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가 수도꼭지를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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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가 수도꼭지를 물고 있다
  • 최일화
  • 승인 2017.02.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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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긴 호스 / 고영민

            긴 호스
                                     
                                               고 영 민
                                         

호스가 수도꼭지를 물고 있다
호스는 마당을 지나
꽃나무를 쓰러트린 채
감나무를 지나 풀밭을 지나 사라진다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로 뚫려 있는,
땀을 뻘뻘 흘리는
호스
 
호스가 밟힌 듯, 꺾인 듯
물고 있던 수도꼭지를 얼른 뱉어 놓는다
수도꼭지에서 물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진다
호스 끝에 누가 서 있을까
물은 바닥을 때리며 쏟아지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왜 안 올까
호스를 따라 걸어오는 사람은
호스는 도대체 얼마나 긴 걸까
목을 길게 뺀 채 호스가
속수무책 바닥에만
누워 있다
                                                       『시작』 2016년 가을호
 

*고영민: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창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지리산문학상, 박재삼 문학상 수상.

 
<감상 노트> 

위트와 해학, 그리고 쉽게 쓰기로 얻어낸 수작


이 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나 교훈을 기대하고 읽을 수는 없다. 재미가 있으니까 그냥 읽어가게 되는 경우다. 눈앞에 선명하게 전개되는 단순한 농촌 풍경 하나가 전부다. 풍경이라고 해봐야 수도꼭지에 연결되어 있던 호스가 빠져 물이 콸콸 쏟아지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오지 않고 물은 계속 쏟아져 도랑을 이루며 흘러가는 난처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게 전부다.
  
시가 거창한 게 아니라는 걸 이 시는 입증하고 있다. 아주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 한 편의 훌륭한 시가 된다는 걸 이 시는 보여준다. 이 시의 배경은 농촌이다. 농촌 출신인 시인은 이런 풍경을 예전에 종종 보아왔을 것이다. 그냥 예사로 보고 넘겼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그 광경이 바로 시의 씨앗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스를 끌고 화자는 마당을 지나 꽃밭의 꽃나무를 쓰러트리며 감나무 옆을 지나 다시 집 밖 풀밭을 지나 한참을 더 가서 논밭에 나가 있다. 호스는 입에서 항문까지 뻥 뚫려 있다. 그런데 갑자기 호스를 누가 밟았거나 혹은 돌멩이나 밭두렁에 꺾여 물이 막히고 급기야 호스가 수도꼭지에서 빠지게 된다. 사정없이 물줄기는 바닥을 때리며 쏟아지고 이내 도랑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는데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호스가 목을 길게 빼고 수도에서 꽃밭을 지나 감나무 옆을 지나 풀밭을 지나 들녘에 널브러져 있는 상황을 아주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농촌에서 성장한 사람은 안다. 가뭄이 농부들의 마음을 얼마나 타들어가게 하는지.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농작물이 바짝 말라 타들어갈 때 한 바가지의 물이, 소나기 한 줄기가 얼마나 감지덕지 고마운 것인지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안다. 가뭄이 들어 호스를 연결하여 멀리 있는 논밭에 물을 대던 농부의 난처한 한 순간을 시인은 놓치지 않고 한 편의 시로 경작하여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단순한 상황을 감칠맛 나게 묘사해내는 것 그것이 시인의 능력이고 시인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시가 태어나게 된다. 고영민 시인은 아주 탁월한 시 창작 방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차별화 하라'는 것이었다.
  
일부를 소개하면 "자신이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여, 내가 거북이라고 판단을 해서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갔더니 나 말고도 날고 기는 거북이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 역시 바다에 갔더니, 나와 비슷한 함민복 거북이, 이정록 거북이, 손택수 거북이, 문태준 거북이들이 먼저 장악을 하고 있더군요.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차별화입니다. 이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쓰기의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차별화의 전략으로 위트, 해학, 쉽게 쓰기, 12남매의 가족사 등을 가지고 승부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과 차별화 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개발한 시 창작법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이 시인의 시에는 위트와 해학, 그리고 쉽게 쓰기가 작품에 잘 적용되고 있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단순하고 해학적인 상황을 쉽고 위트 넘치게 묘사하여 훌륭한 시 한편을 창작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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