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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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로마
  • 서진완
  • 승인 2016.09.20 2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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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로마인 이야기'를 눈으로 확인한 시간들

서진완 인천대 교수(행정학)는 지난 2013년 1월 3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365일 간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중·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와 아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1년이란 시간을 붙어 있었다. '24시간 365일'을 꼬박 함께 여행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기록을 <인천in>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시에나 성당 ⓒ 서진완

옛날 중세시대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또 다른 곳으로 나는 시에나(Siena)를 선택했다. 플로렌스의 남쪽 약 50km 지점에 있고 과거 로마인의 식민도시를 거쳐 숙소로 가기로 했다. 이곳은 14세기 전반에 시에나파가 성립될 정도로 회화 분야에서 시에나 르네상스를 발전시킨 곳이며, 12~14세기 중세 이탈리아에는 플로렌스와도 자웅을 겨루던 도시 국가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궁금했던 곳이었다. 구시가지로 들어서자 언덕 위로 벽돌과 석재로 축조된 중세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캄포(Campo)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성당은 흰색과 검은색의 대리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이 흐린 날씨 탓에 도시 주변이 차분하게 느껴졌다. 숙소로 가는 길에 작은아이의 생일 축하를 위해 케이크 파는 곳을 찾았지만 찾지 못해, 다음날 사주기로 약속하고, 오늘은 축하만 해주기로 했다. 숙소는 시에나 근교의 고성을 개조한 곳이었다. 작은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려면 음식을 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고, 며칠 동안 누적된 피로도 풀어야 했기 때문에 선택한 곳인데, 아내는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언덕아래 펼쳐진 푸른 들판과 나무들이 보이는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고성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로마인 이야기’는 꼭 읽어야해!

새벽부터 내린 비가 아침에는 제법 굵게 내렸다. 들판 너머 푸른 초원이 더 푸르게 보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내가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는 소리에 깨어 아이패드를 펼쳤다. 고등학교 친구가 먼 하늘로 떠났다는 소식을 확인했다. 마침 비도 내리는데다 민감한 아내에게 얘기도 못 하고 한참은 있었다. 아내는 내가 더 잘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더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가게를 찾아 작은 아이가 원했던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샀다. “생일, 축하해! 사랑한다!”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사는 것이다. 

 

로마 시내의 모습 ⓒ 서진완


조만간 시스턴(Sistern) 성당이 일반인들에게 더는 개방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 때문에 서둘러 바티칸(Vatican)을 찾았다. 로마 시대의 조각품과 그림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어떻게 느낄지 매우 궁금했다. 아이들은 각 방마다 전시된 유물들을 자세히 보았고, 라파엘로의 그림이 있는 방을 지나 시스턴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드디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만났다.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서 한참 동안을 천장을 쳐다보았다. 작은아이보다 큰아이가 더 감동을 하는 것 같다. 베드로 성당 광장으로 나와서도 아이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아내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아이도 진지해졌고, 큰아이는 그 규모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놀라워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하네요!” 아내와 함께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받았던 그 느낌을 아이들도 그대로 받은 것 같다. 



이야기속 격투사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로마의 '콜로세움' ⓒ 서진완


로마를 이해하려면,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오는 것이 좋다. 여행을 오기 전부터 여러 차례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75,000명을 수용했다는 콜로세움(Colosseum)을 보면서 아이들은 여러 가지 의문과 질문을 했다. 역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교육적인 것은 없는 법이다. 아이들과 난간에 기대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격투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떠올렸다. 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바로 그 언덕을 생각하며 포로 로마노(Foro Romano)도 보았다. 과거 화려했던 로마제국의 심장부를 직접 아이들과 함께 걸었다. 과거의 모습은 무성한 수풀 속에 그 잔재만 여기저기 남아있지만, 돌로 만든 거리와 거대한 석조물의 상당 부분이 그대로 남아있어 장중한 느낌이 든다. 당시 서양의 모든 길이 이곳을 향해 모여들었고, 로마의 상징적인 거리라는 생각에 이르면, 돌 하나하나도 다시 보게 된다. 
 



