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낭만의 거리는 이제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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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과 낭만의 거리는 이제 옛말'
  • 김도연
  • 승인 2010.01.1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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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발따라…인천新택리지 ③중구 동인천동
동인천동에는 내동, 경동, 용동, 전동, 인현동 등 5개 법정동이 속한다.

과거 인천의 번화가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포동 문화의 거리와 동인천역 일대를 가리켰다.

신포동은 '인천의 명동'으로 불리며 패션 1번지로 명성을 날렸고, 동인천역 일대는 먹자골목과 지하상가 등이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했다.

신포 문화의 거리와 동인천역을 포함한 동인천동(東仁川洞)은 그렇게 한 때 젊음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명성을 다른 지역에 주고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한 때 젊음과 낭만이 넘치던 곳

패션일번가로 불리는 신포 문화의 거리 

동인천동은 구한말~일제시대 인천부 시절 화리, 내리, 외리, 용리로 불리던 일대이다. 지금의 이름인 내동, 경동, 용동, 전동, 인현동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광복 이후인 1946년부터이다.

싸리재의 안쪽이라는 뜻으로 안말, 안골 또는 한자로 내리라 불렸던 내동은 명실상부한 '인천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신포 문화의 거리가 자리잡은 곳이다.

신포 문화의 거리는 서울지하철 1호선의 끝자락인 동인천 역에서 우현로를 따라 경동 사거리 방향으로 언덕길을 넘으면 오른쪽에 위치한다.

신포 문화의 거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지나 일방통행길로 들어서면 길 양쪽으로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패션 매장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곳이 '인천의 명동'으로 불린 것은 바로 이들 패션 매장 때문이다. 길지 않은 400여m의 거리 양 쪽에는 남녀 정장에서부터 캐주얼 및 스포츠 매장은 물론, 구두와 악세서리까지 패션을 완성시키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이런 환경 때문에 1980~90년대만 하더라도 인천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고 할 만큼 번화가였다.

일제시대에도 이곳에는 일본과 서양에서 들여오는 온갖 '잡화'가 모여 성시(盛市)를 이뤘다고 한다. 당시 경성(京城)에서 유행하는 것은 죄다 인천에서 먼저 '손'을 타고 올라갔다고 할 만큼 , 붐볐던 곳으로 유명하다.
 
한 의류매장 직원 김모(38·여)씨는 "한 때 신포 문화의 거리에는 젊은이들로 넘쳐났다"며 "서울의 명동이라 불리는 것에 토를 달기 어려울 정도로 번화가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발길이 줄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예전 같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얘기처럼 지금은 '패션 일번지'라는 칭호에 어울릴 만큼 유동인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더러 찾는 발길들이 있다. 1990년대에는 뱃길을 통해 인천에 들어오는 중국과 러시아 등지의 외국인들이 지하상가를 중심으로 많이 찾아 매장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우리나라 종교의 탄생지 가운데 하나

우리나라 개신교의 모교회 가운데 한 곳인 내리교회 

신포 문화의 거리에 도착하기 전 언덕배기에서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지금까지 걸어온 것보다 더 가파른 언덕에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교회를 볼 수 있다. 이곳이 우리나라 개신교의 모(母)교회로 불리는 곳 가운데 하나인 '내리교회'이다.

이 교회 최영후 목사의 말을 빌리면 내리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머물렀던 데서 시작됐다고 한다.

최 목사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에 올라가기 전 45일 동안 교회 주변에서 머물며 실제로 가져온 풍금을 연주해 '만복의 근원'이란 찬송가를 직접 부르며 예배를 봤다고 한다"며 "내리교회가 서울의 다른 지역 교회보다 다소 늦게 시작했음에도 모교회로 칭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제법 큰 규모의 교회를 만날 수 있는데 , 이 건물은 1984년 지어졌다.

내리교회의 시작은 1885년이지만 정식 예배당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01년 십자가 예배당으로 불리는 '웨슬리 예배당'을 짓고 나서다. 교회 앞쪽에는 1901년부터 지금의 건물을 짓기까지의 '머릿돌'을 볼 수 있어 옛 교회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내리교회는 첫 예배당이었던 웨슬리 예배당 건물을 교회 뒷편 공터에 복원하려 하고 있다.

