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학이(學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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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편 학이(學而)
  • 이우재
  • 승인 2010.01.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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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편 학이(學而)

  논어의 각 편의 이름은 대개 첫 장(章)의 처음 두 글자 내지 세 글자를 취해 만들어졌다. 학이편의 학이라는 이름은 첫 장(章)의 子曰 學而時習之에서 子曰을 뺀 첫 두 글자에서 취해졌다. 이는 당시로서도 드문 일이다. 관중(管仲)의 저서라고 전해지는 『관자(管子)』 제 1편의 이름은 「목민(牧民)」인데, 이는 그 주제가 ‘백성의 육성’이었기 때문이고, 장주(莊周)가 썼다고 전해지는 『장자(莊子)』 첫 편의 이름은 그 주제가 ‘정신의 자유로운 비상’인 까닭에 「소요유(逍遙遊)」라고 붙여졌다. 논어와 같은 작명법은 『맹자(孟子)』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맹자(孟子) 자신이 공자의 후계자를 자임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명법은 논어가 공자의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고, 후대의 제자들이 각자 기억하고 있던 단편적인 공자의 말들을 논찬(論纂)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해설> 자(子)는, 현존하는 논어의 주석(註釋)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흔히 고주(古注)라고 불리우는 위(魏)의 하안(何晏)이 쓴 『논어집해(論語集解)』(이하 고주로 약칭)에 인용된 후한(後漢)의 마융(馬融)의 해설에 의하면, 남자에 대한 통칭(通稱)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학덕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을 존칭하는 말로 쓰여졌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인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므로, 공자의 말은 대부분 子曰로 시작한다. 그러나 간혹 孔子曰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설(說)은 여기서는 기쁘다는 뜻의 열(悅)로 읽는다. 그러나 중국의 조기빈(趙紀彬)은 『논어신탐(論語新探)』(국내에서는 『反논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에서 ‘이해가 된다’는 뜻의 해(解)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기빈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나, 전통적인 해석의 편이 맛이 더 깊은 것 같아 그 쪽을 따랐다.
  온(慍)은 화내는 것이다. 군자는 그 어원으로 살펴볼 때, 君(임금)의 子(아들) 즉 신분이 높은 자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자를 가리킨다. 이후 군자는 유교 문화권에서 선비의 이상향 즉 이상적인 인격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뜻이 전화되었다. 영어의 gentry가 본래 신분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나, 여기서 유래한 gentleman이 예의범절이 바른 훌륭한 사람이란 뜻으로 전화된 것과 같은 예이다. 
  배움(學)은 세상의 이치를 먼저 깨달은 이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움도, 마치 새가 처음 날개짓을 배울 때 틈만 나면 날개짓을 연습하는 것처럼(習은 새가 날개짓을 익히는 것을 나타낸다), 수시로 익혀 날마다 그 모르는 것을 알아가고, 달마다 그 할 수 있는 바를 잊지 아니할 때(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자장 5), 비로소 그 배운 것이 몸에 익어 완전한 내 것이 되니, 이것이 어찌 배움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학문을 배우고 익혀 덕이 높아지면 외롭지 않으니(德不孤 必有鄰―이인 25) 나와 학문을 같이하고자 하는 벗들이 먼 곳을 불문하고 찾아와 나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어, 나의 학문과 덕은 더욱 높아진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안연 24). 그러니 이게 즐거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배움은 나 자신을 완성시키는 데 그 뜻이 있지, 남에게 자랑하는 데 있지 않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헌문 25). 따라서 세상이 나의 학문을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노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군자는 세상에 도가 행하여져 학문이 인정받고 쓰여지게 되면 나아가 천하 만민을 위해 배운 바를 다 펼칠 것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물러나 조용히 학문을 연마할 뿐이다(用之則行 舍之則藏―술이 10\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券而懷之―위령공 6).       

