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남아 있는 인천의 흔적들 - 주안공단 어딘가 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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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남아 있는 인천의 흔적들 - 주안공단 어딘가 쯤에서-
  • 윤현위
  • 승인 2016.10.19 09: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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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윤현위/자유기고가·지리학박사

필자는 개인적으로 2016년 인문도시지원사업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민들과의 답사를 10월 한달 동안 주말에 진행하고 있다. 이번 답사는 주로 남구 일대를 4개의 코스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는데, 기존에 가보았던 지역들 이외에 이번 답사를 준비하면서 지역에 관한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처음 가보는 지역들도 여러 곳 된다. 이번 칼럼은 지난 10월 15일 주안역 뒤편 일대를 답사하면서 느낀 점들을 몇 자 적고자 한다.

주안역뒤편은 주안역북광장을 지나면 많은 공장들을 만날 수 있다. 도로표지만에는 주안5·6공단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경인공업지역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을 것이다. 참고로 지금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수도권공업지역으로 배운다. 경인공업지역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산업화과정에서 남부해안지역을 아우르는 남동임해공업지역과 더불어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지역이다. 산업화정책에서 산업단지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체였고 그래서 만들어진 산업단지가 한국수출산업단지이다. 우리가 구로공단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한국수출산업단지의 1~3공단이고 부평의 GM주변이 4공단, 주안이 5·6공단에 해당된다.
다른 국가산업단지들은 공간적으로 외부와 구분되게 구획되어 있으나 구로, 부평, 주안공단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마치 시가지에 공단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공단의 초기모델이기 때문인 듯하다. 부지를 조성할 당시에는 주변에 다른 시설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공간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고 후에 주변지역이 시가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주안공단은 부평과 함께 인천의 제조업성장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약 1,200개의 업체에 24,000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주안공단이 형성된 것은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969년부터 조성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이전에 주안공단은 원래 주안염전이라고 불리던 염전이었다. 주안염전은 1907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일제염이 시작된 지역이다. 염전은 1960년대 후반까지 운영되다가 수익성이 악화되자 폐염전을 매립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른 것이다. 매립된 지역이기 때문에 과거의 모습을 찾기는 다소 어렵다.

인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책을 보다 보면 주안염전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천일제염을 시행하기 전에 솥에 바닷물을 끓이는 방식의 자염법을 사용했는데 문제는 대량생산이 용이하지 않다는데 있었다. 따라서 다량의 소금을 중국에서 수입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에서 천일제염을 조성하여 전매제를 실시한다면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이를 현실화하시 위해서 주안에 염전을 만든 것이다.

더군다나 소금은 식용뿐만 아니라 화약을 제조하는 원료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군수물자이기도 했다. 소금의 운송에 경인선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역시 염전개발에서 크게 고려됐을 것이다. 1963년에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작한 1:250,000 축척의 지형도를 보면 당시 주안염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그림1 참조).

 

<그림 > 1963년 지형도상의 인천


여러 책자들을 보면 ‘당시 이곳이 염전이었다는 유일한 흔적인 표지석이 있다’라고 나와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역연구가를 표방하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 자료를 참조하여 표지석을 찾아보기로 했다. 주안염전은 처음부터 대규모로 조성된 것은 아니고 시험염전을 만들어 일종의 테스트를 거쳐서 확산된 것이다. 주안염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토지금고일대, 남동, 소래염전이 개발된 것이다.

현재 시험염전이었던 지역은 간석홈플라스 위에 한성자원 자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부평구 십정1동이다. 과거에는 서울제강이 있었던 자리이나 지금은 폐기물과 폐자원을 처리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성자원 근처까지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주안염전 표지석을 찾는 일은 어려웠다. 길가에 놓여져 있으나 거의 방치된채 서 있어서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이게 무슨 비석인지 알 수 없다. 실제로 비석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분들도 비석같은게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게 무슨 비석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림2 > 방치되어 있는 주안염전 표지석
 


<그림3> 표지석의 내용


<그림2·3>과 같이 표지석은 길거리에 방치되어 있다. 이 지역의 역사적 흔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저러고 있다. 이 표지석은 100년전에 만든 것은 아닐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염전이 주안염전임을 알려주기에 무척이나 소중하다. 모든 지역에는 지역마다의 스토리가 있다.

방치해 버려두지 말고 잘 보이게 해두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 쉽게 주변을 손질해줬으면 좋겠다. 인천은 천일제염이 시작된 지역이기도 하고 전국적으로도 소금생산량이 매우 많았던 지역이었다. 천일제염 이전에도 인천에서는 소금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주안공단은 구조고도화작업을 시행하고 있다. 공단 어딘가 쯤에다가 소금박물관이나 소금역사관 같은 지역의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만 할까? 예전에도 이 지면을 통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지역에 소금박물관과 공업박물관을 동시에 만든다면 한 공간에서 지역변화의 과정을 담은 최초의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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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규 2016-10-21 19:52:1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천일염전표지석 2년 전에 찾는라 저도 엄청 고생했습니다. 실상, 인천 특히 부평지역에서는 일본 강점기 이후의 비지정문화재 말고는 족히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후대들을 위하여 이런 흔적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리라 봅니다. 안내판 하나 없는 현장을 볼 적마다 너무 가슴 아픔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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