내동이 우리나라 종교의 탄생지 가운데 한 곳으로 불릴 만한 이유는 이 내리교회 뒤에 국내 최초로 성공회의 씨앗을 뿌린 인천내동 성공회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중구에 따르면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890년 고르페 주교가 지금의 자리에 성미가엘교회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을 하면서부터이다. 당초 교회는 1891년 9월 지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고, 현 건물은 다시 1956년 준공한 것이다.

내리교회에서 불과 70m 정도 떨어진 성당 건물은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만큼 오래돼 보인다.

인천 내동 성공회 성당 


전통의 고등학교 밀집지역 전동
 
성공회 성당에서 자유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려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두 고등학교를 만날 수 있다.

제물포고등학교와 인일여자고등학교가 그 곳이다. 이들 학교에선 해방 이후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면서 이들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데 일조했다. 지금도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일을 하는 졸업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두 학교가 위치한 곳이 바로 동인천동의 법정동인 전동(錢洞)이다.

전동이란 이름은 1892년 이 일대에 현대식 화폐를 만드는 기관 전환국이 설치돼 1900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갈 때까지 운영된 데서 유래한다.

지금의 제물포고와 인일여고 외에도 1998년 연수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기 전까지 인천여고도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전동은 한 때 '인천 교육의 메카'로 불렸던 곳이다.

자유공원길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란히 맞닿은 제물포고와 인일여고를 볼 수 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자리잡은 응봉산 분지를 옛날에는 '웃터골'로 불렀다. 웃터골이란 '위의 터 혹은 높은 터'라는 의미다. 당시 인천시의 중심지로서 이곳이 시내 어디서 바라보아도 응봉산 산등성이와 그 골짜기가 우뚝 높아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웃터골은 1920년에 정지(整地)돼 1935년까지 15년간 인천공설운동장으로 쓰였다. 이곳에서 일인에 대항해 민족 감정을 발산하던 한용단(漢勇團) 야구팀의 선전(善戰)과 단장 곽상훈(郭尙勳) 의원의 일화가 전해진다.

언론인 고일(高逸) 선생은 '인천석금'에서 "인천 청년 운동의 발원지는 웃터골이다. 인천 시민에게 민족혼의 씨를 뿌렸고 민주주의의 묘목을 심었으며,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이 바로 웃터골이다."라고 썼다.
 
아주 상징적이면서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바로 유명한 3·1 독립투사요, 민족 교육자인 길영희(吉瑛羲) 교장이 광복 후 이 자리에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둥학교를 개교했기 때문이다.

인천중학교는 평준화 시책 때문에 없어졌고 지금은 제물포고등학교만 남아 있다. 하지만 고일 선생이 지적한 '민족혼'을 이어받아 이 자리에 두 학교가 문을 열어 인천은 물론 전국적인 명문으로서 이름을 얻었다.

특히 제물포고등학교의 개교는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간 교육의 참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 개교'였다고 평가를 받는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 오래된 이 학교의 '교시'이다. 강당의 액자 속에는 '유한흥국(流汗興國), 위선최락(爲善最樂)' 글귀가 담겨 있다. 일체의 허례와 격식을 버리고 오직 양심에 따른 자율만을 존중하는 학교. 길 교장이 지향하던 교육의 최종 목표였다.

우리나라 첫 무감독 시험 제도, 무규율부 제도, 학생 주관 전교생 월례 조회 제도, 전교생이 스스로 그룹을 결성하는 그룹 제도,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 스스로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학생 교지에 실리지 않는 학교,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을 가진 학교….

많은 풍상과 변화를 겪었지만 제물포라는 지명은 또 이렇게 학교 이름으로도 남아 있다.

제물포고에는 좀 색다른 문화재가 있다. 바로 강당 건물인 '성덕당'이다. 지난 2008년 10월 27일 등록문화재 제427호로 지정된 성덕당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인천중학교의 강당으로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벽돌조 건물이다.