  <보충> 논어는 한 주제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고, 제자들의 기억 속에 산재하여 있던 스승의 말씀을 논찬한 것이다. 따라서 각 편의 작명법에서 알 수 있듯이, 각 편끼리의 관계는 상호 독립적이며 한 편 안에서도 각 장들 또한 상호 독립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의 첫머리에 이 말이 실린 것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아마 제자들이 볼 때 이 말이 공자의 일생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공자의 가장 주된 관심은 정치에 있었다. 그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백성의 행복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는 민본주의(民本主義)적인 정치를 주장하며 수레에 몸을 싣고 천하의 제후를 상대로 유세에 나섰다. 그러나 대략 13년 간의 방랑 끝에 그가 얻은 것은 참담한 좌절감 뿐,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육성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일생을 마감하였다.    높은 이상과 학덕을 지녔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그가 만일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여생을 보냈다거나, 또는 세상을 등진 채 냉소로 일관했다면, 오늘날 인류의 사대성인의 하나로 추앙받는 공자가 있을 수 있었을까?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공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비록 세상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어도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꾸준히 학덕을 연마하여 자신을 완성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함께하는 학덕의 연마는 그의 남은 삶의 중요한 목표이자 기쁨이었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간혹 그를 이해하고 찾아오는 벗들은 그에게 커다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의연하려고 노력하였고, 학덕의 연마와 간혹 찾아오는 벗들과의 교류 속에서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논어의 첫 장은 바로 이러한 스승의 모습을 이 세 귀절로 압축해 표현한 것이 아닐까?

2,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유자가 말하기를 “그 사람됨이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적다. 웃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로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군자는 근본을 힘써야 하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겨난다. 효제(孝弟)는 인(仁)의 근본이다.”

  <해설> 유자(有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약(若)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의하면 공자보다 43살 연하라고 한다. 효(孝)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말하며(善事父母爲孝), 제(弟)는 형장(兄長)을 잘 받드는 것을 말한다(善事兄長爲弟). 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나라 사람인 황간(皇侃)이 쓴 『논어의소(論語義疏)』에 인용된 위(魏)의 왕필(王弼)의 해설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친애하는 것이 효(孝)요, 그 사랑을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 인(仁)이라고 한다.
  효와 제는 가정을 위시하여 혈연을 매개로 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가장 근본이 되는 덕목이다. 공자는 사회를 혈연공동체의 연장선 상에서 파악했으며, 따라서 효와 제는 공자에게 있어 사회를 유지하는데도 가장 근본이 되는 도덕적 덕목이다.
  가족 내에서의 효제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천하 만 백성에게까지 미칠 때,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으니, 효제야말로 인(仁)의 근본이다. 이렇듯 공자는 자기와 가까운 것에서부터 터득하여 멀리 남에게까지 미루어 가는 것(能近取譬)을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보았다(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옹야 28).
 
  <보충> 인(仁)이라는 글자는 논어 안에서 위정, 향당, 선진, 계씨편을 제외한 전편에 걸쳐 무려 105번이나 나올 만큼 가장 중요한 주제로, 공자 자신이 가장 중요시한 덕목(德目)이나, 그 정확한 의미는 공자 스스로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공자는 어느 때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하고(樊遲問仁 子曰 愛人―안연 22), 어느 때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도 하였으며(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안연 1),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己所不欲 勿施於人―안연 2, 위령공 23)이라고도 하는 등 묻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말하였다.
  인(仁)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논어 전반에 대한 이해 속에서 각자가 파악할 수밖에 없으나, 대체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널리 미루어 남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고(推自愛之心 以愛人之謂)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달리 말한다면 나만이 혼자 잘살려고 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과 서로 사랑하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체(共同體)적 윤리를 표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낳은 가장 위대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란 책에서 인(仁)을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하는 것(二人相與)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데, 대략 같은 의미라 하겠다.
  
