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원으로 수장된 섬 지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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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원으로 수장된 섬 지식인들
  • 이세기
  • 승인 2016.12.08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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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이야기](21-마지막편) 이세기/시인


<한국전쟁 때 섬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된 먹염바다>


귀가 번쩍 열렸다. 덕적도에서 평생을 산 여든이 넘은 촌옹(村翁)의 입에서 자신이 중등 시절에 읽었다는 소설이 줄줄이 나왔다.

“이태준의 「밤길」이나 이기형의 「고향」 같은 카프(KAPF) 계열의 작품을 읽었어요.”

해방 전에 읽었다던 이태준의 「밤길」은 “주안 공동묘지가 나오고 아기가 죽어서 비 오는데 묻으러 가는 테마”라며 그 대강의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인천으로 날품팔이를 온 “황서방”은 연일 비가 내린 통에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때마침 아내의 가출로 서울에서 아버지를 찾아온 자식 중 젖먹이 아들이 죽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주안 공동묘지에 아이를 묻으러 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주안 공동묘지가 어디인가. 오늘날 주안 3,7,8동 일원이니, 숨이 꺼진 피붙이를 안고 월미도에서 주안까지 족히 한 시간은 걸어왔을 터이다.

해방 전후에 읽었다던 소설은 덕적군도 출신 유학생들이 섬으로 가져온 책들이었다. 뜻밖의 이야기도 나왔다.
“유학생 출신 섬 지식인들이 보도연맹 사건 당시 좌익으로 몰려서 고초를 당하거나 월북해 버렸지.”
그 중에는 덕적도 출신 소설가 송종호(宋宗鎬 1918~ ?)도 있었다. 그의 간략한 연보를 보자. 덕적도 진리에서 중선배를 부리던 선주 집안에서 태어나 인천제일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배재고, 일본 호세이대(法政大學) 문학부를 다녔다. 극작가 진우촌(秦雨村) 등과 함께 인천에 거주하는 배재학당 학생들의 모임인 인배회(仁培會) 회원으로 활동했다. 길영희(吉瑛羲) 교장 시절 인천중학교에서 시인 배인철(裵仁哲), 조병화(趙炳華) 시인 등과 근무하면서 작문 등을 가르쳤다. 인천 중앙동에서 향일(向一)의원을 운영했고, 은퇴 후 장봉도에서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 송두용(宋斗用) 선생이 운영하는 푸른학원에서 무료 진료소를 운영했던 강화도 출신 의사인 김애은(金愛恩) 씨가 그의 부인이다.

해방 직후 엄흥섭(嚴興燮)과 함께 인천문학동맹 창립에 기여하고, 〈대중일보〉와 〈인천신문〉 등에 관여하기도 했다. 교사로 기자와 문인으로 해방 직후 활발하게 활동하던 송종호는 『신천지(新天地)』(1949.5)에 「그물 소동(騷動)」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월북해 종적을 감췄다. 「그물 소동」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은 폭풍우가 섬을 핥고 지나간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억보”는 빚을 내 그물을 마련하여 봄 파시에 별재미를 못 본 연평도 조기잡이를 마치고, 민어잡이를 나가고자 했지만, 폭풍우로 한 틀밖에 없었던 그물이 망가졌다. 폭풍우로 그물이 쓸려나갔지만 새 그물을 구할 수 없어 찢어진 그물을 수리하여 출어를 준비한다. 한편 해방 전 면과 주재소를 손아귀에 넣고 권력을 쥔 대선주 “장근석”은 해방이 되자 다시 군정(軍政)의 면고문에 군고문까지 되고 “인천”으로 피신을 갔다가 다시 섬으로 돌아온다. 억보는 장근석에게 그물을 사기 위해 빚을 진 처지였다. 폭풍우로 장근석의 배 그물이 파손되자 빚을 핑계로 억보의 그물에 욕심을 낸다. 억보에게 그물은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내목을 처가문 처갔지 그물은 뭇가저가우”하며 발끈한다.

