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이해하는 일은 온전한 지식을 획득하게 하는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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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이해하는 일은 온전한 지식을 획득하게 하는 기초
  • 김영연
  • 승인 2016.08.26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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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몸을 일깨우는 교육
 
나무를 기어오르는 손과 발
사지 선다 정답을 표시하는 손이 아니라
목공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요리를 하고
손가락질하는 손이 아니라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두 손으로 친구를 안아주는 법을 배우는
운동장을 달리고, 뛰고, 걷는 놀이하는 몸을 교육해요.
우리 동네 학교가 제일 좋은 학교에요.
우리 마을 학교는 주민들이 같이 토론하고
아이들 몸에 맞는 디자인을 했어요.

위 글은 필자가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인상 깊었던 말들
 
 
오늘날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계에 만연해 있는 생각들 중의 하나는 교육이란 이성 혹은 합리성을 계발하는 활동이요. 마음을 단련하는 활동이라 말한다. 교사들이 매일같이 만나는 학생들은 이미 학교에 와서 구조화되고 체계화된 지식을 학습하기 이전에 벌써 몸의 다양한 운동들인 몸짓, 손짓, 눈짓을 통해 체득한 선행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활의 주체인 학습자가 자신의 몸을 통해 체득한 경험이나 지식을 정교화하고 재배열하도록 돕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육학적으로 몸을 이해하는 일은 교육의 대상인 학생의 전인격을 이해하고 온전한 지식을 획득하도록 기초를 마련해 주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몸이 곧 생명이이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이해의 형식은 시대, 문화 그리고 사상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었다. 동양에서는 불교, 유가, 노장사상과 도가 및 기철학적 패러다임에 따라, 서양에서는 기독교, 인간학, 현상학, 사회학적 패러다임에 따라 몸에 대한 이해와 교육내용 및 방법이 다르게 다루어져 왔다. 우리의 언어나 지각능력은 우리의 몸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몸의 일부이며, 몸이라는 특수한 제한을 받고 있으며, 몸은 교육의 중요한 통로이며 내용과 형식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서양의 전통은 플라톤(Platon)으로부터 데카르트(Descartes) 그리고 근대 관념론에 이르기까지 몸은 자아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은 몸은 비이성, 정념, 욕망의 자리에 올려놓고 무수한 실험들을 해왔으며, 서구의 주지주의적 전통에 있어서 ‘몸’은 의미와 합리성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는 방해꾼이며 정신만이 객관성과 진리성을 전파시켜왔다. 이러한 사유가 학교는 아이들의 정신을 교육시키는 장소이며 학생들의 몸을 감독하고 제한하는 일을 통하여 학교의 교육적 임무를 수행하고자 학생들의 몸을 일정한 방향으로 통제하는 방식을 통해 학생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다.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권력으로서의 지식이 어떻게 인간과 그의 육체를 처벌, 감시하며 그로부터 어떻게 근대의 인간상이 탄생하였는지를 보여주며, 어떻게 학교가 ‘권력의 역사적 축소판’으로서 “거대한 감옥”으로 완성되었는지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몸의 함축성을 강조하면서 몸을 철학적으로 중요한 테마로 이해했고 이와 함께 몸성(Leiblichkeit)에 관한 철학적 연구의 길을 열었다. 공허한 도덕 그리고 삶과 괴리된 형이상학의 추상화에 대한 니체의 투쟁은, 삶은 몸을 통해 실행되며, 그 때문에 삶에 관한 성찰인 철학은 몸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실제의 삶과 관련된 현상들은 단속성 교육관으로서 ‘비교육적인, 비합리적인,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우연적, 무의도적, 비구조적, 탈목적적, 무의식적’ 특성들로서 분류되며 동심구조적이며, ‘관계맺음, 과정, 전체성’ 등에 기초하여 학교 속에 갇힌 개인이 아니라 세계 혹은 삶의 전체적인 관련성 속에서 교육적 현상들을 해석하였다.