3,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교묘히 입에 발린 소리만 내세우고, 얼굴에 아첨만 가득찬 사람치고 어진 자는 드물다”

  <해설> 교언(巧言)은 말을 좋게 하는 것이요, 영색(令色)은 얼굴빛을 좋게 하는 것이다.
  진실하지 못한 자는 남을 사랑할 수 없으며, 능히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어진 자가 드문 것이다. 
  공자는 오히려 강직하고, 의연하며, 질박하고, 어눌한 것이 인(仁)에 가깝다고 하고 있다(子曰 剛毅木訥近仁―자로 27). 인(仁)은 가식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함을 일컫는 말이다.

  <참고> 같은 귀절이 양화 17에 보이며, 공야장 24에도 비슷한 글귀가 있다.  

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하기를 “나는 하루 세번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함에 성의를 다하였는가? 벗과 사귐에 신의를 다하였는가?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는 않았는가?” 

  <해설> 증자(曾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삼(參)이고 자는 자여(子輿)이다. 『사기』「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6살 아래라고 하며, 『효경(孝經)』의 저자라고 전해진다. 충(忠)은 주자에 의하면, 온몸을 다 하는 것을 일컬는 말(盡己之謂忠)이니 성실함이요, 신(信)은 진실로 하는 것을 일컫는 말(以實之謂信)이니 신의(信義)다.
  문 밖에 나아가 행동할 때는 충(忠)과 신(信), 즉 성실과 신의를 다하며, 집에 들어 와서는 배운 것을 익혀 학덕을 증진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남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매일 이것을 반성하여 부족함이 없다면 과연 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傳不習乎를 위와 같이 해석한 것은 보통 고주(古注)라고 부르는 위(魏)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를 따른 것이다. 신주(新注)라고 불리우는 주자(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注)』(이하 신주로 약칭)에서는 “배운 것을 충분히 익히지 않은 일은 없는가?”라고 해석하고 있다. 다산의 『논어고금주』도 신주와 같은 입장이다.
 
5,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려면 매사를 신중히 하여 믿음을 얻어야 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백성을 부릴 때는 그 때를 살펴야 한다.”

  <해설> 도(道)는 치(治)로 다스리는 것이다. 황간의 『논어의소』에는 도(道)가 도(導)로 되어 있다. 천승(千乘)의 나라는 그 땅 안에서 말 4필이 모는 전차 1,000 대를 낼 수 있는 규모의 나라를 가리키며, 보통 주(周) 왕실에 의해 봉국(封國)을 받은 큰 제후의 나라를 뜻한다(천자는 萬乘, 대부는 百乘이라 부른다).
  인(人)은 일반적인 의미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중국의 조기빈은 『논어신탐』에서 인(人)을 노예 소유 계급, 민(民)을 노예 계급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인(人)이 사람 일반을 가리킨다고 하여도 그 인(人)의 범주(範疇)에 노예가 포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대 노예 사회에서 노예는 인격이 없는 물건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민(民)은 피치자 계급으로서의 백성이다. 당시 사회가 농업에 기초한 사회였기에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을 것이다. 이 백성이란 개념 속에 노예가 포함된 것인지 아니면 노예가 아닌 피복속(被服屬) 인민만 의미하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중국 고대 사회의 구조에 대한 보다 진전된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백성을 부릴 경우 그 때를 살펴야 한다는 것은 백성을 부역시킬 때 농번기를 피해 생업에 지장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랏일을 삼가고 공경하여 함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백성은 나랏일에 대해 신뢰를 갖는다. 백성과 나라 사이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비용을 절약하면 사람들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농사철을 피해 백성을 부리면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지 않는다.
  나라와 백성 사이의 신뢰, 백성의 경제적 안정, 이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이다.
       
  <참고> 안연 7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백성의 믿음(信)이고, 그 다음이 백성의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足食), 군대를 갖추는 것(足兵)은 맨마지막이라고 하고 있다.

6,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제자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공손하도록 하라. 삼가 행실을 조심하여, 남에게 믿음을 주도록 하라.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도록 하라. 그리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울 것이다.”