장근석과 억보는 그물을 둘러싸고 살기 어린 대척을 한다. “으떤놈이 내그물을 빼서가?” 하며 억보는 발악하듯 내뱉는다. 장근석이가 무리를 끌고 그물을 빼앗으러 오자 억보는 “뻘겋게 달은 무쇠빛 얼골속에서 두눈알맹이는 살기를 품고 린(燐)과같이 번뜩이고있고 굳게 앙다물려진입술은 씰룩 거린다. 그리고 꽉 웅겨쥐어진 두주먹은 부들부들댄다.” 대결을 목전에 둔 억보의 분노가 압권이다. 장근석에 대한 반감과 원심이 쌓인 터라 결국에는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그로 인해 억보는 지서로 끌려간다. 장근석이가 기어이 그물을 빼앗아 간다는 “뱃동사”의 말에 “그물을 뺏기문 우린 죽는 목숨이여어”하며 몽둥이를 들고 “갱변”을 향해 장근석을 응징하기 위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그물을 빼앗기게 되자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물소동」이 실린 『신천지』>


「그물 소동」의 배경은 덕적도이다. 이 소설은 해방 직후 덕적도에서 벌어진 뱃사람들의 이야기로 생생하다. 이야기의 모티프로 보아 실화에 근거해 써졌다. 덕적도 북리는 당시 문갑도와 함께 중선배의 어항이 있던 곳이다. 연평도 조기잡이와 덕적군도 인근 어장에서 잡히는 민어와 새우로 풍어를 구가했던 시절이었다. 소설의 계절적 배경이 팔월이니, 이 때는 민어잡이 철로 덕적도 인근은 우리나라 최고의 민어 산란장이었다. 덕적도와 장봉도 사이 만도리어장, 초지도어장, 덕적도 용담과 각흘도 사이, 장구도, 백아도, 울도 뱅이어장 등에서 산란한다.

덕적도는 악천후로 흉사가 심했다. 1931년 8월에 선미도 인근 바다에서 일어난 풍랑으로 유명을 달리한 어부들이 많았다. 태풍으로 조난어부가 많고 파선된 배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덕적도 북리에는 당시 태풍으로 불귀의 몸이 된 어부들을 위하여 ‘조난자 위령지비(遭難者慰靈之碑)’가 세워져 있다.

「그물 소동」에는 덕적도의 말이 자연스럽게 구사되었다. ‘참때(滿朝)’, ‘트쟁기(漁船具)’, ‘배매우이(甲板)’, ‘동사(漁撈夫)’, ‘뉫템이(怒濤)’, ‘한사리’, ‘중사리’, ‘중선배’, ‘배질(出漁)’, ‘갱변’, ‘갈가마’ ‘뱃묘시’, ‘배임자’, ‘하장애(炊夫)’ 등 섬에서 쓴 일상어가 생생하다. 그 뜻을 살펴보면 참때는 ‘참’으로 만조시를 이르고, 트쟁기는 배 닻 등을 일컫고, 동사는 뱃사람, 뉘템이는 큰 파도가 멍석말이하듯 밀려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사리, 중사리는 물때를, 갱변은 모래밭 바닷가, 갈가마는 그물에 갈물을 들여 끓였던 터, 뱃묘시는 중선배의 이물인 배의 앞부분, 배임자는 배의 선주, 하장애는 배에서 밥 짓는 일을 맡은 선원인 화장(火匠)을 뜻한다.

