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자리를 잡던, 간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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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자리를 잡던, 간석동
  • 유광식
  • 승인 2017.01.24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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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광식/사진작가

유광식 사진작가가 8주 간격으로 연재해오던 문화칼럼을 올해부터 4주 간격의 기획연재 <인천소요>로 카테고리를 변경해 연재합니다. 유 작가는 지난해 3월25일 첫 칼럼 '사라진 작은 금고, 용현2동'을 시작으로 6차례 연재했으며, 이번에 7회를 맞습니다. <편집자>


▲ 유광식_주택(간석2동, 인기 많은 집?)_2013

2002년 3월,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5톤 화물차에 이삿짐을 싣고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간석동과의 인연은 가족의 이사로 내가 인천에 유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경인고속도로를 달려 부평으로 나온 후, 경인로를 따라 간석오거리 앞에서 신호대기를 했을 적에 구월동 방향으로 높은 언덕이 희뿌연 하게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그 언덕 꼭대기에서 화물차는 좌회전하여 골목으로 들어갔고, 다세대 빌라주택(간석2동)에 짐을 풀었다. 이사를 와서도 당분간은 서울로의 출퇴근이 이어졌고, 5년이 지난 후에야 내가 사는 간석동이란 마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주로 간석오거리역과 동암역을 이용하다 보니 뒷산(만월산)과 구)희망백화점이 나의 주된 좌표가 되었고, 그 가운데 구역에는 주점과 모텔, 식당들이 바글바글했다. 도시의 골목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 길은 낮에는 잠잠하지만 저녁부터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검은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즐비했고, 집으로 가자면 그곳을 반드시 거쳐야 해서 그때마다 얼마나 싫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네온사인이 LED로 바뀌었을 뿐 시간이 모자랄 지경으로 그곳엔 연일 새 업소가 만들어지고 있다. 간석오거리는 지하철역과 인천 최초의 지하차도, 고가 차도까지 있는 복잡한 교차로이다. 고가다리의 큰 기둥에는 동화 ‘어린왕자’의 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어린왕자가 순수함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그 풍경이 원망스럽다. 공공디자인 사업에 단순하고 이기적인 시각이 스며있음을 목격한다. 어린왕자를 그려 넣는다고 그곳의 진풍경이 숨겨지면서 매끄럽게 미화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또한 구릉지인 간석동의 특성상, 겨울철 눈이 소복이 쌓였을 적에는 운전하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간담이 서늘했던 적도 있다. 한편 간석오거리 부근에는 작년까지 시민문화공동체(문화바람)와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놀이터)가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남동공단과 숭의평화시장으로 이삿짐을 옮겼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 유광식_간석오거리역 고가다리_2013

▲ 유광식_간석1동(유흥가)_2010

간석동 상권으로는 올리브백화점(1984~)이 있는데 백화점의 별관 주차장 옆에 우리 가족의 집이 있다. 그 주차장은 지금도 쿵-쿵-끄~ 하며 녹슨 철골에서 차가 오르내리는 소리가 아슬아슬하다. 예전에 향토예비군 교육훈련을 그 주차장 3층에서 받은 기억이 난다. 올리브백화점의 이전 이름이 희망백화점이다. 33년 역사의 자부심을 지닌 이 백화점은 처음과 다르게 세월이 흐르며 상권의 변화로 부도와 폐업의 위기를 겪으며 ‘희망’이란 이름이 ‘올리브’로 '백화점'이 '아울렛'으로 바뀌기도 했다. 예전부터 살던 인천의 사람들은 이 백화점이 생겼을 때 한번 쯤 구경하러 가본 적이 있다고 한다. 올리브백화점은 작년 말 총폐업展(무슨 전시인 줄 알았음)을 열어 극심한 경영난을 간접적으로 피력했다. 자주 이용은 안했어도 장소와 더불어 애잔함이 묻어난다. 한편 백화점 길 건너에 있었던 간석주공아파트는 내가 이사 올 적에 아파트의 일부가 철거 중이었다. 그 곳 놀이터에서도 향토예비군 훈련을 받았던 기억(당시 어떤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더니 파란 캔커피를 나눠주고는 사라졌다.)이 있다. 주공아파트가 사라진 후 드러난 엄청난 면적의 언덕배기는 얼마 안가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고, 백화점 앞 사거리가 십자형 횡단보도로 바뀐 것을 보고는 이곳의 인구유입을 새삼 확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백화점의 형편은 더 어려워졌던 모양이다. 


▲ 유광식_간석2동(올리브백화점)_2016

▲ 유광식_석천사거리에서 바라 본 간석래미안자이(옛 간석주공아파트)_2007


올리브백화점에서 서쪽으로 조금 걸어 내려가면 경사면으로 인천시청역이 자리한다. 그 근처에는 인천예고가 있는데, 간석동에서 지낸지 한참 후에야 동네에 예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퍽퍽한 주택들 사이로 말랑말랑한 예술의 현장이 있음에 내심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2009년 이후에 개인적으로 마음이 답답하여 길을 걸으며 정돈할 겸 우연찮게 산책을 하게 되었다. 당시 매일 한 시간(4km 내외) 정도의 길을 걷고 살폈던 여정이 고스란히 전시(일상의 연필I/ 2010)로 이어지면서 이후 작가 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인천예고 길 건너 맞은편에는 중앙근린공원이 자리한다. 그러나 공원 생김새의 반듯한 직선이 말해주듯 이 공간들이 어떤 삶을 잘라낸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속살이야말로 도시빈민의 투쟁이 강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원의 평온함은 절박했던 어떤 사건의 대체라는 점이 무척 시리다. 눈물 없이 덮은 땅 없다더니.