트레비 분수에서 작은 동전을 던져보기도 하고(위),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보기도 했다. ⓒ 서진완


로마 시내에서 우리는 익숙하고 알려진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힘들면 버스를 탔다. 얼마나 많이 걸었을까?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탔고, 트램도 이용했으며, 중간중간 열심히 걸었다. 아내는 대학 시절 이곳에 와서 걸었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길잡이 역할을 했다. 트레비분수(Trevi Fountain)에서 작은아이는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빌었고, 우리는 인파들 틈 속에서 앉아 따스한 햇볕을 즐겼다. 스페인광장에서는 큰아이와 여행을 시작하면서 고민해 왔던 진로문제에 대해 꽤 오랫동안 얘기도 나누었다. 큰아이는 자신이 그동안 생각했던 부분과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여행을 시작하면서는 화두처럼 시작했는데, 지금도 계속 고민 중이다. 지난 4~5개월 동안 관련 학과 정보를 다 읽고 혼자서 생각을 해보고 있다. 그리고 나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나 잘못 이해했던 부분을 확인했다. 이전보다 자기 생각을 많이 좁혔다. 그것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나는 여행을 마치는 날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다시 버스를 탔다. 판테온(Pantheon)을 빠트릴 수는 없다. 베네치아 광장이 보였고 버스에서 내렸다. 처음 로마에 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곳이었는데, 역시 큰아이도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리고 진실의 입(Circo Massimo)이 있는 성당에는 문을 닫는 순간에 도착했다. “Please!" 간곡하게 부탁하면 통하기 마련이다. 우리까지만 허락을 해주겠단다. 아이들과 함께 진실의 입에 손을 넣었다. 물론 우리들의 손은 무사했다. 로마에 있는 동안 열심히 많은 곳을 다녔다. 로마의 유적 가운데에서 큰아이는 베네치아광장, 콜로세움, 그리고 포로로마노를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 꼽았지만, 작은아이는 트레비분수와 스페인광장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아이의 성격에 맞는 선택이었다. 각자 로마를 열심히 보았다는 사실에 그동안 피곤이 사라졌다.


폼페이와 소렌토를 보고 다시 이탈리아 북부로

수녀님이 운영하는 로마의 숙소를 떠나 국도를 타고 나폴리(Napoli)를 지나 폼페이(Pompei)로 향했다. 세계 3대 미항이라고 알려졌던 나폴리! 누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정했는지. 찾을 때마다 지저분했다는 기억만 남긴 곳이었다. 아이들은 나폴리를 어떻게 볼지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했다. 시내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쓰레기가 뒹굴고, 트램이 다니는 길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주차하고 있는 순간 음산한 폐허 같은 분위기가 엄습해 와서 잠시라도 머물러 있기에 부담이 되었다. 나폴리에 대한 아내와 아이들의 인상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항구라고 하기에는...” 옛날의 모습을 되찾기 전에는 이곳은 더는 미항이 아니다.  


폼페이에서의 태양 빛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 서진완


폼페이에 도착하자 뜨거운 태양 빛으로 대지는 후끈 달아올랐고, 모자를 쓰지 않고서는 이 햇살을 피할 길이 없었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도 뜨거운 햇살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는데, 오늘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비싼 입장료에 비해서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해요!” “아빠, 안내지도가 없다는데요?” 너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라서 더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인지, 직원들의 태도는 퉁명했다. “기분 좋게 보자!” 하며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화산폭발로 인해 폐허가 된 이곳을 둘러보면서 이번에는 아이들의 설명을 들었다. 로마사람들이 살았던 집들과 골목길, 대로와 신전 등을 보고, 언덕 뒤편에 있는 또 다른 유적까지 아이들 손을 잡고 구석구석 다 보았다. 화산재로 묻혀있는 과거 로마인의 시체를 직접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코와 눈을 막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그대로 죽어있는 모습을 볼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아내와 나는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뒤에서 따라 걸었다. 뜨거운 햇살은 사람을 지치게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와서 보니 힘이 났다. 