지금의 교사(校舍)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올해로 66년이란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다.
 

슬픔이 희망으로 자라난 인현동
 
제물포고에서 축현길을 따라 동인천역 방향으로 400여 m  내려가면 왼편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을 만날 수 있다.

2004년 개관한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은 10년 전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건으로 많은 학생들을 앗아간 이후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된 곳이다. 비록 슬픈 탄생 비화를 갖고 있지만 지금은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공연과 전시가 마련된다. 동인천동을 '청소년 문화의 중심지'라고 소개하는 이유에는 학생문화회관도 한 몫을 한다.

인현동은 또 사람들에게 '음식거리'로 회자되는 지역이다. 학생교육문화회관 옆 '삼치거리'가 그렇고 동인천역을 등지고 길 건너 좌측 골목길에 위치한 '인현통닭'이 그렇다.

3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인현통닭은 기름기를 싹 뺀 전기구이 통닭으로 신포 닭강정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닭요리 음식점이다. 인천인이라면 한 번쯤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함께 왔다 갔을 만큼 유명하다. 요즘도 인현통닭 집에는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현통닭집 앞으로 배다리를 향해 나 있는 길가에는 주로 과일 상점들이 많다. 이곳이 인천의 대표적인 과일상점 거리이다.

경인철도 개통 이후 이 일대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게 되자, 장사꾼들이 과수원이 많았던 송림·숭의·용현동 등지에서 가깝고 시내의 중심지이기도 한 이곳으로 여러 가지 과일을 내다 팔며 길 주변에 많은 청과물 가게가 들어서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러나 이 도로가 옛날 '참외전거리', 또는 그 발음이 조금 변해 '채미전거리'라 불리던 곳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이제 흔하지 않다. 그만큼 세월이 지나서이기도 하지만, 구(舊)도심이 날로 쇠퇴하면서 그 전의 명성을 잃어가기 때문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싸리재 축제와 용동 큰 우물 축제

용동 큰 우물 

인현통닭집을 뒤로 하고 용고개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뚜껑을 덮은 커다란 우물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용동 지역을 대표하는 큰 우물이다.

지금은 문화재로만 지정돼 있고 사용하지 않는 용동 큰 우물은 1883년에 만든 것으로, 자연 우물을 현대식으로 고쳐 만든 것이다. 물맛이 좋고,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아 수돗물이 보급되기 전까지 많은 시민들이 길어다 식수로 썼다고 한다.

중구에서는 이 큰 우물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고 동인천역 주변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매년 가을에 축제를 연다. 축제는 사물놀이패들의 놀이와 대동굿 12마당을 펼쳐 지역의 무궁한 발전과 평안과 만복을 기원한다.

용동에는 술집이 아직도 더러 있다. 용동은 일제시대에는 권번(圈番)이라고 해서 기생들이 손님에게 술을 따르며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던 곳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런 '전통'은 1980년대까지 이어오다가, 구도심이 신도시들에 자리를 내주면서 용동도 내리막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큰 우물을 지나 답동 성당 방면으로 오르다 보면 애관극장이 있는 '싸리재'를 만날 수 있다.

싸리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이름의 싸리재는 지금의 경동 웨딩거리와 가구거리 일원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이 일대에서 벌어지는 게 '싸리재 축제'이다.

화재가 빈번히 발생해 화기를 진정시키고자 '굿판'을 벌인 데에서 유래했다. 개인의 기복은 물론 지역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재래의 전형적인 '굿'과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를 통해 화합을 다진다고 한다.

싸리재 지역에 위치한 애관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가 그 전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애관극장의 연혁을 보면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개관해 1925년 애관극장으로 바꾸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소실됐다가 1960년 새로 신설됐고, 2004년에는 5개관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동인천동은 신포 문화의 거리와 학생교육문화회관 등으로 아직도 젊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지난날 번창했던 지역이 점점 쇠퇴하는 것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구도심이 다시 번성해 사람들의 발길을 모을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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