▲ 유광식_인천예술고등학교 운동장(현재 이 자리에 학교건물이 지어졌다.)_2010

▲ 유광식_A Pine#B(인천시청역 9번 출구/중앙근린공원)_2010


▲ 김주혜_중앙근린공원(인천시청역 9번 출구)_2016

'붉은 고개'라고도 불리는 주원고개를 넘어 북동쪽으로 걷다 보면 산을 하나 마주한다. 예전 ‘응답하라1988’ 드라마 촬영지인 신명여고가 나오고 그 뒷산이 바로 만월산(187m)이다. 마음이 혼란할 때 자주 오르내리던 산인데 북서쪽 약사사 방향으로 올라, 능선을 따라 만월산 터널 아래 간석사거리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약사사 앞은 옛 번영을 말해 주는 듯 ‘탈렌트’, ‘흑진주’, ‘얼음꽃’ ‘야생마’ 등의 그 내부가 궁금한 주점들이 많은데, 과거 이곳이 산을 오르느냐 흥에 오르느냐를 결정하던 고민의 길목이었을 것이란 상상에 웃음을 짓게 된다. 조금 위로 가면 약사사 앞 양지바른 구석에서 어르신들이 윷놀음(?)을 하는 진풍경이 자주 펼쳐진다. 만월산 능선에 서면 북쪽의 부평, 동쪽의 소래, 남쪽의 시가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화려한 시가지의 모습과는 다르게 북쪽 방향으로 부평농장이라고 불리는 제조업 공장과 그 너머 인천가족공원이 자리한다.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무겁지만 안할 수야 없단 생각이 든다. 만월산과 가족공원 사이에 있는 회색 슬레이트 지붕이 인상적인 부평농장은 옛 선배들의 노동운동 및 열악한 단기노동 경험담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볕이 모자라단 생각이 드는 이 장소에는 열심히 일하는 국내외 노동자들이 많지만 그보다는, 짙은 쇠 냄새와 살기 돋는 진돗개(전자경비CCTV 이름이기도 함), 여전히 이용되는 공동화장실이 이곳의 분위기를 대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농장(이름과 달리 간석동에 위치한다.)은 부평구 청천동에도 하나 있다. 사실상 도시 내에서 핍박 받는 섬처럼 이곳의 분위기는 무겁고 차다. 분명 그렇지만도 않을 텐데 말이다. 


▲ 유광식_만월산 능선에서 바라 본 간석동 일대_2007


▲ 유광식_만월산 능선에서 바라 본 부평농장+인천가족공원+부평 일대_2008


▲ 유광식_간석3동 부평농장_2013

부평농장을 등지고 내려오면 간석자유시장에 이르게 된다. 어머니는 집을 중심으로 세 곳의 시장을 이용했는데 올리브백화점과 간석자유시장 그리고 모래내시장이었다. 간석자유시장 옆도 오래된 낮은 건물들이 철거되고는 새로이 LH아파트가 들어섰다. 그곳이 철거되고 건물이 자라날 즈음에는 간석동 주변은 이미 너무도 많이 변해 버린 후였다. 간석2동도 우신주택재개발(2011~2013) 바람이 불었지만 끝내 무산되었다. 반대하는 주민들이 많았던 모양이고 두개의 재개발추진조합의 다툼에 볼썽사나운 경우가 많았다. 집안 곳곳에는 아직도 각각의 재개발추진조합에서 제공한 기념품이 솔찬히 눈에 띈다. 부모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재개발이 무산되면서 노후한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팔던지 짓던지 살던지의 세 경우였는데, 어떤 경우이든 간에 돌 깨는 소리가 자연스레 간석동(동명에서도 볼 수 있듯)의 배경음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겐 반가운 환대가 남아 있는 엄마의 기다림이 존재하는 곳. 한시도 조용하지 않은 주변 것들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삶의 희망을 품는 장소가 바로 간석동이다. 여전히 생경함이 가득하지만 나에게는 10년은 더 이곳의 기억이 쌓일 것 같다. 어찌보면 희망이라는 이름의 백화점이 큰 몫을 한 것도 같다. 올 봄이 되면 다시금 창밖으로 개나리와 진달래가 필 테고, 가을엔 빌라 입구 두 은행나무의 노오란 경쟁이 기대된다. 



▲ 유광식_간석3동 주택철거현장(현 간석LH아파트)_2009


▲ 유광식_간석1동 주택가_2010


▲ 유광식_간석3동 주택철거현장(현 간석LH아파트)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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