  <해설> 효제(孝弟), 충신(忠信) 중에서 충(忠)이 빠졌다. 대신 무리를 사랑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할 것이 추가되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仁)의 근저를 이룬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는 것은 자신의 덕을 높히기 위함이다. 문(文)은 고주(하안의 『논어집해』)에 인용된 후한(後漢) 시대 마융(馬融)의 설(說)에 의하면 옛사람이 남긴 글이다. 
  글보다는 덕행에 힘쓸 것을 강조한 글이다. 그러나 학문을 소홀히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공자는 바탕이 아무리 좋아도 배움이 없으면 거칠어진다고 하였다(質勝文則野―옹야 16).

7,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길 마치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라. 부모를 섬길 때는 온 힘을 다할 것이며, 임금을 섬길 때는 온몸을 다 바칠 것이다. 벗과 사귈 때에는 그 말을 지키도록 하라. 그렇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을 배운 자라고 할 것이다.”

  <해설> 자하(子夏)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4세 손아래라고 한다.
  賢賢易色은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기(賢賢)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는 것(易色)이다. 고주(古注)에 인용된 공안국(孔安國)의 해설을 따랐다. 치(致)는 위(委)로 다 맡기는 것이다. 
  이 장도 위와 마찬가지로 글보다 덕행이 우선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덕행이 있다고 해서 학문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논어 곳곳에서 공자는 배움의 중요함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황간의 『논어의소』에는 賢賢易色을 “어진 이를 어질게 여겨 얼굴빛을 바꾼다(바로한다).”라고 해석하는 일설(一說)이 소개되어 있다.
  청(淸)의 유봉록(劉逢祿)의 『논어술하(論語述何)』, 유보남(劉宝楠)의 『논어정의』는 賢賢易色을 아주 색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賢賢易色은 부부의 도를 말한 것이라고 한다. 즉 공자가 부모, 임금, 친구에 대한 도리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인륜(人倫)의 시초인 부부의 도리를 말한 것으로, 그 뜻은 “부인(婦人)을 얻을 때는 어진 덕(德)을 어질게 여기며(賢賢), 미색(美色)은 가볍게 여긴다(易色).”는 것이다. 
  <참고> 자한 17에 덕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는 표현이 있다. 

8,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그 몸가짐이 장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지고, 그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사귀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 것이다.”

  <해설> 주(主)는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효제(孝弟)를 바탕으로 하고, 행동은 충신(忠信)을 주로 한다. 효제에 대해서는 학이 2, 충신에 대해서는 학이 4를 참고하기 바란다.
  벗이란 글로 만나 나의 인(仁)을 도와주는 자이다(以文會友 以友輔仁―안연 24). 따라서 자기만 못한 자는 나의 인(仁)을 도와주지 못하는 자이니 멀리해야 한다.
  허물을 고치면, 같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으니(不貳過), 학덕이 날로 높아지게 된다. 

  <참고>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는 자한 24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9, 曾子曰 愼終 追遠 民德歸厚矣.
  증자가 말하기를 “부모의 장례를 정성껏 모시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해설> 신종(愼終)은 청(淸)의 유보남의 『논어정의』에 의하면, 부모의 장례에 예를 극진히 함을 일컬으며, 추원(追遠)은 부조(父祖)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도 잊지 않고 추모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부모의 장례를 극진히 한다 함은 부모가 살아 계실 적에 효도를 다하는 것은 물론 돌아가신 후에도 잊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부조가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도 제사를 잊지 않는 것은 자칫 잊기 쉬운 먼 것조차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멀고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을 잊지 않고 정성껏 할 때, 그 덕이 멀리 백성에게까지 미쳐 자연히 백성의 인정이 두텁게 된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부조(父祖)의 장례와 제사를 정성껏 지내면, 씨족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이 서로 한 핏줄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공동체 내의 일체감이 고양되면서 백성들 사이의 인정도 자연히 후덕하게 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보충> 공자가 살던 주(周)나라는 주왕실을 정점으로 하여 주로부터 분봉(分封)받은 각 제후국이 각각 지역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각 제후국은 제(齊)나 송(宋)과 같이 주왕실과 성이 다른 제후국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주왕실과 혈연 관계에 있는 동성(同姓)인 희(姬)성의 제후국이었다. 주왕실과 제후와의 관계는 주왕실을 종가(宗家)로 하는 종법질서(宗法秩序)에 의해 결합되었다. 각 제후국의 기저에는 공통의 조상신을 모시는 씨족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듯 주의 통치 제도는 혈연적 관계를 매개로 성립하였다. 따라서 부모의 장례와, 조상에 대한 제례 의식은 단순한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 기저의 씨족공동체 뿐만 아니라 주왕실과 각 제후국을 유지, 결합시겨 주는  중요한 정치적 행사였다.  