소렌토의 경치는 언제봐도 멋지다. ⓒ 서진완


소렌토(Sorrento)로 가는 길은 너무나 아름다웠던 기억 때문에 차의 속도를 줄이고 주차할 공간이 보이면 길가에 차를 세우곤 했다. 역시 다시 봐도 하얀색 집들과 해안절벽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멋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오자고 아내에게 말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켰다. 캠핑장 방갈로는 소렌토 항구가 바라다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해 있어서 야외식탁에 앉아서 바라보면 소렌토의 전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여행했던 기억들을 되살리며 서로 돌아가면서 평가도 하고,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서도 얘기했다. 마침 소렌토 항구 근처에서 누군가 터뜨린 폭죽이 보였다. 이 멋진 저녁에 폭죽까지 터뜨려주다니! 밤이 깊어지면서 식탁 주변에 여기저기 반딧불까지 보였다. “아~~~ 좋다”



아시시 성당에서 바라보는 풍경 ⓒ 서진완


소렌토를 기점으로 이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내가 추천한 아시시(Assisi)는 멀리서도 저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언덕 위에 13세기 로마 고딕양식의 대성당이 서 있고 그 주위로 예쁜 하얀색 집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가 태어난 곳이며, 그의 무덤이 대성당 지하에 있어서 가톨릭의 주요 순례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마을에 있는 숙소는 그래서인지 종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났다.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고, 골목마다 예쁜 집들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성당은 1997년 이곳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상당부분이 훼손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했다. 지하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보고 지오토(Giotto)가 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도 보았다. 마침 성당의 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자, 비록 가톨릭을 믿지는 않지만 경건한 마음에 저절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작은아이는 작은 동전 하나를 기부함에 넣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아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아이와 나는 먼저 성당을 나왔다. 큰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푸르고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탁 트이고 눈이 밝아졌다. 


이런! 


산마리노로 향하는 길,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 서진완


산레오 성채 ⓒ 서진완


아시시에서 정갈한 아침 식사를 먹었다. 숙박비를 지급하고 아시시를 아쉬워하면서 산마리노(San Marino)로 향했다. 아내가 어젯밤 꿈에서 유로화를 주웠다고 해서, 이게 근심이면 어떡하나 속으로만 걱정하고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국도를 타고 산마리노를 향하는 길은 이탈리아의 산악지역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기에 좋다. 차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면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산레오(San Leo)성채가 서 있고, 언덕을 내려와 산마리노의 행정관청이 있는 성의 중심지역으로 향하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지만, 세계에서 5번째로 작은 국가 산마리노가 보였다. 이 작은 나라가 주변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해 왔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중립국으로 전쟁 속에서도 자국민을 보호해왔으며, 전쟁 후에는 서유럽국가 중 유일하게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한 독특한 경험이 있다. 안도라처럼 면세로 쇼핑객을 유치한다든가, 모나코처럼 카지노 등을 유치하는 등의 전략을 쓰고 있지 않아 평범한 시골 마을의 느낌을 주는 평화로운 곳이다. 

 

아시시에서 우리 가족이 머무른 숙소. ⓒ 서진완
 

산마리노 국경을 통과하기 직전 주유소에 들렀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돈을 지급하려고 지갑을 꺼내서 신용카드를 찾았는데 도대체 신용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당신, 내 카드 본 적 있어요?” 우선 아내의 카드로 주유비를 결제하고, 잠시 차를 정차하고 차 안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아침에 숙소에서 숙박비를 지불한 것 이외에는 오늘 카드를 사용한 적이 없다. 주유를 도와주었던 직원에게 부탁해서 아시시의 숙소에 전화를 걸었다. “휴~”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다행이다. 숙소에 내 신용카드가 있다고 했다. 원하면 우편으로 다음 숙소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아시시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신용카드를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돌아가는 190Km가 힘든 줄도 몰랐다. 아시시에서 무사히 카드를 되찾고, 다시 베니스(Venice)로 출발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아침에 아내가 꾼 꿈에 대한 액땜으로 생각하고 더 큰 근심이 생기지 않은 것에 고마워하자고 했다, 

베니스의 주차장은 너무 비싸다. 차를 가지고 들어가면 무조건 주차장을 이용해야 하며, 주차비로 시간과 관계없이 30유로를 지불해야 한다. 베니스의 가장 중심인 산마르코(San Marco) 광장까지 크고 작은 다리를 건너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다양한 종류의 고급스러운 물건들을 파는 가게, 좁은 골목길과 이어지는 미로 같은 수로, 수로 사이로 다니는 곤돌라를 보면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눈 앞에 펼쳐진 색다른 모습 그 자체가 베니스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이곳의 기억을 더듬어 안내해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산마르코 광장을 찾았다. 이 광장은 사진에서 여러 번 보았지만 넓은 광장에 들어선 낡은 흰색 건물들과 가운데 들어서 있는 대성당의 아름다움은 역시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두칼레(Ducale)궁전과 이어진 탄식의 다리를 보면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본 탄식의 다리를 떠올렸다. 아이들에게도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베니스가 많이 신기한 모양이다.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베니스 ⓒ 서진완 



친구를 만나고, 기분 좋게!


