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1592] 동북공정? 정여립에 주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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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 동북공정? 정여립에 주목하다
  • 이한수
  • 승인 2016.09.2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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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 (25)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CCTV와 KBS 합작

중국의 국영 방송사 CCTV와 KBS가 합작한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팩추얼 드라마(factual drama)라는 양식도 흥미롭지만 양국의 국영 방송사가 합작하여 조선의 임진왜란을 그려냈다는 점이 관심을 끌 만합니다. 한국 정부의 미사일 방어체제 ‘사드’ 도입 계획에 대해 중국 정부가 반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합작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는 게 참 의미심장합니다. 야만족 왜적이 문화적 종주국 조선에 반역하였다가 폐퇴한 일로 ‘임진왜란(倭亂)’이라 배워 왔는데 이 작품은 임진전쟁을 봉건시대 말기 격변기에 벌어진 국제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임진년 전쟁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6세기 말 동북아시아 정세는 참으로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200년 동안 ‘중화’를 경영했던 명 황조는 쇠퇴 일로에 들었고 만주 일대의 여진족은 ‘누루하치’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독립 국가를 세워갔으며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막부를 통일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은 당쟁과 왕권 약화로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어찌하여 한반도 주변 사정에 이토록 어두웠을까요. 조선 사회 정체성의 기틀이 된 성리학은 동양 철학의 최고봉이라 불릴 만큼 조선의 자부심이었지만 그 근본주의 경향이 문약(文弱)과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자초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진족을 통일시켜 금나라를 세운 ‘누루하치’는 신분 차별을 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일본 막부를 통일하고 명을 정벌하겠다고 나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한 신분 출신이었습니다. 신분 질서를 혁파하면서 새 시대를 열어가는 게 대세였는데 조선의 사정은 좀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나 왜적을 물리친 지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조선도 시대의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 하며 나라를 위해 몸 바쳤고 전투 기록 [임진록]에는 천한 신분의 병사들을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만민평등 공화주의를 기치로 내건 선각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임진전쟁 이전에 ‘정여립’이란 선각자가 공화주의 사상을 갖고 ‘대동계’라는 자생적 공동체 사회를 일구었다는 게 너무나 놀랍습니다. 그가 남긴 문서에 ‘천하공물(天下公物設), 하사비군(何事非君)’이라는 구절이 남아있는데 ‘천하는 만인의 것이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나’라는 뜻으로 이는 곧 공화주의를 말한 것이 아닙니까. 민주주의 사상은 서구에서 시작되었다고만 알고 있지,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에 이 땅에서 이미 공화주의 사상이 싹텄다는 걸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기득권 세력이 시대를 앞서간 정여립을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반역을 꾀했다 하여 수많은 선비들이 가담자로 몰려 죽임을 당합니다. 그 끔찍한 살육을 주도한 자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시인 ‘정철’입니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절창을 남긴 그가 이토록 잔인한 사람이었다니요.

 

[징비록] 정여립 모반 사건 관련자 추국 장면


정철이 기축사화 때 반대파 선비를 1000여 명이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의 문학 작품이 어떻게 읽힐까요. 그의 작품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은 학생들에게 많이 가르치는 고전 작품인데 학생들이 그의 잔인한 면모를 알면 그의 작품이 서정적으로 읽힐 수 있을까요. 작가의 삶과 분리하여 작품의 내적 완성도만을 논하는 문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정철은 그 비중만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가입니다. 그의 정치적 이력을 알게 되면 그를 문학 예술인으로 여기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정철은 어릴 때 궁궐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왕족과 다름없이 컸다고 합니다. 그의 큰 누이는 인종의 후궁이었고, 나중에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과는 소꿉친구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의문사하자 왕좌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외척 세력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때 ‘윤임’ 집안이 밀어준 계림군은 정철의 매부입니다. 입에 올리기도 꺼림칙할 만큼 추잡한 권력 다툼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정철의 내면이 얼마나 황폐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이 끔찍한 살육전은 ‘을사사화’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화(士禍)라고 하기도 낯 뜨겁습니다. 결기 있는 선비들이 기득권 세력 훈구파에 대항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논쟁을 벌이다가 참화를 입은 걸 ‘사화’라고 하는데 을사년 사태는 그와 거리가 먼, 외척간의 추잡한 권력 다툼일 뿐이었습니다. 을사사화로 집안이 거덜나다시피 한 정철은 나중에 앙갚음하듯이 기축옥사를 주도하면서 만행을 저지릅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추궁하여 관련자를 처단하면서 벌어진 참극인데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났습니다. 4대 사화(士禍)로 죽임을 당한 선비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선비들이 기축옥사로 처형되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정치적 탄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합니다. 정여립이 만든 ‘대동계’라는 단체가 반역 군사 조직이었는지, 나라에서 인정한 자생적 민방위 조직이었는지, 실제로 거사를 도모했는지, 반대파에 의해 조작된 것일 뿐인지 잘 분간이 안 됩니다. 정여립이 애초에는 서인의 거두들과 가까웠는데 서인의 태두 율곡 이이가 사망하고 난 뒤에 동인으로 붙어 서인들을 비판하면서 당쟁의 화근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대동계(大同契)’가 주창한 ‘만민평등(萬民平等)’이 곧 왕정 폐지와 민주 공화제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정여립을 역적으로 그려내는 게 마땅할까요, 아니면 혁명가로 그려내야 할까요.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담고 있는 팩션물로는 KBS 사극 [징비록]과 이준익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있습니다. 50부작으로 만들어진 사극 [징비록]은 임진전쟁 때 병권을 지휘했던 유성룡의 기록에 의거하여 만들었으니 역사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했다고 할 수 있는데, 1,2부에서만 정여립 사건을 잠깐 다루어 아쉬웠습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기축옥사가 종결되고 5년 뒤 임진전쟁 중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다뤘는데 정여립과 연계된 사건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사건은 별 관계가 없는 별도의 사건이었지만 발생 배경과 원인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여립의 ‘대동계’나 이몽학의 ‘동갑계’나 신분의 차별 없이 노비나 승려까지 동참했으며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많은 의병장들이 내통 혐의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는 점에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정여립 사건 때에는 1000명이 넘는 선비들이 처형당했고 이몽학 사건 때에도 병조판서 이덕형이 내통했다고 조사를 받는가 하면 유명한 의병장 김덕령, 곽재우, 홍계남 등이 취조를 받다가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성격이 비슷한 이 두 사건을 영화는 한 사건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홍석영 장편소설 『소설 정여립』