10,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子貢曰 夫子 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금이 자공에게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어느 나라에 가시든지 반드시 그 나라 정사에 대해 듣고 계시니 이는 선생님이 스스로 구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요청을 받으신 것입니까?”
  자공이 대답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온화하시고, 선량하시며, 공손하시고, 검소하시며, 겸양한 것으로 얻으셨으니, 선생님께서 구하신 것은 다른 사람이 구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해설> 자금(子禽)은 성은 진(陳) 이름은 항(亢)이며 공자의 제자이다. 그러나 자공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자공은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로 공자의 제자다. 공자보다 31살 손아래라고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변설에 뛰어났다고 한다(言語 宰我子貢―선진 2).
  시방(是邦)의 시(是)는 어느 특정한 것을 지시(指示)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의 어느 것(영어로는 any)을 지시하는 말이다. 방(邦)은 제후의 나라를 가리킨다.
  求之는 공자가 구한 것, 與之는 남이 준 것, 즉 공자가 요청을 받은 것이다. 온(溫)은 온화함, 양(良)은 선량함, 공(恭)은 공경함, 검(儉)은 검소함, 양(讓)은 겸손함이다.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은 모두 자신을 낮춘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낮추었을 뿐이나, 그 높은 덕은 가리워지지 않고 오히려 누구나 숭상하는 바가 되었다. 공자가 이르는 곳마다 군주들은 공자의 높은 덕을 숭상하여 정사에 대해 문의해 왔다. 따라서 공자가 구한 것은, 그 높은 덕을 보고 제발로 찾아오게끔 한 것이니, 남들이 구한 것과 다른 것이다.
  다산은 溫良恭儉讓以得之로 읽지 않고, 溫良恭儉 讓以得之로 띄어 읽는다. 즉 “선생님께서는 온화하시고, 선량하시며, 공손하시고, 검소하셔서, 스스로 사양했는데도 불구하고 얻게 되신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보충> BC 7~6세기경부터 철기 문명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주나라는 격변기에 접어든다. 사회의 기저를 이루고 있던 씨족공동체 내부에서는 계층 분화가 격렬히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는 해체되어 갔으며, 사회적 경쟁에서 낙오된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의 동천(東遷, BC 770년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주나라 왕이 살해되고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한 사건) 이래 주 왕실의 권위가 상실되면서 각 제후국 간의 약육강식도 본격화하였다. 이렇게 공자가 살던 시대는 구사회가 해체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혼란이 점점 극심해지던 시대였다. 이 혼란 속에 신음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혼란을 종식하고 보다 안정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공자는 이 중국 역사상 미증유의 대 혼란기 속에서 도탄에 빠진 백성의 안녕을 위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당연한 책무였다.
  그의 정치 사상의 특징은 그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강조한 점에 있다. 그는 정치의 요체를 가까이 있는 자기의 백성을 기쁘게 하여, 먼 데 있는 남의 백성까지 찾아오게끔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近者說 遠者來―자로 16),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 무리를 구제할 수 있으면 요순마저 능가하는 성인이라고 극찬했다(옹야 28). 논어의 곳곳에서 보이는 정치에 관한 문답에는 백성에게 세금을 가혹히 매기지 말 것이며, 백성이 부유한 연후에 나라가 부유해진다는 말도 있다(안연 9). 또한 제자인 염유(冉有)가 자신이 섬기고 있던 계손씨(季孫氏)를 위해 백성으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걷자 그로서는 파격적인 어투로 그를 파문하기조차 하였다(선진 16).
  공자의 백성을 위한 정치(공자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 할 인민의, 인민에 의한 정치는 부정하였다. 그는 플라톤의 철인 정치와 유사한 사심이 없고 훌륭한 학덕을 갖춘 군자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였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훌륭한 정치가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군주 개인을 위해 추진된 것이었지, 공자처럼 백성을 위한 정치를 전면에 걸고 백성의 행복을 정치의 목적으로까지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이후 공자의 민본주의는 유가의 정치 사상의 근본이 되었으며, 맹자와 같은 사람은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맹자』 「진심하(盡心下)」 14).”고 하면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할 때는 갈아 치워야 한다는 역성혁명을 주장하는데까지 이르렀다.
 
