 찍고야 말았다.



<클럽 내부의 공연장면. 저렴한 맥주와 훌륭한 음악으로 인해 클럽은 늘 만원이다.>


맥주는 단돈 2천원(1.6유로). 게다가 수준급 음악인들이 공연한다. 그러니 클럽은 늘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이 클럽은 사회변화운동을 후원하는 곳이다. 맥주는 터무니없이 저렴하고 공연은 공짜이지만, 여기에는 입장료가 있다. 입장료는 후원 주제에 따라 2천500원부터 7천원(2~6유로)쯤 한다. 시리아 난민,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에 따른 원주민 이탈 현상), 성적소수자, 소수문화, 채식과 완전채식(비건, Vegan) 등에 대해 알리고 입장료를 후원금으로 쓴다.

이날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 Anarchist)를 후원하는 날로 입장료는 5천원(4유로)였다. 클럽은 값싼 맥주와 멋진 공연을 찾아 온 젊은이들에게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 알리는 한편, 찾아온 시민들을 자연스럽게 후원자로 만들기도 했다. (공연 도중 이날 활동에 대해 설명했는데, 영어로 표현한 네덜란드 사람의 말을 다시 우리말로 이해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유럽 중심부의 선진국 수도. 평화롭고 매력적인 관광지. 행복만이 어울리는 도시.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난민이니 무정부주의자니 하는 이야기는 멀어 보인다. 이들에게 세상의 이면을 이야기하고, -매력적인 음악과 맥주를 매개로- 시민과 소수자 사이에 작은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은 꽤 의미 있는 일로 보였다. 나 역시 즐기다보니 후원자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에서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쏙 들어가 버린 난민 이야기. 그리고 내가 계속 하고 있는 그린피스의 환경문제기까지. 세상의 어두운 문제, 듣는 이에게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이 있다. 이런 가려진 현실은 브레멘 관광지 반대편에 있는 난민촌처럼 조금만 방향을 돌리면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이 글은 너무 고리타분한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우리 행복한 친구들에게 거부감 없이 난민과 북극곰 이야기를 전할 방법을 찾아볼 일이다. 세월호와 김포공항 미화원, 고공농성, 희망버스 같은 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값싼 맥주와 신나는 음악 말고도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언가 방법이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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