정여립 사건을 집중적으로 그린 작품으로는 홍석영의 [소설 정여립]이 있습니다. 소설은 정여립이 당쟁에 염증을 느껴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살면서 바른 향풍을 조성하기 위해 헌신했는데 억울하게 모반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여립이 율곡 이이와 성혼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서인으로 분류되었는데 이이가 죽고 나서 동인으로 변절하였다고 서인들이 음해를 하는데 정여립이 실제로는 중도 통합을 추구했던 스승 이이의 입장을 배반했다고 볼 수 없으며 동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달’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그런 모함을 듣게 된 것입니다.

소설 속에서 정여립이 따르거나 가깝게 지냈던 학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의 의식 세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율곡 이이와 유성룡이 선조에게 정여립의 등용을 추천했던 대표적인 인사이고 동인의 핵심 인사인 ‘이달’, ‘허엽’은 그와 친분이 두터운 친구였습니다. 유성룡은 명나라에 공물 바치기를 반대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자고 주장했을 만큼 동북아 정세에 밝은 사람이었으며 친구 ‘이달’은 서출이어서 변변한 관직에 나갈 수 없었지만 문인으로 인정받았으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을 가르친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과 가깝게 지냈으니 정여립은 당대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국운은 위태로운데 나라 밖 사정에 어두운 조정의 무능을 너무 답답해했을 겁니다.

 

KBS 드라마 [징비록] ‘대동계’ 군사 훈련 장면


정여립이 고향으로 내려가 ‘상춘곡’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정극인’의 향약을 본받아 향읍 공동체를 일구고 ‘대동계’라 이름하며 향사례(鄕射禮)로 활쏘기 대회를 여는 등 건강한 향풍 조성에 힘쓰는데 이 일로 모리배들에 의해 군사 훈련을 하며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을 받게 됩니다. 서인은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정철을 중심으로 고변을 꾸미고 기축옥사라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며 동인들을 싸그리 몰아냅니다. 간교한 짓으로 서인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지만 임진전쟁을 맞아 왜놈들에게 무기력하게 강토를 내어주고 마니 그들의 국정은 한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장악하고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어 왜군은 폐퇴하게 되지만 국운이 다한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구해준 은혜)으로 떠받들면서 결국 병자년 삼전도의 수치를 자초하고 맙니다.

조선 정치사를 살펴보면 볼수록 제 잇속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후안무치에 분통이 터집니다. 분파와 분열이 없었던 시대가 있겠는가만 임진년 병자년 전란기의 당쟁은 나라를 말아먹을 지경이었으니 그 죄상(罪狀)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외부의 적은 내부를 단결시키게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외적의 침략을 받아 조정 전체가 결단 나게 된 마당인데도 분란이 끊이질 않았으니 침략자들의 조소를 받아도 싸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습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해내기 위해 헌신한 민족의 영웅들이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버렸으니 이 부끄러운 역사를 후학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서인들은 동인인 유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의 공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유성룡의 자주적 외교 노선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분 질서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정책에 대해서도 반발했습니다. 양반도 전쟁에 동원하게 한 ‘속오군제’와 공에 따라 노비를 양민으로 해방시켜주는 ‘면천법’은 신분질서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비난했지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합심하여 국란을 극복하면서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는데 참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전쟁이 수습될 국면이 되니 어김없이 반대파에 대해 탄핵을 제기하고 민족적 자부심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비참한 역사는 이 시대를 향해 울부짖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양심을 모반으로 음해하며 사대(事大)에 빌붙어 권력을 탐하는 거짓 위정자를 잘 가려내기 위한 교훈으로 되새겼으면 합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이 대하사극 [킹기스칸]을 제작 방영하면서 몽골 역사를 편입시키려는 게 아닌가 의혹을 받은 것처럼, [임진왜란 1592] 공동 제작이 혹여 동북공정의 일환은 아닌지 눈여겨보아야 할 듯합니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험난한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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