11,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에는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행적을 살펴 본다. 삼 년 동안 아버지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  그 뜻(其志), 그 행적(其行)은 아비의 뜻, 아비의 행적이다. 아비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아비의 뜻을 살펴 받들고, 아비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 행적을 살펴 받든다. 아비가 죽은 후 삼 년 동안 아비가 하던 바를 바꾸지 말아야 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淸)의 전대흔(錢大昕)이 『잠연당문집(潛硏堂文集)』에서 밝힌 설(說)에 의거했다.
  한(漢)의 공안국(孔安國) 이래 주자를 위시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뜻(其志), 그 행적(其行)을 아비가 아니라, 자식의 뜻, 자식의 행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아비가 살아 있을 때에는 자식이 그 아비로 인하여 행동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뜻하는 바를 보면 사람됨을 알 수 있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그 행실이 나타나므로 그것을 보면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또 삼 년을 아비의 길을 고치지 않을 때 효자라고 할 수 있다고. 문법적으로 틀리지는 않겠으나, 앞에서는 사람을 논하고 뒤에서는 효를 논하는 등 문장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삼 년이란 부모의 상을 모시는 기간이다. 만일 아비의 길이 옳지 않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삼 년 동안 아비의 길을 고치지 말아야 하는가? 고금의 모든 주석이 아비의 길이 옳지 않을 경우에는 마땅히 고쳐야 한다는 점에 일치하고 있다.

  <참고> 이인 20에도 비슷한 내용의 말이 있다. 자장 18에서는 맹장자가 부친의 가신을 바꾸지 않고 그 정치를 그대로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라고 증자가 칭찬하고 있다.
  삼년상에 대해서는 양화 21을 참조하기 바란다.
    