이 소설은 계급 갈등을 다룬 진보적인 리얼리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섬에서 행세 꽤나 하며 해방 전에는 “유카타”를 즐겨 입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 기생하는 대선주인 장근석과 그에게 빚을 얻은 억보의 투쟁을 뱃사람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그물을 매개로 서사화했다. 장근석에게 그물을 빼앗긴 억보가 몽둥이를 들고 “갱변”으로 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화해할 수 없는 적대를 발견한다. 해방 직후 민족문학운동의 목적으로 일제의 잔재와 군정을 청산하고 민족해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월북으로 잊힌 덕적도 출신 송종호의 행적은 안타깝다. 〈대중일보〉에 「새아침-해방 후 첫해를 맞이하며」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한 그는, 해방 전후 왕성한 활동이 묻힌 채 잊힌 것은 분단체제의 아픈 상흔일 터. 자신이 태어난 덕적도를 배경으로 당대의 아픔을 그린 것은 섬사람에 대한 애정이 바탕 되지 않았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시 덕적군도는 황금어장으로 대선주와 뱃사람들 간의 갈등은 첨예했다.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악행인 3.7제로 뱃사람들은 등골을 빼는 노예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배임자인 억보도 뱃동사에게는 착취자인 셈이다. 대선주와 소선주와의 갈등은 이 소설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절대 권력자에 대한 억보의 저항은 곧 가진자, 권력자에 대한 응징이다. 송종호는 해방 직후 섬마을에서 펼쳐졌던 갈등의 전형을 핍진하게 포착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덕적군도의 섬역사를 접할 때마다 드는 의문 중의 하나가 해방 전 그 많던 섬 지식인들이 모두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적이 궁금했었다. 해방-분단-전쟁으로 이어진 격동 속에서 섬 지식인들이 사라진 연유는 한국전쟁 당시 덕적군도, 영흥도, 자월도 등지의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관련이 깊다. 섬 지식인들이 보도연맹원으로 좌익으로 몰려서 먹염바다에 수장되거나 월북해 종적을 감추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먹염바다에 수장된 덕적도 영흥도 등지의 보도연맹원이 100~150명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섬이야말로 고립되어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라 잡히면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으니, 죽음이 아니면 월북할 도리밖에 없었다.
1910년대 덕적도를 비롯한 덕적군도의 유학생은 200여 명이 넘었다. 대개는 서울과 일본 유학생이었다. 게이오대, 니혼대, 도시샤대, 메이지대, 와세다대 등으로 유학을 갔다.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타고 갔다. 이들은 대개 선주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덕적도, 소야도, 문갑도, 백아도 등지의 선주들은 이 일대에서 형성된 황금어장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했고, 이는 섬에서 많은 지식인이 배출되는 발판이 되었다.

여기에 뱅이어장 일대의 황금어장의 형성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했다. 선주들은 지천으로 잡히던 새우를 건작하여 인천의 청관 중개상에게 넘겨 큰 소득을 얻어 자녀들을 유학까지 보냈다. 섬의 교육열은 뭍과 다르게 더 열성적이었다. 마땅하게 경제적 이득을 취할 직업이 없으므로 교육을 통하여 입신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덕적군도 인근에서는 덕적도, 문갑도에 가서 ‘아는 체하지 마라’했다. 그만큼 섬 지식인이 많았다.

오늘날 덕적군도의 섬은 황폐화의 일로에 서 있다. 폐교가 속출하고 아이들의 인적이 드물다. 1968년 연평도 어장 등의 폐장으로 덕적군도 일대의 어선주와 관련 종사자들이 70년대 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유신 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다. 납북어민들은 연좌제로 일자리를 잃고 섬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제주도에 4.3 사건이 있다면 덕적군도에는 먹염 수장 사건이 있다.

인천 앞바다의 섬만큼 분단체제로 상처를 입은 섬도 많지 않다. 교동도, 강화도를 위시하여 영종도, 자월도와 덕적군도 일대의 섬들이 해방 정국에는 좌우익 대립으로, 한국전쟁 때에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상처를 입었다. 해방 후 분단체제에서 강화도의 조봉암(曺奉巖)이나 영흥도의 이승엽(李承燁)이 대표적인 좌익으로 낙인 찍혀 지금도 해제되지 않고 있다. 분단체제의 악령이 아직도 섬의 원혼을 봉금(封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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