오늘날 학교는 교육에서 중심적이며 모든 것이라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으나, 우리의 학교교육은 몸이 교육의 중요한 통로요, 내용이요, 형식임을 간과하고 몸과 교육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소홀하였다. 전통학교교육에서 행해졌던 ‘몸의 축소 ’또는 ‘몸의 은폐’로 주도되었던 지식교육 중심의 틀에 머무르게 되었다. 오직 두뇌의 교육을 통하여 전인교육을 필요로 하는 학생의 몸은 학교에서 소외되었다. 학교는 더 이상 교육의 본질을 행하지 못하였으며, 교육이 추구하는 전일성 즉 정신과 육체, 인간과 환경, 나와 타자간의 올바른 관계맺음을 이행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학교 교육에서 몸의 올바른 이해가 수립되지 않고 지적 수월성과 경제성만을 추구하는 학교교육과정으로 몸의 구속과 통제를 통하여 지식의 확충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학생의 몸은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아동기의 ‘학습’은 행동변화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제각기 다양한 의미 및 경험지평에서 구성되어지는 일종의 이해행위로 규정된다. 따라서 학습자의 경험지평은 교육실천에서 포착해야한 핵심적인 학습목표가 된다. 그러므로 아동이 자신의 몸을 매개로 세계를 만나고, 세계를 소유하며, 세계에 속함으로써 자아와 타자, 그리고 세계의 간주관성을 형성하며 ‘몸 도식’을 이루어가고 현재의 몸에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도래가 함께 공존하면서 여러 겹의 층위를 이루고 있으면서, 몸은 그 자체로 시간성과 역사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몸 도식’을 교육에 원용하기 위해서는 몸이 가지는 시간성을 이해하고 매우 천천히 몸은 세계를 지각해가며, 자신이 지각한 형태로 그 몸 틀을 만들어 감을 교육자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몸에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내재한다. 우리는 몸의 시·공간성이 인간외적 조건으로 인하여 제한 받지 않고, 타자와 시·공간성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완성해야한다. 학교교육은 학생들의 몸과 시공간적 특성에 부합하여야 한다. 교육의 형식은 항상 몸의 전체성과 관련하여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므로 교육은 올바른 몸을 사용하는 교육의 단속적인 형식들이 지속성과 함께 공존하여 전인교육을 이루어 나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교육이 삶의 완전성을 추구한다면 곧 교육은 몸 자체이다. 몸은 주체성의 표현양식이요, 도덕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교육내용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의 온전한 몸을 위한 숨 쉬는 공간으로서 학교라는 입체적인 공간으로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공간이 얼마나 생태적인가 하는 문제는 현대사회의 도시중심에 자리 잡은 학교의 한 공간의 모습은 인조 잔디에서 독성을 지닌 화화물질이 뿜어져 나오는 잔디운동장과 모래와 흙 대신 탄성고무 바닥재로 채워졌다. 몸에 안 좋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전부 엄청난 돈을 들여 철거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교 공간도 대한 몸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반성과 성찰을 할 수밖에 없다.

영유아기부터 아동청소년 시기의 삶의 문화에 맞는 교육공간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교육, 건축, 철학 등을 포함하여 교육공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지역사회의 대화의 장이 되면 좋겠다. 어떤 건축학자는 교육은 건축과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미래를 예측하면서 건축은 공간을, 교육은 사람을 만들어 낸 다는 점과 아동기의 실내외 공간적 체험의 특성이 촉각성과 상호주관성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기대는 우리 아이들의 몸을 이해하는 것은 생명적 존재를 가진 인간을 위한 지역사회가 어떻게 미래를 내다보고 디자인하고 혁신(innovation) 할 것인지에 대한 미래 지향적 담론이 생성될 것이고 이러한 담론의 흐름 속에는 아이들의 삶과 배움의 공간, 교실이 전부가 아니라 숲이고, 개울이고, 마을이며 우리 마을 이웃의 농촌이란 사실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 사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혜와 대화의 교류 활성화 되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이야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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