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무역상, 이화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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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무역상, 이화양행
  • 편집부
  • 승인 2016.11.2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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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인천 최고](33) 이화양행
인천시는 ‘인천 가치 재창조’의 일환으로 인천의 역사를 되짚어 보기 위해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 서른세번째 순서로 한국 최초의 서양 무역상 이화양행에 대해 싣는다.



<영국계 광창양행 광고=인천시 제공>                 <미국계 홈링거양행 건물=인천시 제공>


인천 개항 후, 한국에 제일 먼저 진출한 서양의 상사는 1883년 영국계 이화양행이었다. 1882년 말 중국 해관에 관계하던 묄렌도르프가 청의 추천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협판으로 부임했는데, 그는 조선에 진출하려는 외국계 상사와 많은 접촉이 있었다.

1883년 1월 묄렌도르프가 광산개발 및 철도를 담보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의 전권대사로 상해에 파견되었을 때, 특히, 이화양행은 상해·제물포간의 정기항로 개척권 및 광산권 이양을 타결시켰다.
 
이화양행은 조선과의 협약에 따라 우피(牛皮)무역에 종사하면서 청국 초상국 소속 660톤급의 기선 남승호를 투입해 나가사키와 부산을 경유, 인천과 상해를 연결하는 한국 최초의 정기 항로를 개설하고, 광산채굴권을 획득했다.

당시 인천항 중국인 거류지 앞 바다에 폐선을 띄워놓고 사무실 겸 창고와 일꾼들의 거주지로 사용했다. 부업으로 보험회사의 대리점 역할도 겸하였는데 이것 또한 한국 최초 보험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화양행이 조선에서 보인 이권의 관심은 광산이었다. 특히, 상해 대리인 거빈스는 묄렌도르프와 친분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1883년 7월 이화양행은 묄렌도르프와 계약을 맺어 이익의 10분의 3을 과세한다는 조건으로, 열강 중에서 최초로 한국에 근대식 채굴기계와 광산기술자를 파견하여 경기도 영평 만세교 사금장에서의 채굴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강원도 금화, 금성지역에까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내한 목적은 교역보다는 처음부터 광산채굴에 있었던 것이다.
 
이화(怡和)는 ‘행복한 조화’라는 뜻이었지만 한국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시종일관 경제적 이권만을 얻는 데 관심을 보였다. 1884년 정기선 운항은 1년간의 계약이 만료되자 누적된 운항 결손으로 중단하였고, 11월에 이르러서는 영업부진으로 인해 결국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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