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悲意)로 가득 찬 노오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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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悲意)로 가득 찬 노오란 거리
  • 양진채
  • 승인 2016.12.1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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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인천차이나타운, 혼례행렬>
 


 <중국인 거리>는 6.25 피난살이 시절, 인천의 중국인 거리에서 살게 된 어린아이와 그 주변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실제로 오정희 소설가는 초등학교 시절을 소설의 무대가 된 현재 근대문학관 뒤쪽 편에 살았다. 이 소설 속에는 차이나타운, 부두, 대한제분 공장, 성당, 자유공원, 공설운동장, 석탄을 나르는 철길 등이 작가 특유의 아름답고 서늘한 문체로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의 전체 정조는 아릿하고 슬픈, 불안한 눈빛 같은 것인데 이는 전쟁 직후의 우리 생활상과 맞닿아 있다.
 

석탄차가 오면 몰래 숨어들어 석탄을 훔쳐 국수와 만두를 사먹는 아이들, 양공주인 매기, 난 커서 양갈보가 될 거야 하고 단호하게 말하는 치옥, 다섯 살이 되도록 말도 못하고 인형처럼 눈을 깜박이는 제니, 조카에게 얹혀사는 할머니, 늘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엄마, 자신의 엄마가 계모이길 바라고, 정육점에서는 ‘애라고 조금 주세요?’ 하고 따지며, 이발소에서는 ‘아저씨는 나올 때 손모가지에 가위 들고 나와서 이발쟁이가 됐단 말예요?’ 대드는 되바라진 아이지만, 건너편 이층집에 사는 얼굴이 하얀 중국인 남자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도 하는 어린 내가 있다.


소설은 해인초를 끓이는 냄새로 메스꺼움을 느끼는 주인공처럼 내내 울렁이고 불안하다. 이 불안은 ‘공간’의 불안과 맞닿아 있다. 작가가 묘사한 전쟁 직후의 폐허와도 같은 이 도시의 면모를 살펴보자.

 

해안촌(海岸村)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려지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다.

 

이 거리의 적산 가옥들 중 양갈보에게 방을 세주지 않은 곳은 우리집 뿐이었다. 그네들은 거리로 면한 문을 활짝 열어놓고 거리낌 없이 미군에게 허리를 안겼으며, 볕 잘 드는 베란다에 레이스가 달린 여러 가지 빛깔의 속옷들과 때 묻은 담요를 널어 지난밤의 분방한 습기를 말렸다.

 

드문드문 포격에 무너진 건물의 형해가 썩은 이빨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 바구니를 팔에 건 중국인들이 모여들었다. 뒤통수에 쇠똥처럼 바짝 말아 붙인 머리를 조금씩 흔들며 엄청나게 두꺼운 귓불에 은고리를 달고 전족한 발을 뒤뚱거리면서 여자들은 여러 갈래로 난 길을 통해 마치 땅거미처럼 스름스름 중국인 거리로 향했다.

 

철로 너머 제분 공장의 굴뚝에서 울컥울컥 토해내는 검은 연기는 전쟁으로 부서진 도시의 하늘에 전진(戰塵)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여전히 물결에 떠밀려 방죽에 부딪는 더러운 쓰레기와 썩은 생선들 사이에도, 닻 없이 떠 있는 폐선의 밑창에도 고양이는 없었다.


 

이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인천의 서쪽 끝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의 세계에 대한 비극을 체감하기에 충분하다. 회충약을 먹고, 죽은 고양이를 메고 가서 방죽에 버리고, 석탄을 훔치고, 끊임없이 입덧을 하고 아이를 낳는 엄마를 바라보고, 양공주인 매기언니 방에서 양주를 훔쳐 마시고, 죽은 매기언니의 시신과, 하얀 얼굴의 젊은 남자를 바라봐야 하는 나의 삶은 그 자체로 ‘공간’에 흡수된다.


아홉 살에 이사와 초조(草潮)를 겪게 되는 6학년까지 이 거리의 삶은 질기면서 슬프고, 아리면서 고통스럽다. 미군의 단도에 맞아 죽은 고양이, 이층에서 떠밀려 죽은 매기언니, 자신이 낳은 일곱 마리 새끼를 모가지만 남기고 잡아먹은 고양이, 할머니의 부고 등 죽음의 그림자들과도 닿아 있다. 그래서 여덟 번째 아이를 임신한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는 ‘어머니의 구역질은 비통하고 처절했다.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머니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죽음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유일하게 숨어드는 공간은 헌 옷이나 묵은 살림살이 따위 잡동사니가 들어찬 변소 옆의 골방이고, 골방 구석의 빈 항아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노오란’ 빛깔이자 냄새이다.

 

햇빛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치마 밑으로 펄럭이며 기어드는 사나운 봄바람도 모두 노오랬다.

 

끓어오르는 해인초의 거품도, 조개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해조(海藻)와 뒤섞이는 석회의 냄새도 온통 노오란 빛의 회오리였다.


 

‘노오란 빛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천지를 채우는 노오란빛과 함께 춘곤(春困)과도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나른한 혼미 속에 빠져’, ‘노오란 햇빛이 다글다글 끓으며 들어와 먼지를 떠올려’ 등의 묘사 속에서 ‘노오란’ 색이나 냄새는 밝고 환한 이미지의 반대쪽에 서 있다. 그로 인해 읽는 독자로 하여금 어느새 멀미에 가까운 매슥거림을 느끼게 한다.


오정희 소설가는 단단한 묘사의 힘으로 칼날 같이 번뜩이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밀도가 높아 다른 어떤 문장도 끼어들 틈이 없이 완벽하다. 중국인 거리라는 공간과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소설이라는 거대한 틀을 조금의 틈도 없이 치밀하게 직조하고 있다. 이 직조에는 삶의 생성과 소멸을 이야기하는 존재론적 비극에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제 겨우 6학년인 아이가 ‘인생이란……’ 하고 중얼거릴 때, 독자 역시 책장을 덮으며 ‘인생이란……’ 하고 조용히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독자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자, 소설이 발표된 지 30년이 넘어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대한제분 공장은 여전하지만 마당에 널린 밀은 없다. 중국인 거리는 ‘차이나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붉은 등을 내걸고 색색의 기념품과 먹거리를 팔고 있고, 삼국지 벽화가 그려진 담벼락을 따라 공원 꼭대기에 올라가면 여전히 노병의 동상이 서 있다. 바다는 메꿔지고, 부두나 포구,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로는 명맥만 남아 있다. 형형색색한 차이나타운과 그 반대편의 공장과 포구와 철도는 묘하게 이질감을 주며 소설 속 주인공이 느꼈던 ‘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체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음을 쓸쓸하게 체감하게 된다. 그래서 인천역에서 패루를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 멀리 보이는 포구와 공장의 굴뚝 연기를 아슴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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