12,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유자가 말하길 “예를 쓸 때는 조화를 귀중히 여기니, 선왕의 도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크고 작은 것이 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하지 못할 것이 있다. 조화만 알고 조화에 치중하여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또한 행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해설> 예는 단순한 대인 관계에 있어서의 행위 규범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는 ceremonial(儀禮), ritual(祭儀) 등 종교나 제사에 관계되는 의식을 포함하여 훨씬 더 광범위한 사회의 문물 제도 전반을 의미한다. 예는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며(조상에 대한 제사), 또한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급, 계층 간의 사회적 분업 관계 그리고 위계 질서를 규정하고(왕, 공, 경, 대부, 사의 예의 차별화), 대인 관계에서의 원만함을 성취시켜 준다(에티켓). 전통 중국 사회에서 예는 이렇듯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되었으며 단순한 윤리, 도덕, 문화의 문제를 넘어서는 고도의 정치적인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 숙종, 경종년 간에 예송(禮訟) 문제로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발발한 것도 예의 문제가 갖고 있는 포괄성, 정치성을 확인시켜 주는 한 사례이다. 주자는 예를 천리(天理)를 꾸며 나타낸 것(天理之節文)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예를 쓸 때 조화를 중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예로써 구별되는 것들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이 예를 쓸 때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가 너무 엄격하면 형식에만 치우쳐 오히려 각박해진다. 따라서 서로간의 화합이 요구된다. 그러나 너무 조화만 강조할 경우 서로 간의 구별이 없어지고 질서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예로서 절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유자(有子)는 화(和)와 예(禮)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왕이라 함은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등 고대의 성왕(聖王)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자는 禮之用 和爲貴의 용(用)을 체용(體用)의 용(用)으로 해석하여, 예(禮)의 체(體)가 비록 엄격하나 모두 자연의 이치에서 나오므로, 그 용(用)은 반드시 종용(從容)하여 핍박하지 않는다. 따라서  귀하다고 하는 것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즉 예(禮)의 체(體)와 용(用)을 구분하여 화(和)는 예(禮)의 용(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체용(體用)론은 성리학(性理學) 특유의 주장일 뿐이며, 공자와는 무관하다.

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가 말하길 “약속이 의에 가까우면 그 말이 지켜질 것이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친한 이를 잃지 않으면 가히 존경할 만하다.”

  <해설> 신(信)은 말의 신의, 즉 약속이고, 복(復)은 약속이 이행되는 것이다. 친(親)은 친한 사람, 종(宗)은 존경을 받는 것이다.
  약속이라고 다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義)에 어긋난 약속은 지키면 안된다. 작은 신의(信義)만 생각하고 배움을 소홀히 할 경우 남을 해치는 도적이 될 수 있다(好信不好學 其蔽也賊―양화 8). 도적이나 깡패의 의리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약속이 의에 가까울 때만이 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공손함은 미덕이나 지나치면 안된다. 공손함이 지나치면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아 수고롭기만 할 뿐이다(恭而無禮則勞―태백 2). 예(禮)에 어긋나지 않아야만 욕을 면할 수 있다.
  신(信)과 공(恭)을 의(義)와 예(禮)에 맞게 실천하려다 보면 자연 엄격해지기 쉽다. 인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과 공을 의와 예에 맞게 실천하면서도 인정을 잃지 않아 그 친한 사람들을 잃지 않는다면, 가히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하다. 주자의 해석을 따라 풀이했다.
  고주(古注)에서는 “신(信)은 의(義) 그 자체는 아니지만, 말을 또 할 수 있기(反覆) 때문에(말을 지키기 때문에), 의(義)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고, 공(恭)은 예(禮) 그 자체는 아니지만, 욕(辱)을 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예(禮)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주자의 해석만 못하다고 생각된다. 

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먹는 데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며, 거처하는 데 편안함을 찾지 아니한다. 일을 행하는 데는 민첩하지만 말은 삼가며, 도를 지닌 선생을 찾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면, 가히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 포(飽)는 배부른 것이요, 거(居)는 평소 거처하는 것이다. 就有道는 도를 지닌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이고, 정(正)은 자신을 바로하는 것이다.
  군자가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편안함을 찾지 않는 것은 학문에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연연해 하지 않는 것이다. 군자는 항상 말을 아끼며, 말보다 행동을 앞세운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이인 24). 그리고 항상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을 찾아 그로부터 올바른 길을 전수받고 자신을 바로한다.

  <참고> 위정 13, 이인 22, 24, 헌문 29에서도 군자의 말과 행동에 관해 말하고 있다.