스위스, 트완에 살고있는 친구와 만나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 서진완


밀라노(Milan)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타자 스위스 번호판을 단 차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국경 마을 코모(Como)에 도착했다. 내비게이션으로 스위스에서 국도를 탈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그럴 경우 거의 두 배가 넘는 시간이 소요된다니, 결국 스위스에서도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스위스 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스티커(Vignette, 40스위스프랑)를 사야 하는데, 스티커 없이 이용한 것이 적발되면 벌금으로 100스위스프랑에 스티커 구매비 40 스위스프랑을 그 자리에서 내야 한다. 알프스의 눈 덮인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하늘은 어두워지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졌다. 16km나 되는 고타드(Gotthard)터널을 지나자 세찬 비가 그쳤다. 

오후에 친구가 사는 스위스 트완(Twann)에 도착했다. 롤렉스와 오메가 시계를 생산하는 비엘(Biel) 근처 인구 900명이 산다는 조그만 마을이다. 완행열차가 서는 간이역이 있고 100년이 넘었다는 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이 있는 그야말로 그림 같은 작은 마을이다. 차를 주차하는 순간 친구가 텃밭에서 일하다 말고 뛰어나왔다. 30년 만에 만나는 친구이기에 너무나 반가웠다. 일찍 일을 마치고 우리를 기다렸다는데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서 혹시나 했다고 했다. 친구가 가꾸는 텃밭도 구경하고 마을도 한 바퀴 돌아서 산책을 겸해서 구경했다. 마을 앞에 있는 호숫가도 거닐었다. 마침 날씨가 흐려서 알프스의 산을 볼 수는 없었지만, 확 트인 호수를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친구를 만나러 오늘 온종일 운전을 하고 왔지만, 친구를 보는 순간 피곤함도 다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친구 부인은 서글서글한 성품에 뛰어난 요리 솜씨까지, 급하게 준비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맛있는 된장국에 푸짐한 저녁상을 받았다. 아이들도 밥을 두 그릇씩이나 먹었다. 역시 우리에게는 된장국에 김치가 최고다. 햇살이 사라지고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스위스 날씨가 예전과 달리 며칠 동안 계속 추웠다고 했다. 따뜻한 베니스에서 입고 왔던 옷으로는 이곳에서 지내기에 춥다. 다시 외투를 꺼내서 입어야만 했다. 
 


리헨슈타인 국경의 모습 ⓒ 서진완


트완에서 이틀을 머물고 루체른(Luzern)으로 향했다. 트완을 떠날 때 날씨가 괜찮을 것 같았는데, 루체른에 가까워질수록 흐려지더니 급기야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산으로 올라가는 것은 포기하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인 카펠(Kapell)교를 보고 루체른을 떠났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으로 가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리히텐슈타인은 스위스의 고속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국가로 가로 6km, 세로 25km 밖에 되지 않는 면적에 3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국가다. 경제규모는 크지만 외교와 국방을 스위스에 위탁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스위스의 한 주나 비슷하다. 현재 행정과 사법의 막대한 권한을 가진 절대군주인 왕이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로 조그만 면적의 영토와 왕, 그리고 백성이 어우러진 알프스의 조그만 나라이다.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곳 리히텐슈타인은 스위스,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이 붙어있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나라의 고속도로를 이용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잠시 후 터널 앞에서 드디어 독일의 속도제한이 없는 고속도로가 시작되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얇아지길 반복하는 탓에 속력을 높여 달릴 수는 없었다. 속도제한이 없지만 차들이 빨리 달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큰 아이도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속도제한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일까? 경찰차가 보여도 더 이상 속도계를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정리 = 이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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