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與.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이 말하길 “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여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좋으나 가난하여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자공이 말하길 “시(詩)에 이르길 ‘깎고 다듬은 듯 쪼고 간 듯이 한다.’라고 하였는 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는 이제야 비로소 함께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지난 일을 말하니 앞일을 아는구나”

  <해설> 貧而無諂 富而無驕는 가난하든 부유하든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빈부(貧富)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貧而樂 富而好禮는 빈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경지다. 옹야 9에서 안연이 가난 속에서도 학문하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선진 18에 보면 자공이 경제에 대한 예측 능력이 뛰어나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이 있다(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자공은 자신이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다는 데서 만족하려 했다. 그리하여 공자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공자의 대답이 그것도 괜찮으나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느니만 못하다고 하면서 더욱 수양에 힘쓰라고 하였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走馬加鞭)고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부단히 갈고 닦을 것을 가르친 말이다.
  시(詩)는 『시경(詩經)』이다. 자공이 인용한 귀절은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의 첫 장에 있다. 기욱은 주가 동천(東遷)할 때 공을 세운 위나라 무공(武公)을 찬미한 시로 그 첫 장은 다음과 같다.

    기수의 물굽이 바라보니 푸르른 대나무 우거졌도다.
    우리 님은 구슬을 깎아 다듬은 듯 쪼고 간 듯이 위엄있고 너그럽도다
    빛나고 의젓하며 아름다운 우리 님을 끝내 잊지 못하겠네
    瞻彼淇奧 綠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瑟兮僩兮 赫兮咺兮 有匪君子 終不可諼兮

  다산에 의하면 절(切)과 탁(琢)은 대강의 모양을 만드는 과정이고, 차(磋)와 마(磨)는 윤이 나게 정밀하게 다듬는 과정이다. 자공은 공자의 말에 시를 인용하면서 대답한다. 『시경』의 “끊고 다듬은 듯 쪼고 간듯이”라는 귀절이 본래 아름다운 재료라도 더욱 갈고 닦아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자공이 자신의 말을 깊이 이해했을 뿐 아니라, 『시경』의 구절을 들어 비유(譬喩)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을 본 공자는 자공이 비로소 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칭찬한다.
  절차탁마(切磋啄磨)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보충> 공자는 시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는 아들인 백어(伯魚)에게 시를 공부하라고 하면서 시를 모르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不學詩 無以言―계씨 13), 시를 배우면 감흥을 나타낼 수 있고, 사물을 제대로 살필 수 있으며, 무리와 어울릴 수 있고, 불의를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으며,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양화 9).
  공자가 시에서 중요시한 것 중 하나는 대화에서의 수사적인 표현이다.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을 영자(佞者)라고 하여 싫어하였다. 그리고 장황히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군자는 행동에 민첩하고 말은 부족한 듯 해야 한다고 하였다(君子 欲訥於言而敏於行―이인 24). 그러한 그로서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직접적인 장황한 표현보다는 비유적인 간결한 표현이 더 유용하고 적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유적인 표현은 직설적인 표현이 가져올 격심한 감정의 노출을 자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실제로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말들은 대부분 직접적이기보다는 비유적이고, 장황하기보다는 압축적이다. 그는 시가 그러한 비유적인 표현을 익히는 데 최상의 교재라고 생각하여 제자들에게 학습을 장려하였으며, 현재까지 전해진 『시경』도 그가 편찬한 것이라고 말해진다. 신약에 나타난 예수의 언행이 짤막하면서도 주옥 같은 비유로 가득찬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공자는 시를 해석할 때 너무 인위적으로 의미를 과장한 바도 없지 않다. 절차탁마라는 말만 해도 단순히 사람을 형용한 데 불과한 것인데 공자가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또 팔일 8에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쓰인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란 말을 갖고 예(禮)가 나중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이렇듯 시의 내용을 지은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한다. 아무튼 이러한 공자의 영향을 받아 전통 중국에서는 시를 포함한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현대 중국에서 오함(吳晗)의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희곡을 둘러싼 논쟁이 문화대혁명의 서곡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참고> 헌문 11에는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라는 말이 있다. 

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해설> 군자는 자기의 허물을 근심할 뿐이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의 허물이다. 그러므로 근심한다.

  <참고> 이인 14, 헌문 32, 위령공 18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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